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기사 '지한파'는 신사참배 정치인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1.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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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 한국 외교부가 ‘한ㆍ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문제 합의 검토 TF’의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TF는 "고위급 협의는 비밀협상으로 진행됐고 한국 쪽에 부담이 될 수 있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한ㆍ일 합의문에서 논란이 된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을 외교부가 삭제요청했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가 이를 묵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태규 위안부TF 위원장이 2015년 당시 한일 위안부 이면 합의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위안부합의검토 TF' 발표 직후 일본 반응 전한 보수언론 

2015년말 당시 한일간 이면 합의에 대한 의혹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 이 발표 직후, 이른바 ‘외교적 후폭풍’을 언급하는 보수언론의 보도가 쏟아졌다. 그중에서도“‘한국 내 문제를 일본으로 넘겨’ 지한파들도 비판 나서”라는 제목의 <중앙일보> 토요판(12월 30일자) 기사(네이버 기사 제목은 '지한파마저 돌아서는 일본, 그 내부 분위기는')가 눈에 띈다.

도쿄특파원이 작성한 중앙일보 기사는 먼저 “전 정권이 한 일은 모두 악이라고 단락적(短絡的)으로 몰아붙인다면. 그야말로 한국정치의 악폐인 보복의 연쇄는, 언제까지나 끊어지지 않는다” (필자의 원문 직접인용ㆍ번역)고 지적한 하코다 데쓰야(箱田哲也) 논설의원의 12월 29일, <아사히신문>칼럼을 인용했다. 하코다 논설위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직접 “친구로서의 우려와 조언”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코다는 특파원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던 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감격적으로 회고하는가 하면, 동일본대지진 당시 한국국민이 베푼 온정을 언급하며 혐한론에 반박한 이력이 있다. 또 2017년 여름에는 “군사독재정권의 무거운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쟁취한지 30년만에 현직대통령을 혁명적으로, 그것도 비폭력으로 끌어내린 한국의 열기와 “입만 열면 아베를 절찬(絶讚)하는 일본의 톱클래스 관료”의 모습을 대비시킨 논설(“북한화하는 일본?”<아사히신문> 8월 11일자)을 써서 <산케이신문>과 넷우익으로부터 공격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면모를 볼 때 그를 지한파의 범주에 넣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다음 내용이 이어지면서 중앙일보 기사는 신뢰성을 잃었다.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편”이라며 자민당 소속의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중의원을 언급하고 그의 발언을 상당 부분 인용했기 때문이다. “온건한 성격으로, 한국을 잘 아는 그가 그렇게 한국 정부를 비판한 건 이례적”이라는 일본 기자의 평가도 소개됐다. 그런데 사실 "지한파의 피로감”을 언급하는 기사에 실리기에 가와무라는 매우 부적절한 인물이다. 가와무라가 어떤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자. 

중앙일보에 인용된 '지한파' 가와무라 다케오는 신사참배 극우성향

부친의 선거구(야마구치 현 하기 시)를 물려받아 지방의원으로 활동하다 1990년 국회에 입성한 가와무라가 세간의 화제를 모은 것은 제1기 고이즈미 정권 때인 2004년 5월의 일이다. 문부과학상이던 그는 내각부가 개최한 "교육개혁 타운미팅"에서“교육칙어(教育勅語)에는 소중한 윤리력(倫理力)이 있으며. 그 정신이 전부 나쁘냐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고 발언했다. 

1890년 메이지 일왕에 의해 반포된 교육칙어는 당시의 암흑정치를 뒷받침한 교육 원리로 일왕에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 골자다. 그런 이유로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폐기되었다. 이 일로 일본최대의 진보매체 신문 <아카하타> 등 민주ㆍ진보 진영은 “군국주의교육을 미화”했다며 가와무라를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던 아베 신조와 함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관련 심포지엄에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8월 15일에는“다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소속 의원들과 함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결행했다. 

가와무라는 이런 자기의‘소신’을 생방송에서 드러낸 적도 있다. 제1기 아베정권 시절이던 2007년(3월 21일) TBS의 “NEWS23”에 출연했을 당시, 평화헌법(헌법 9조) 개악을 위한 꼼수인 개헌절차법과 관련, 고이케 아키라(小池晃) 일본공산당 정책위원장이 “헌법 9조 개악과 일체화된 법안일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에도 논의를 거쳐야할 문제들이 잔뜩 있다”고 비판하자 “시기가 무르익었다”며 받아쳤다

가와무라 다케오는 대표적인 일본 '지한파' 정치인으로 한국언론에 종종 인용되지만, 극우정치인이다. 2015년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산케이 신문 한국 지국장을 고소한 것과 관련해, "한국은 성숙도가 모자란다"고 발언한 바 있다.

한일 교류협력 이미지에 가려진 극우 정치인의 민낯

또한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야스쿠니파'의 정체성을 내세운 아소 다로(麻生太郎) 정권의 관방장관 시절이다. 현재도 제3기 아베 정권의 부총리인 아소는 ‘야스쿠니파의 총본산’ 일본회의의 의원조직,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일본회의의련) 회장을 지냈으며, 총리 취임 당시에도 특별고문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소 내각의 국무위원 중 과반수이상이 이 조직 소속이었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개헌을 통해 군사재무장을 하려는 일본의 우익 정치인 중 대표적인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와무라도 (표면적으로는) 정권의 핵심에서 벗어난 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마당이니‘진정한 한일우호’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었을 입장을 선회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의“지한파”이미지는 한중일 어린이 동화 교류와 조선통신사 그리고 외국인참정권 문제 등에 관여했던 그의 경력이 일으킨 착시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모든 활동을 벌이던 당시에도 그가 이미 자민당 내 강경파(タカ派) 내지 초강경파(超タカ派)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2015년에는 가와무라는 "한국은 아직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주장한 것이 한일 양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문제 해결에 있어 일본 내부의 상황을 살피고, 지한파, 혹은 친한파의 의견을 듣는 것은 나름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다만, 그에 앞서 명심해야할 것은 자칫 '친구의 얼굴'을 한 상대의 민낯이 어떠할지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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