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외교' 때문에 임진왜란이 왔다?

  • 기자명 한윤형
  • 기사승인 2017.11.22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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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사드 보복’ 정국을 종결할 상황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이 거세다. 주로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추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균형 외교’에 대한 비판이 대세다.

중앙일보 11월 18일자 33면에 실린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의 <[글로벌 포커스] 강대국의 각축 부추기는 한국 ‘균형 외교’>라는 글도 그러한 맥락 위에 있었다. 마이클 그린 부소장은 한국이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상당히 많은 걸 얻었다고 평가하면서도, 중국의 ‘사드 보복’을 해소하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구두 약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황은 우려스럽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균형외교를 실행하고 있다. KBS 화면 캡처

이런 우려나 주장은 존중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매우 미심쩍은, 거의 사실관계에서 오류라고 봐야 할 논거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해당 칼럼에서 마이클 그린은, 

“(...) 하지만 한국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을 상대로 ‘균형 외교’를 추구했을 때 열강의 각축은 오히려 심해졌다. 그 결과 강대국들은 1592년, 1894년, 1904년, 1950년 한국을 침략했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에는 오판이 어느 정도 허용되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훨씬 더 취약하다. 한국의 전략 그 자체보다 ‘강대국들이 한국의 전략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지난 2주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주변 강대국이 잘못된 결론을 내리진 않을지 경계해야 한다.“ 

라면서 글을 맺었다. 칼럼에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면 권위가 부여되지만, 타당한 예시인지를 살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1592년? 1894년? 1904년? 1950년?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연도가 말하는 사건들은 명확하다. 1592년은 임진왜란이다. 그 뒤의 두 개 연도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니 조선말기, 혹은 대한제국의 상황에 해당한다. 1950년이라면 한국전쟁이다. 이 사건들이 균형 외교로 인한 강대국의 침략의 산물이란 건 사실일까.

균형 외교 관계없이 대한제국 유지 어려워

그나마 맥락이 닿는 것은 대한제국의 상황이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되도록 여러 나라가 이 나라에 이해관계가 엮여야 독립을 보장하는 외교를 할 수 있다고 여겼는지 여러 종류의 이권을 여러 나라에 흩뿌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관계를 만들기엔 한반도에 매력적인 지하자원이 없었고, 나라의 힘이 약한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고난의 요인이 됐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대한제국과 고종의 실패를 ‘균형 외교의 실패’로 칭할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먼저 그들은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분법을 몰랐다. 저 이분법이 보편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와는 별개로, 저 정세인식을 따른다면 고종은 자신의 나라가 영미일과 중러의 대립관계 속에 위치해 있단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과연 그래야 했을까.

당시엔 중러가 하나로 묶일 이유가 별로 없었다. 고종이 파악하지 못한 것은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운명을 일본에게 ‘아웃소싱’했다는 사실이었다. 영미가 그렇게 결정한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을 길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는 것 밖에 없었다. 고종은 그 결론까지는 이해했다.

러시아가 승리했을 경우 조선의 운명이 어땠을지는 또 예측 영역 밖의 일이다. 근래에 한 그룹의 학자들은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오늘날 한반도 전체가 지금의 북한과 같은 상태로 떨어졌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원했던 것은 식민지가 아니라 부동항 정도였고, 러일전쟁 승패가 바뀌었을 경우 러시아 혁명의 향방조차 알 수 없었단 점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예측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결과적으로 당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은 균형 외교를 하든 말든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종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워낙에 국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은 그 근대 직전의 상황에 대한 강렬한 콤플렉스에 상승의 기원을 두고 있다. 산업화세력이든 민주화세력이든 경제성장과 국가안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래서다.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관통하는 균형 외교의 정서란 것도 과거 역사와는 다르게 국방력 강화에서부터 출발한다. 미사일 사거리를 늘리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좀 더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식의 계산이 이면에 깔려 있다. 이런 문맥을 건너뛰고 대한제국 상황과 지금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에 대한 조선의 '무지'가 임진왜란 원인

나머지 사례는 훨씬 어이가 없다.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을 돌이켜본다면, 당시 조선은 일본이 강대국이란 사실조차 몰랐다. 이 무지를 조소할 수는 있으나, 그 무지는 균형외교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중국과 일본이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한반도의 조건이라는 지정학적 정세는 임진왜란 이후에야 출현한 것이었다. 이전에 한반도 왕조들에게 요구되는 균형외교는 중화왕조와 북방 유목민족 사이에서의 균형외교였다.

이 기준으로 살핀다면 고구려는 당나라가 북방을 압도하는 정세 변화를 제대로 짚지 못해 멸망당했다 말할 수 있고, 고려는 중기에 중원과 북방이 서로를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균형 외교로 번영을 이루었다. 몽골제국이 중원을 정벌했을 때는 매우 적절한 시점에 신속하여 국토와 풍습을 보전했다. 균형 외교든 사대 외교든 그 자체로 답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외교 정책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한편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여진족을 제어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논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조선이 일본이 강대국이란 사실을,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당시 알았다면 상황 대처는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상황에 대해서도 적을 필요가 있을까. 남북한이 갈라서서 소련과 미국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균형 외교를 추구할래야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원하는 결론 위해 '아전인수' 역사 해석 경계해야

결론적으로 볼 때, 마이클 그린 부소장이 제시한 예시는 타당하지 않다. 물론 그가 끌어들인 역사적 예시가 타당하지 않다 해도 그가 제시한 전체적인 정세판단은 옳을 수 있다. 문제는 그의 논지 전개 방식이 요즘 만연한, 역사적 사례를 본인이 원하는 정세판단에 아전인수격으로 동원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병자호란이나 남한산성의 정세를 근거로 균형 외교가 답이라고 말한다.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의 의리에 빠져 청나라를 경시한 상황이 한국이 미국에 의존하면서 중국을 경시하는 상황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유할 때 누가 명이고 누가 청인지 알 방법은 사실 없다. 비슷해 보이는 그림을 포개놓고 본인들의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만 있다.

영국이나 일본 같은 섬나라에 비해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더욱 취약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국의 외교적 전략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바로 그렇기에, 지금 현재의 조건을 제대로 기술하고 우리가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에 대한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과거의 사례는 그저 비유에나 적합할 뿐이다.

그 현재의 조건을 기술하려고 했을 마이클 브린 부소장이 한국사에 정통할 필요는 없었다는 지적을 한다면 이는 타당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굳이 잘못된 예시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시도 역시 잘못된 일일 것이다. 그런 시도는 지금 문재인 정부 수준의 균형 외교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실은 매우 취약한 일이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윤형 팩트체커는 한국 사회의 청년세대 문제, 미디어 문제, 그리고 현실 정치에 관한 글을 주로 써왔다. 매체비평 전문지 <미디어스>에서 2012년부터 3년 간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데이터앤리서치 부소장이다. 주요 저서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미디어 시민의 탄생》(2017)이 있다. hanyhy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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