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은 세종 혼자 만들었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07.0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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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와 비슷한 세대는 학창시절에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했다.’고 배웠다. 왕이 문자를 창제했다고 생각하기보다 학자들이 창제했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므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기보다는 집현전 학사들이 창제한 것으로 이해하기 쉬운 가르침이었다. 그러면 요즘 세대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어떻게 배우고 이해하고 있을까? 초등이나 중학교 교과서가 없으니,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찾은 훈민정음에 대한 설명을 한번 읽어보자.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만들었어. 한글의 처음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지.
『초등국어 개념사전』, 북이십일 아울북, 2010. 3. 25.

 

매우 놀랍게도 글쓴이가 40여 년 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과 한 치의 오차가 없는 똑같은 설명을 반복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사 개념사전』에 나오는 설명인데 더더욱 놀랍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는 출발부터 어려움이 많았어. 최만리 등의 학자들이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큰 나라를 모시는 예의에 어긋나며,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라며 격렬히 반대했거든. 그래도 세종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눈이 짓물러 한쪽 눈을 뜰 수 없을 때까지 연구했지. 그 결과 1443년에 드디어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어.
『한국사 개념사전』, 북이십일 아울북, 2010. 6. 4.

 

훈민정음 해례본

내 생각에 위 책은 어린이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설명은 전혀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가장 심각한 오류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이야기는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에 나오고,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듬해인 1444년 2월 20일자 기록인데,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조차 잘못 전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 그럼 이번에는 글을 쓸 때, 작가들이나 연구자들도 자주 인용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을 보자.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사실이 기록에 난 것은 ≪세종실록≫ 25년(음력 1443년)이다. 그 해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창제 관련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이 글에 따르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세종이다(親制: 친제). 그럼에도 옛날 교과서는 물론이고 요즘 나오는 여러 책들에까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을 공동 창제자인양 서술하는 것은 ‘설마, 왕이 문자를 만들었겠어?’라는 의구심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어학계를 비롯한 관련 학계의 결론은 ‘훈민정음은 세종이 혼자 창제했다’는 것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상.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이 28개의 문자를 고안한 것까지인가? 아니면 문자 운용 체계를 완결지은 것까지인가?”

이처럼 문자와 문자의 운용 체계를 분리해 인식하는 것은 세종의 단독 창제설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면이 있다. 문자는 세종이 고안했지만 문자의 운용 체계를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와 『동국정운』과 같은 운서는 집현전 학사들이 편찬했다고 한다면 세종이 한글의 창제자라는 사실을 건드리지 않고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책과함께. 2008.

 

이 글에서는 문자 창제와 운용을 분리해 판단함으로써 세종 친제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게끔 논의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문자를 만드는 일과 운용하는 체계를 세우는 일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세종의 단독 창제라는 주장에는 다소 회의적인 눈길을 보낸다.

 

“세종의 단독 창제설, 곧 친제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종이 우리말의 음운 체계, 문자의 운용법 등을 염두에 두고 28개의 문자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저자들의 신중함과 사려 깊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발명자가 자신의 발명품이 어떻게 쓰일지 혹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또는 아무런 지식 없이 무언가를 발명한다는 것은, 아니 ‘발명만 한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의 저자 박영규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공표할 때까지 문자 창제에 대한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는 점, 세종의 훈민정음을 반대한 최만리를 향해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되느냐?”면서 운학에 무지함을 지적하고,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고 한 기록 등을 근거로 세종을 당대 제일의 언어학자로 보았고, ‘훈민정음은 세종이 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했다.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공표할 때까지 훈민정음 창제를 시작했다거나, 새 문자 창제가 어느 정도 진척되고 있다는 내용 등이 실록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은 세종 혼자서 문자를 창제했다는 것을 뜻한다.

출처: zum 학습백과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근간으로 국가를 경영하던 때였기에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유교 경전에 대한 공부가 1순위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과거를 준비하던 사대부 자제들이 24시간 씨름하던 것은 바로 그런 책들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어학 공부에 시간을 투자할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왕자로 태어났기에 궐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를 볼 필요가 없었다. 호학의 군주 세종은 어릴 때부터 유명한 책벌레였는데, 그의 관심사는 유학에만 머물지 않았을 것이고, 자유롭게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내가 운서를 바로 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 잡을 것이냐?”라는 세종의 호언에서 우리는 자신감 넘치는 언어학자 세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훈민정음을 세종이 홀로 창제했다는 또 하나의 근거로서 집현전 학사들의 역할에 대한 기록을 참고할 수 있는데, 훈민정음과 관련해 학사들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인 1444년 2월에 시작된 ‘운회’ 번역 사업에 관한 기록이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양 대군(晉陽大君) 이유(李瑈)·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성품이 예단(睿斷)하므로 상(賞)을 거듭 내려 주고 공억(供億)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16일 1번째 기사

 

열정적인 훈민정음 연구자 김슬옹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네 번째 임금이에요. 오랜 연구 끝에 신하들 몰래 새 글자를 만들고, 1443년 12월에 가까운 신하들에게만 발표했어요. 그 당시에는 중국을 받들고 중국의 글자를 빌려 쓰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에요. 조선의 글자를 만드는 일에 신하들은 반대할 게 뻔했어요. 새 글자를 만든 뒤에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새 문자 창제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널리 새 문자를 알리기 위해서는 자세히 설명해 놓은 해설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 창제에 찬성하여 해설서 만드는 일을 도왔어요.
- 김슬옹 글, 이량덕 그림, 『한글을 지킨 사람들』, 미래엔 아이세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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