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01.29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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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보컬그룹의 창세기였다. 블루벨즈, 쟈니 브라더스, 봉봉사중창단, 멜로톤 쿼텟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봉봉사중창단이 부른 ‘꽃집 아가씨’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때 자주 듣고 따라 불렀다.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단둘이 만나면 단둘이 만나면 너무나 상냥해요. 꽃집에 아가씨는 미워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어요. 남들이 보는 앞엔 남들이 보는 앞엔 얄밉게 쌀쌀해져요. 예쁘고 예쁜 꽃들이 모두 다 방실 웃는데 꽃보다 예쁜 그녀의 귀여운 그 얼굴만 언제나 새침해. 어쩌다 한 번만 웃으면 마음이 약한 나는 미쳐요. 새 빨간 장미보다 새 하얀 백합보다 천배나 만 배나 예뻐요”

장미보다 천배 만배 예쁘다니 뻥이 좀 샜던 것 같은데, 코맹맹이 소리로 ‘마음이 약한 나는 미쳐요’라고 하던 대목에 이르면 꽃집 아가씨가 얼마나 예뻤는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노래의 인기 때문이었을까? 꽃집 아가씨는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었고, 꽃집 앞에는 늘 더벅머리 총각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송창식 노래에는 꽃집이 아닌 담배 가게 아가씨가 등장했다. 특유의 흥얼거리는 창법으로 맛깔나게 묘사하던 ‘담배 가게 아가씨’는 짧은 머리를 곱게 빗은 새침데기였다.

“우리 동네 담배 가게에는 아가씨가 예쁘다네. 짧은 머리 곱게 빚은 것이 정말로 예쁘다네. 온 동네 청년들이 너도나도 기웃 기웃 기웃. 그러나 그 아가씨는 새침데기. 앞집의 병열이 녀석은 딱지를 맞았다네. 만화가게 진원이 녀석도 딱지를 맞았다네. 그렇다면 동네에서 오직 하나 나만 남았는데. 아 기대 하시라 개봉 박두!“

병열이와 진원이에게 딱지를 놓은 담배 가게 아가씨가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하기 일보직전 백마 탄 기사로 변신한 주인공 창식이(?)가 아가씨를 구하는 모습은 영화 속 장면 같다. 이 노래의 인기 때문이었을까? 골목 어귀에 있던 조그만 담배 가게에는 언제나 등에 기타를 맨 장발의 청년들이 서성였고, ‘담배 한 갑 주세요.’ 하며 구멍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담배 가게 아가씨’보다 10년 전에 나온 박일준의 ‘아가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가씨였다.

“아가씨 오 나 좀 봐요. 우물쭈물 하지 말고 대답 좀 해 봐요. 나만을 좋아한다고 아가씨 말해요. 가슴에 감춘 사랑의 그 말. 진실한 마음 말해 봐요. 이제는 웃으며 얘기해요. 둘이라면 행복할 거예요 우리 서로 웃으며 말해요.”

미지의 아가씨라 더 신비로웠을까? 내가 가요프로그램의 디제이였다면 박일준 씨에게 반드시 물어봤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아가씨는 어느 집 아가씨입니까?” 여하간 세 노래에 등장한 아가씨는 예쁘고 새침데기 미녀였으며 신비로운 존재였다. 반면에 아가씨 노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눈물로 임을 기다리는 애달픈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애조 띤 창법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렸던 ‘동백아가씨’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었다.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얻을 정도로 빅히트를 쳤지만,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68년 2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방송에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가, 1987년 8월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등과 함께 무려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해금되었다.

그렇게 ‘동백아가씨’는 돌아왔지만, 아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1960년~1990년에 이르기까지 ‘아가씨’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말이었다. 시집갈 나이의 여성을, 손아래 시누이, 그리고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를 때 썼다. ‘아가씨, 시청은 어디죠?’하고 물었고, 식당에서도 ‘아가씨, 물 좀 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가씨’는 금기어가 되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조선시대도 아닌데,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1970년대를 풍미한 호스티스영화의 무대였던 술집문화가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1974년 작 「별들의 고향」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술집아가씨나 창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자의 전성시대(창녀)」, 「O양의 아파트(술집아가씨)」, 「나는 77번아가씨(술집아가씨)」, 「365×26=0(술집아가씨)」 같은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졌고 ‘아가씨’는 꽃집이나 담배 가게가 아닌 ‘술집아가씨’로 인식되어, 더 이상은 여염집 여성을 ‘아가씨’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아가씨, 성대 어느 길로 가면 됩니까?”

“뭐요? 아가씨라고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한때 젊은 여성을 ‘미스’라고 호칭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자취를 감췄다. 전혀 아쉽지 않다. 하지만 ‘아가씨’는 아쉽다 못해 그립다.

“뾰족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바쁘게 걸어왔다. 예쁘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잔디밭에 앉아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날씬한 몸매의 아가씨가 이쪽으로 등을 돌린 채 한낮의 거리 쪽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홍성원, 육이오≫” - 표준국어대사전

게다가 아가씨는 미혼 여성에게 두루 쓸 수 있는 호칭어다. ‘학생’하고 불렀는데 ‘저 학생 아니에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가씨’라고 하면 학생이든 아니든 두루 통하지 않는가? 이렇게 아름답고 편한 우리말 ‘아가씨’가 죽어가는 걸 왜 방치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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