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엔의 영웅 윤차랑, 평양의 에이스가 되다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8.05.07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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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OB 베어스 초대 감독은 한일은행 선수 시절인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3승 1무 패로 주최국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대회 기간 중인 9월 1일 도쿄 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연맹 총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한국 투수 김영덕 때문이었다.

프로 선수는 아마추어 대회에 출장하지 못한다는 게 당시 스포츠계의 상식이었다. 올림픽에서도 프로야구 선수의 출장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였다. 그런데 김영덕은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일본 퍼시픽리그의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유니폼을 입었던 전직 프로 선수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야구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프로 출신 선수 아시아대회 출전 여부를 놓고 1시간20분간 격론 끝에 은퇴 후 1년이 지나면 출전이 가능하도록 결정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영덕을 비롯한 재일동포 선수들은 1960년대부터 한국 야구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고교 야구 인기를 업고 성장한 성인 야구에서 선진 기량을 받아들인다는 취지였다. 국제대회 성적도 한 이유였다. 당시 한국야구가 노릴 수 있는 국제대회 최대 성취는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었다. 김영덕이 1967년 한국 대표팀 선수로 뛴 이유기도 하다.

김영덕을 비롯한 재일동포 선수들은 한국 야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야구에 슬라이더라는 구종을 처음 소개한 투수는 일본 실업야구 야시카카메라 출신인 재일동포 신용균이었다. 김영덕은 해운공사 소속으로 1964년 한국 실업야구에서 데뷔 시즌을 치렀다. 이해 33경기 255이닝을 던진 김영덕의 평균자책점은 0.32였다.

그리고 김영덕이 한국 땅을 밟은 이듬해 또 한 명의 일본 프로야구 출신 투수가 모국 땅을 밟는다. ‘모국’의 수도는 서울이 아닌 평양이었다. 이 투수의 이름은 윤차랑. 일본식으론 하야마 지로다.

2013년 일본에선 야구 서적 한 권이 발간된다. 스포츠라이터인 스즈키 마사키가 펴낸 <고시엔과 평양의 에이스>라는 제목이었다. 소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교 야구 경기를 자주 봤던 스즈키는 도호쿠 지역의 고교야구사를 취재하던 도중 하야마라는 이름의 투수를 발견했다.

고시엔과 평양의 에이스 표지.

하야마, 즉 윤차랑은 1941년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태어났다. 센다이는 지금도 재일동포 1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조총련계 조선학교도 운영되고 있다. 1957년 윤차랑은 도호쿠 고교에 입학해 야구부에 입부했다. 대단한 투수였다. 1학년 때 야구 명문 와세다실업고와의 경기에 등판해 이미 스타 대접을 받고 있던 2학년 오 사다하루(왕정치)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홈런도 하나를 맞았다. 2학년 때는 다시 와세다실고와 맞붙어 승리 투수가 됐다.

2학년 때부터는 에이스 활약하며 도호쿠고를 2년 연속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본선에 진출시켰다. 1959년 도호쿠고는 고시엔 대회 4강에 올랐다. 개교 이래 최고 성적이었다. 이후 도호쿠고가 여름 고시엔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 건 준우승을 차지한 2003년이 유일하다. 이 대회에서 도호쿠고의 에이스는 이란인 아버지를 둔 다르빗슈 유였다.

고교 졸업 뒤 윤차랑은 다이요 훼일스(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투수로 입단한다. 입단 계약금은 700만 엔으로 당시로선 거액이었다. 김영덕이 1956년 난카이에서 받은 계약금은 60만 엔이었다. 김영덕은 2006년 주간지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신인 가운데 B급은 되는 액수”라고 말했다. 195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장훈의 계약금은 200만엔이었다.

하지만 직업 야구 선수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1964년까지 4시즌을 뛰면서 24경기 2승 4패 평균자책점 2.58이 그가 남긴 프로 1군 기록의 전부다.

1965년 5월 23일, 윤차랑은 가족과 함께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으로 떠나는 북송선을 탔다. 북한은 1959년부터 재일동포들의 귀국 사업을 시작했다. 1984년까지 북한으로 영구귀국한 재일동포 수는 9만3000명으로 추산된다.

2013년 발간되 '고시엔과 평양이 에이스'를 소개한 일본 하북신보 기사

북한은 일제 시대 야구가 활발했던 지역이다. 야구는 ‘자본주의 스포츠’라는 이유로 북한에서 금지됐다는 추정이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학래 한양대 체육학과 명예교수가 2008년 펴낸 <한국현대체육사>에는1960~1970년대 북한의 전국 규모 체육대회에서 자주 야구 종목이 포함됐다. 박현식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의 형인 박현명씨는 북한에서 야구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야구에 익숙한 재일동포들은 북한 야구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시엔 스타 출신 윤차랑은 그 선두 주자였을 것이다. 윤차랑은 북한에 도착한 뒤 청진에서 철공소 노동자로 일하며 직장 야구단에서 활동했다. 1966년 12개 팀이 참가한 전국대회에서는 윤차랑이 소속된 청진시 대표가 1위를 차지했다. 함께 북한으로 간 윤차랑의 동생도 함께 선수로 뛰었다.

윤차랑은 1973년 평양 철도체육단 야구단에 동생과 함께 소속됐다. 이듬해인 1974년 아마추어 야구 세계 최강인 쿠바 국가대표팀이 북한을 방문한다. 평양, 사리원, 신의주, 남포 등지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 윤차랑은 북한 대표팀 투수로 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홈런도 하나 쳤다. 이 경기를 다룬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는 북한 야구에 대해 “중앙아메리카의 모든 팀과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위협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윤차랑은 1976년까지 평양에 머무른 뒤 1977년 다시 청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79년 7월 5일 38세 나이로 사고사한다. 그에게는 ‘사회주의건설열사’라는 칭호가 붙었다. 김일성대학 출신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근무 중 순직한 이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윤차랑에 대한 알려진 행적은 대략 여기까지다.

지난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남북 정상은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에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정상회담 직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하는 40개 종목 협회에 남북 단일팀에 관한 문의를 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이에 대해 “북한 야구의 현황에 대해 파악할 수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북한은 1993년 호주 퍼스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이후 한 번도 국제 무대에 선을 보인 적이 없다. 북한 야구에 대한 소식은 아주 드물게 나오는 관영매체의 보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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