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월드컵 '역습 축구'가 지배했다

  • 기자명 김지석
  • 기사승인 2018.07.20 02: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전한 프랑스ㆍ크로아티아ㆍ벨기에 공통점은?

지난 한 달여간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2018 러시아 월드컵도 어느덧 프랑스의 우승과 함께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당초 1승의 대상으로 여겼던 스웨덴과 승점 쌓기의 대상으로 여겼던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연거푸 패하며 큰 아쉬움과 실망을 남겼으나 마지막 경기에서 세계랭킹 1위 독일에 2대 0으로 승리하며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최근 연이은 경기력 부진과 협회의 장기 플랜 부재, 행정력 문제 등이 노출됐다. 대표팀과 협회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월드컵에서 3패를 기록하였다면 한국축구에 대한 국민 관심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는 큰 위기 가운데 있었다. 월드컵 역사에 남을 만한 독일전 업셋으로 극적인 분위기 반전에는 성공한 모습이다. 그러나, 엄밀히 이번 러시아 월드컵 역시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대회’로 남게 되었다.

 

축구 전술의 새로운 트렌드가 펼쳐지는 곳이 월드컵이다. 기존에 득세하던 전술을 제압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적 흐름을 미리 인지하여 팀 고유의 특성에 맞게 잘 녹여내고 준비한 팀들은 이번 대회에서도 소기의 성과들을 거뒀다. 반면 그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팀들은 대체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독일,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 기존 강호들의 몰락과 프랑스, 크로아티아, 벨기에 등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팀들의 눈부신 성과가 이를 증명한다. 아쉽게도 우리 대표팀은 새로운 전술적 흐름을 팀에 녹여내지도 우리의 축구를 확실히 구사하지도 못한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었다. 여전히 선수들의 눈물겨운 투혼에 의해 최소한의 성과를 가져오는데 그쳤다.

Photo by Mitch Rosen on Unsplash

 

용두사미 경기력도, 빛나는 투혼도 문제는 체력

러시아 월드컵 전, 그리고 월드컵 기간 중 우리 대표팀의 경기 양상은 대체로 일관되다. 매 경기 전반전 초반 20여분은 경기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위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뭔가 될 것 같다”하는 강렬한 느낌과 기대를 갖게 하는 경기력을 보인다. 그러나 종료 휘슬이 울린 후 결과는 어김없는 패배. 선수들은 고개를 떨구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안타까운 모습이나 이젠 다소 지겨운 장면이기도 하다. 경기 시작 15분간 거세게 밀어붙였던 스웨덴전이 그랬다. 전반 23분경 장현수의 패널티킥 허용 전까지 큰 기대를 품게 했던 멕시코전도 그랬다. 물론 독일전은 90분간 또 한번의 기적적인 투혼을 발휘하였다. 대표팀의 이러한 양상은 비단 월드컵 본선만이 아닌 월드컵 출정식이 열린 보스니아전, 유럽 원정 폴란드전, 북아일랜드전 등 수차례 국내외 평가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축구팬에게는 매우 익숙한 흐름이 되었다.

 

이러한 ‘용두사미’ 경기력의 근본 원인은 ‘체력’이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의 전략과 전술은 무의미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 이어,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 대회 준비 과정에서의 선수 컨디션 조절 실패와 체력 문제, 그로 인한 경기력 저하는 이전 팩트 체킹과 여러 언론보도에서 자세히 언급된 바 있다.

 

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는 없겠으나,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성취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팩트이다. 동시에,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지치지 않는 체력이 뒷받침 된다면 결국 경기 후반 승부를 뒤집거나 결정지을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는 것 또한 중요한 팩트라 하겠다. 대표팀의 러시아 월드컵 스웨덴전이 전자의 예라면, 독일전이 후자의 예다.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 포르투갈 전, 1994 미국 월드컵 독일전 역시 후자의 좋은 예가 되겠다.

