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보컬그룹의 창세기였다. 블루벨즈, 쟈니 브라더스, 봉봉사중창단, 멜로톤 쿼텟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봉봉사중창단이 부른 ‘꽃집 아가씨’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초등학교 아니면 중학교 때 자주 듣고 따라 불렀다.
장미보다 천배 만배 예쁘다니 뻥이 좀 샜던 것 같은데, 코맹맹이 소리로 ‘마음이 약한 나는 미쳐요’라고 하던 대목에 이르면 꽃집 아가씨가 얼마나 예뻤는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이 노래의 인기 때문이었을까? 꽃집 아가씨는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었고, 꽃집 앞에는 늘 더벅머리 총각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송창식 노래에는 꽃집이 아닌 담배 가게 아가씨가 등장했다. 특유의 흥얼거리는 창법으로 맛깔나게 묘사하던 ‘담배 가게 아가씨’는 짧은 머리를 곱게 빗은 새침데기였다.
병열이와 진원이에게 딱지를 놓은 담배 가게 아가씨가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하기 일보직전 백마 탄 기사로 변신한 주인공 창식이(?)가 아가씨를 구하는 모습은 영화 속 장면 같다. 이 노래의 인기 때문이었을까? 골목 어귀에 있던 조그만 담배 가게에는 언제나 등에 기타를 맨 장발의 청년들이 서성였고, ‘담배 한 갑 주세요.’ 하며 구멍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가게 안을 들여다봤다.
‘담배 가게 아가씨’보다 10년 전에 나온 박일준의 ‘아가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가씨였다.
미지의 아가씨라 더 신비로웠을까? 내가 가요프로그램의 디제이였다면 박일준 씨에게 반드시 물어봤을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아가씨는 어느 집 아가씨입니까?” 여하간 세 노래에 등장한 아가씨는 예쁘고 새침데기 미녀였으며 신비로운 존재였다. 반면에 아가씨 노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눈물로 임을 기다리는 애달픈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애조 띤 창법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렸던 ‘동백아가씨’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었다.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인기를 얻을 정도로 빅히트를 쳤지만,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1968년 2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방송에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가, 1987년 8월 김민기의 ‘아침이슬’, 송창식의 ‘고래사냥’,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등과 함께 무려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해금되었다.
그렇게 ‘동백아가씨’는 돌아왔지만, 아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1960년~1990년에 이르기까지 ‘아가씨’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말이었다. 시집갈 나이의 여성을, 손아래 시누이, 그리고 미혼의 양반집 딸을 높여 이르거나 부를 때 썼다. ‘아가씨, 시청은 어디죠?’하고 물었고, 식당에서도 ‘아가씨, 물 좀 주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가씨’는 금기어가 되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조선시대도 아닌데, 아가씨를 아가씨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1970년대를 풍미한 호스티스영화의 무대였던 술집문화가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1974년 작 「별들의 고향」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술집아가씨나 창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자의 전성시대(창녀)」, 「O양의 아파트(술집아가씨)」, 「나는 77번아가씨(술집아가씨)」, 「365×26=0(술집아가씨)」 같은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졌고 ‘아가씨’는 꽃집이나 담배 가게가 아닌 ‘술집아가씨’로 인식되어, 더 이상은 여염집 여성을 ‘아가씨’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아가씨, 성대 어느 길로 가면 됩니까?”
“뭐요? 아가씨라고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한때 젊은 여성을 ‘미스’라고 호칭하기도 했었지만, 신기하게도 자취를 감췄다. 전혀 아쉽지 않다. 하지만 ‘아가씨’는 아쉽다 못해 그립다.
게다가 아가씨는 미혼 여성에게 두루 쓸 수 있는 호칭어다. ‘학생’하고 불렀는데 ‘저 학생 아니에요’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가씨’라고 하면 학생이든 아니든 두루 통하지 않는가? 이렇게 아름답고 편한 우리말 ‘아가씨’가 죽어가는 걸 왜 방치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