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왜 '난'이고 6·25는 왜 '변'인가?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11.2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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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세상을 어지럽게 하면 난(亂)

고려 인종 4년(1126년)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를 제거한 다음 정치를 독단하였지만, 인종이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한 결과,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자겸의 난'이다.

 

인종 13년(1135년)에는 신채호가 조선 역사 천 년의 대사건이라고 한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묘청은 고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개경의 지덕이 쇠한 때문이라며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가 김부식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자, 난을 일으켰다. 김부식이 진압 책임자가 되었고, 반란군의 실권자인 조광은 형세가 불리해지자 묘청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무신 정권기에는 무신들이 번갈아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문존무비의 풍조 속에서 문신의 횡포에 시달리며 온갖 수모를 감수하던 무신들의 분노가 1170년 의종의 보현원 나들이에서 폭발했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지위 고하를 떠나 수백의 문신을 살육했다. 이로써 무신들의 천하가 되었다.

 

명종 3년(1173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세우려고 난을 일으켰다. 정중부는 이의민과 이의방으로 하여금 김보당 이경직 등을 참살하였고, 이의민이 의종마저 살해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김보당의 난'이라 부르며, 명종 4년(1174년)에는 문신 조위총이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정부군을 상대로 2년 가까이 싸우다 패했으니, '조위총의 난'이라 한다.

 

조선 시대의 난은 왕위를 놓고 형제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벌였던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시작되었고, 1453년 발생한 계유정란(癸酉靖難)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한 다음, 어린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아 자신이 왕좌에 오른 사건이었다.

 

그런데 다른 난들이 어지럽다는 의미의 '난(亂)'을 쓰는 것과는 달리 어려움이나 재앙을 의미하는 '난(難)'을 쓰고 '정란(靖難)'이라 한 것이 이채롭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계유정난'은 어려움이나 재앙을 바로 잡았다는 뜻으로서 승자 세조 즉위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하지 않은 고려 시대 대표적인 천민의 난으로 '망이-망소이의 난'이나 '만적의 난' 그리고 1592년의 '임진왜란', 1636년의 '병자호란' 등이 모두 어지러울 '난(亂)을 써서 망이-망소이, 만적, 왜와 호(오랑캐) 등이 세상을 어지럽게 했음을 의미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과거 동학도들이 봉기하여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는 의미로 동학란(東學亂)이라고도 했지만, 이제 이 말은 더 이상은 쓰지 않고 '동학농민항쟁' 또는 '동학혁명'이라고 부른다.

 

급작스러운 정치적 변동이나 재앙은 변(變)

그럼 이제 '변(變)'으로 넘어가 보자. 1884년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 급진 개혁 세력이 우정국 낙성식 날 일으킨 사건은 '난'이라고 하지 않고 '변(變)' 자를 써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고 한다. 이날 수구파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등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KBS 화면 캡처

'정변'의 사전적 의미는 '혁명이나 쿠데타 따위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생긴 정치상의 큰 변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변'만 놓고 보면, '갑자기 생긴 재앙이나 괴이한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과 '변'의 합성어인 '정변'은 비합법적인 정치적 수단에 의해 갑자기 발생한 재앙 또는 괴이한 일로 인해 생기는 변동을 의미한다.

 

10년 후 우리는 또 한 번 '변'자가 붙는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1895년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인데, 여기서 사변(事變)은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1.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나 그 밖의 큰 사건.
2. 전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경찰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무력을 사용하게 되는 난리.
3. 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 (예) 우리나라의 가정은 사변 때 식구들의 생사조차 서로 모를 정도로 파괴되었다. <김승옥, 역사>

 

동트기 직전인 새벽 5시경에–애당초 야습을 기도했으나 시간이 지체되었다-허락도 없이 궁궐에 침입한 일본 군인들과 낭인들에 의해 국모가 무참히 살해당했으니, 위 3번에 해당할 것이다.

 

예문에 등장한 '사변'은 지금은 한국 전쟁, 6·25 전쟁 등으로 부르는 '6·25 사변'을 가리킨다. 따라서 '6·25 사변'이라 하면, 북이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동란(韓國動亂)'이란 용어도 사용했었는데, 이게 뜻밖에도 같은 동포끼리 난을 일으켰다는 '동란(同亂)'이 아니고,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진다'는 의미의 '동란(動亂)'이다.

 

사건 규모나 지속시간으로 구분되지만 명확하지 않아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해 보자. 묘청, 정중부, 만적, 왜, 호 등 사건에는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는 의미로 난(亂)을 썼다. 같은 글자를 쓰고 있으므로 '한국동란'도 여기에 넣어야겠다. 그러나 계유정란은 어지러움이나 재앙적인 상황을 바로잡았다는 정반대의 의미로 '정난(靖難)'이라 했다. 난이 아닌 변을 쓴 것은 '갑신정변', '을미사변' 그리고 '6·25사변' 등이다.

 

정치적인 성격의 사건이라 해도 어떤 것은 난이고 어떤 것은 변이다. '이자겸의 난'과 '갑신정변'이 그렇고, 같은 '변(變)' 자를 쓰고 있지만, 을미사변과 갑신정변은 사뭇 다르고, '6·25 사변' 또한 앞의 두 '변'과 같지 않다. '6·25 사변'은 임진왜란, 호란, 한국동란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난과 변의 뚜렷한 차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사건의 규모를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은 소수에 의해 일어나고 희생자 수도 많은 인원이 관계된 여타의 난과 비교하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6·25 사변'에는 한국군, 인민군, 유엔군, 중국군, 소련군 등이 참전 또는 관계했고, 3년 동안에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400~500만의 희생되었으니 한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극적 사건이었다.

 

굳이 난과 변이 대별되는 것을 찾는다면 사건 지속 시간이랄 수 있다. 난은 사건 발생에서 종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묘청의 난(1135.1~1136.2)은 2년,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과 합쳐 7년간 지속되었다. 1173년 8월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은 두 달이 안 돼 종료되었으니 비교적 짧지만, 갑신정변은 3일, 을미사변이 밤사이 시작되고 끝난 것에 비하면 긴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6·25 사변'은 3년간 지속됐다. 따라서 사건의 성격이든 규모든 기간이든 난과 변을 뚜렷한 기준을 갖고 명쾌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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