 

16강전, 8강전, 4강전까지 연이은 연장전 혈투를 펼치고도(연장 전후반 30분 x 3경기= 90분= 축구 한경기), 연장전 경기도 없었고 4강 일정상 휴식일도 하루 더 길었던 프랑스보다 더 왕성한 활동량을 보인 대회 준우승국 크로아티아의 결승전 경기력과 투혼은 우승국 프랑스보다 전세계인의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선수들이 가진 모든 것을 그라운드에서 쏟아 붓고 투혼을 불사를 수 있도록 그 체력적 밑바탕을 만들어 내는 코칭스탭의 선수 체력관리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결승에서 동점골을 터뜨린 크로아티아의 페리시치가 보여준 일명 ‘허벅지 세레머니’는 체력적으로 잘 준비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얼마나 큰 자신감과 담대함을 가지고 경기에 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용두사미의 경기력도, 빛나는 투혼도 결국은 체력에 의해 결정되어 나오는 것이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결승전 중 크로아티아 페리시치가 선보인 '허벅지 세레머니'

 

'점유율 축구' 몰락과 '역습 축구'의 부상

러시아 월드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전술적 특징 중 하나는 공격 주도권의 지속적인 소유를 통한 경기의 완전한 지배를 중요시하는 ‘점유율 축구’가 몰락하고,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단단한 수비와 속도에 주안점을 둔 효율적 공격 전개를 중요시하는 ‘역습 축구’가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즉,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더라도, 수세 상황에서는 확실히 움츠리고 에너지를 비축했다가, 역습과 같은 기회의 순간에 그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쏟아부어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실리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전술이 큰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체는 근수축(muscle contraction) 활동을 통해 운동을 하게 되는데, 뛰고, 던지고,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행위 뿐 아니라, 큰 범주에서는 지금 현재 호흡을 하고, 펜을 들고 글씨를 쓰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모든 행위가 근수축 활동에 의해 일어나는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인체가 이러한 근수축을 통한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는 근육조직 내에서 ATP(adenosine triphosphate)라고 하는 분자들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즉, 얼마나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ATP를 합성·분해하여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느냐는 에너지 대사능력이 곧 근수축력과 운동능력, 운동기능의 지속성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ATP 생성과정은 호흡을 통해 공급되는 산소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ATP를 만들어내는 유산소성 대사과정과 산소의 관여없이 ATP를 생성하는 무산소성 대사과정으로 나뉜다. 섭취되는 산소를 활용하며 비교적 낮은 강도로 장시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조깅과 같은 운동은 유산소성 운동에 해당되고, 산소 섭취의 관여없이 단시간에 격렬하게 수행되는 100m 달리기와 같은 운동은 무산소성 운동에 해당된다고 이해하면 쉽겠다. 축구 경기에서는 수비 라인 전체가 전술적인 이동을 하거나, 공격 후 복귀하는 상황 등과 같이 조깅 형태의 움직임들에서는 유산소성 에너지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순간적인 돌파, 전력 질주, 슈팅, 점프 헤딩, 태클 등과 같이 순간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움직임들에서는 무산소성 에너지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특히, 무산소성 대사과정에서는 근피로를 유발하는 물질이 부산물로 생성이 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무산소성 대사과정이 수비적 상황에서 보다는 대체로 공격 상황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철저하게 수비라인의 간격을 형성하고 팀 전체가 전술적인 움직임 속에 수비하고 있는 상황보다, 맹렬히 몰아붙이며 활발히 공격을 전개하는 상황에서 선수들의 근피로는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누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축구 선수의 이동거리 및 순간속도, 전략질주 등을 추적할 수 있는 GPS 장치로 분석한 데이터. 출처: goalnation.com

 

