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을 지킨 간송의 '문화재 독립운동'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08.0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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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간송 전형필은 일제로부터 문화재를 어떻게 지켰나

2008년 7월 배아무개 씨가 훈민정음 상주본을 공개했다. 문화재청은 1조 원 가치가 있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배아무개 씨가 절도범으로 고소당하면서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다툼이 있었으며, 2015년에는 화재로 전체 20여 장 중 1장이 소실되었고 나머지 일부도 불에 탔다. 현재 문화재청은 배 씨로부터 상주본을 회수하기 위한 법적 절차를 밟고 있지만, 배 씨는 국가소유권을 부정하며 이에 맞서고 있다.

 

화재로 훼손된 훈민정음 상주본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본인 간송본에 버금가는 국보급 유물임이 분명한 훈민정음 상주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국민 모두가 환호했지만,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유권 분쟁과 화재로 인한 유물 훼손 소식에 국민들은 경악했다. 과연 상주본은 국민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은 1946년 조선어학회에서 영인본으로 출판함으로써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전체 내용이 공개되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 국보 제70호, 1997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2년 100대 한글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다. 『훈민정음』은 국보 1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많은데, 과연 ‘훈민정음 간송본’은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나왔을까? 『훈민정음』이 발견된 경위에 대한 두산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중략)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두산백과

 

그러나 간송 전형필의 전기를 쓴 이충렬 선생과 국어학계의 원로인 최기호 교수에 따르면 이한걸가 소장설은 사실이 아니다. 본디 책을 소장하고 있던 것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야리의 광산김씨 긍구당이었다. 사위 이용준이 가져다가 ‘光山后人 金致祥印 聖應家藏’이란 낙관이 찍힌 앞 두 장을 뜯어내고 다시 써 넣은 다음, 김태준을 통하여 간송 전형필에게 1만원에 판매했고, 전형필은 김태준에게 따로 사례금 1000원을 주었다고 한다.

 

훈민정음 간송본 (국보 제70호)

 

한 때 진성이씨와 광산김씨 양가 사이에 원소장처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고,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긍구당의 종손 김대중 씨는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본당에서는 책의 가치를 모르고 소장만 하고 있었는데, 똑똑한 고모부(이용준)가 가치를 알아본 덕에 벽지로 쓰였을지도 모를 『훈민정음』을 발견했다면서 전형필 선생이 책을 매입하여 일제로부터 귀한 문화재를 지키고 세상에 나오게 한 것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했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20대 초반에 논 800만 평에 이르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한 해 수확은 쌀 2만 가마니였고, 인건비와 유지비 등 비용을 제해도 1년 순수입이 15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기와집 1채가 1000원 정도였다고 하니 150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5억 짜리 아파트로 환산하면 750억 원이 된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 조선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있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극심한 도굴로 문화재뿐 아니라 유적이 파손되는 사건도 적지 않았으며 경성 미술 구락부라는 미술품 경매장 등을 통해 수준 높은 조선의 문화재가 권력과 재력을 앞세운 일본 수집가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제68호)

 

전형필은 귀중한 조선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25세 때부터 막대한 유산을 사용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29세 때인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였고,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고려청자하면 떠오르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을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서 2만 원에 구입했으며 당시 일본에 유출돼 있던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申潤福筆風俗圖畵帖: 국보 제135호) 역시 파격적인 고가에 다시 사왔다.

일본에 살다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변호사 존 개즈비(John Gadsby)에게서 청자기린형뚜껑향로(靑磁麒麟形蓋香爐: 국보 제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 국보 제66호), 청자오리모양연적(靑磁鴨形硯滴: 국보 제74호), 청자모자원숭이모양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국보 제270호), 백자박산형뚜껑향로[白磁博山形蓋香爐: 보물 제238호] 등을 살 때는 공주에 있던 2백석지기의 농장을 팔았다.

 

신윤복 단오풍정(국보 제135호)

 

워낙 많은 유산을 물려받은 덕에 쉽사리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한 문화재를 사들일 수 있었다거나 돈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지만, 헤아릴 수 없이 돈이 많아도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모르고, 가진 자의 의무나 상류층의 의무를 전혀 생각지 않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슬픈 현실 아닐까?

간송이 훈민정음을 매입하지 않았다면, 일제에 『훈민정음』이 넘어갔다면, 『훈민정음』은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제자원리를 비롯해 『훈민정음』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문자 ‘훈민정음’의 진실은 오늘까지도 의혹투성이의 미스터리로 남았을 것이다. 일제로부터 조선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유산을 아낌없이 쓰고, 『훈민정음』을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삶은 강도 일제와 싸운 또 하나의 문화재 독립운동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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