주입식 암기로 영어를 배우면 망하는 이유

  • 기자명 박기범
  • 기사승인 2017.09.2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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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다'라는 표현을 영어로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많은 분들이 'keep a diary'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정답이다. 하지만 왜 일기를 '쓴다'는 표현에 write 대신 keep이란 단어가 쓰이는지는 잘 모른다. 편지를 쓸 때도 'write a letter', 이름을 쓸 때도 'write one's name' 등 전부 'write'라는 동사를 쓴다. 

그런데 왜 일기를 쓸 때는 keep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write a diary'도 맞는 표현이다. 일기를 쓴다는 표현은 두가지 전혀 다른 상황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Do you keep a diary? (너 일기 쓰니?)
2) I'm busy writing a diary. (나 지금 일기 쓰느라 바빠.)
 

1번 예문은 상대방이 평소에 꾸준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냐고 묻는 말이다. 꾸준히 쓰려면 그 습관을 '유지하고 지켜야'한다. 그래서 그런 의미를 가진 동사 keep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2번 예문에서는 일기를 쓰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물리적으로 종이에 펜을 굴려 적는 동작을 묘사하기 때문에 write를 쓴다. 따라서 'keep a diary'는 'keep writing a diary regularly' 즉, 정기적으로 일기를 계속 쓴다는 말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다. 

언어는 상황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단어나 표현을 암기하기 전에 그것이 표상하는 상황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암기를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은 우리에게 keep a diary만이 정답이라고 강조한다. 

일기 쓰다 = keep a diary. 중요한 숙어니까 똥그라미 땡땡!!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write가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학생도 거의 없다. 당연히 단어 숙어 문법 죄다 외우고도 실제 영어는 입도 뻥긋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된다. 

오히려 영어는 암기과목이라는 반론도 있다. 어차피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는 달달 외우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시험 성적만 오르면 됐지 왜 영어까지 진짜로 잘하려고 하는가?'라고 반문도 한다. '출제될 가능성이 높은 문제를 암기'하는 방식은 영어를 주입식 암기과목으로 만든 원흉이다. 시험 성적과 합격 여부가 실제 영어 실력보다 중요한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최근에는 수능 영어시험도 문제집을 암기해서 대비할 정도로 '암기학습법'은 한국 수험생들에게 인기다. 소위 출제 예상문제를 찍어주는 학원과 강사가 수강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골치 아프게 공부하지 않아도 운이 좋다면 문제를 맞출 수 있다니!

미국의 수능시험이라 할 수 있는 SAT 시험을 미리 훔쳐낸 학원과 TOEIC 시험의 기출문제를 빼돌려 문제가 된 어학원 모두 우리나라 학원이다. 머리 쓰기 싫어하는 교육 소비자들을 위해 범죄도 불사하는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유능한 영어학원과 강사, 교재들이 넘치고 영어를 잘 하고 싶어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왜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언어를 배울 때 암기는 중요하다. 그러나 단순 암기로 그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는 없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외운 것을 바탕으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응용력은 응용문제나 심화문제를 많이 풀어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언어가 지시하는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 교육 환경에서 이런 열린 교육이 부족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주입식 암기 위주의 영어 교육은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함께 망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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