같은 거리라도 어떻게 뛰었느냐에 따라 피로도 달라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느 팀이, 어느 선수가 90분간 몇 km를 뛰었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되었다. 이는 미세한 칩 형태로 선수들의 유니폼에 장착된 GPS 장비를 이용하여 모든 선수들의 이동 거리를 수집·분석한 자료인데, 경기를 시청하는 축구팬에게 기존에 제공되지 않던 새로운 데이터로써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뛰는 거리만으로 선수들의 경기 체력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즉, 같은 거리를 뛰었다고 해도 대쉬(dash)형태의 순간적 고강도 움직임의 연속이었는가, 조깅(jogging)형태의 저강도 지속적 움직임이었는가에 따라 선수들의 실제 피로도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잘 움츠리고 있다가(=피로에 대한 저항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유산소성 대사과정 형태의 움직임을 펼치다가), 필요한 순간에만 폭발적인 역습(=단시간 고강도 운동에 효율적이지만 근피로 물질의 생성으로 인해 더 빨리 지치게 되는 무산소성 에너지 시스템이 동원되는 운동)을 펼치는 팀이 지속적으로 공격적인 움직임을 펼치며 무산소성 에너지 대사율이 높았던 팀보다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덜 지치고 덜 피로한 상태로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기 마지막 순간까지 ‘투혼’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선수들은 클럽에서 긴 시즌동안 리그 경기를 소화하며, 각종 컵대회와 같은 토너먼트에도 참가하는 등 연중 수많은 경기에 투입된다. 더군다나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소속팀에서도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어, 한 시즌동안 소화해야 하는 경기 수는 과거의 월드컵 참가 선수들에 비해 매우 높은 실정이다. 이는 월드컵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팀들이 시종일관 상대를 맹렬히 압박하고 공격할 수 있는 체력적 준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회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원이 다른 기술 수준으로 어느 팀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공격점유(과거 스페인의 ‘티키타카’ 축구, 혹은 독일의 무결점 축구)를 유지할 자신이 없는 대부분의 팀들은 이러한 체력적 상황 속에서 이제 더 이상 경기 전체를 완전히 점유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실리와 효율성을 추구하며 ‘선택과 집중’하는 방식으로의 경기운영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높은 볼 점유율로 경기의 주도권을 가지고 시종일관 공격하며 지쳐가는 상대팀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다가, 단 한번의 기회에 일격필살(一擊必殺)의 스피드와 속공으로 무너트리는 것, 잽을 날리며 계속해서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out boxer)를 카운터 어택 한 방으로 제압하는 인파이터(infighter)의 모습, 이것이 바로 역습축구 등장 배경의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점유율 축구의 몰락과 역습 축구의 부상에는 수많은 배경과 이유들이 존재하겠으나, ‘제한된 체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은 가장 중요한 변화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수년간 '점유율 축구' 못 벗어난 한국 국가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했던 지난 3년간 점유율 축구에 갇혀 현대 축구의 새로운 트렌드를 인식하지 못했던, 아니 오히려 역행하고 퇴보했던 우리 대표팀의 행보가 큰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순간이다. 신태용 감독 부임기간 약 1년간 역시 다소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강력한 수비 구축과 속도에 주안점을 둔 역습축구라는 전세계적 전술 트렌드를 우리 팀 고유의 특성에 제대로 녹여내고 부합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손흥민, 황희찬 등과 같이 역습에 큰 장점을 보일 수 있는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도 전광석화와 같은 역습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점, 수 없는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듭하고도 선결과제인 강력한 수비라인의 구축에 효과를 보이지 못한 점, 이상하리 만치 승리에 대한 집착을 보였던 것에 비해 허무하게 패배를 당한 스웨덴전의 전술부재, 대회를 앞두고 준비기간 실시한 체력 프로그램의 실패와 선수단 컨디션 관리 실패 등은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다음 월드컵에서는 또 다른 전술적 트렌드가 등장할 것이다. 아니, 역습축구가 그대로 이어질 지, 이를 제압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할 지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로운 우리 대표팀에는 이러한 전술적 트렌드의 세계적 흐름과 변화들을 매 순간 인지하고, 대한민국 대표팀 고유의 철학과 특성에 잘 부합하여, 세계 무대에서 우리의 것을 주도할 수 있는 실력있는 수장이 부임할 것을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