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城의 기원
압록강을 경계로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중국 단동시 동북쪽 약 15km 지점에 호산이 있다. 호산(虎山)은 생김새가 누워 있는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이 산에 명나라 때 축성했다는 호산장성이 있다.
단동시에서 자동차로 30분쯤을 달려 도착한 호산장성은 주자창 진입로에서부터 중국 냄새를 물씬 풍겼다. 매표소가 딸린 6개의 누각을 얹은 큰 문 뒤로 어렴풋이 바라다 보이는 산성의 윤곽도 베이징에 갔을 때 보았던 만리장성을 빼닮은 듯했다.
호산장성은 과연 어떤 성일까? ‘트레블 차이나 가이드’라는 웹사이트에서는 이 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설명에 따르면 호산장성은 명나라 때 만든 것이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네이버나 다음에서 ‘호산장성’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인조이 중국’의 저자는 호산장성이 본디 고구려의 박작성이었으나, 중국이 명나라식 성으로 복원하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선전하고 있지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하이관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고구려를 찾아서』에서도 박작성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성의 나라’라는 별칭을 지닌 고구려는 영역 내에 많은 성을 쌓아 국토를 다스리면서 외적을 방어했다. 고구려와 수당전쟁을 설명하는 교과서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요동성·백암성·안시성 등이 익숙하지만, 박작성 또한 그런 성들과 마찬가지로 전략적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를 잘 경계할 수 있는 산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박작성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가 압록강을 통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는 박작성에서 농성전을 펼쳤고, 장군 고문의 원군은 설만철 군대에 패했지만, 소부손은 끝까지 저항해 성을 지켰다. 이렇듯 절대로 내줄 수 없었던 박작성은 고구려의 성이었다. 고구려의 박작성이 있던 곳을 지금 중국은 호산장성이라 널리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 시기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베이징에서 만주(滿洲)로 가는 통로인 산하이관이었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고, 성벽은 이민족과의 경계, 즉 국경을 의미했다. 그런데 호산장성으로 인해 중국의 국경, 즉 영토가 확장된 것이다. 산하이관에서 호산장성은 약 1,000km가 되니, 호산장성으로 인해 명나라의 영토는 한층 넓어졌지만 고구려 성인 박작성의 흔적은 사라졌다.
호산은 높이가 146.3m다. 복원된 성벽의 길이는 1,200m 정도로 성벽을 따라 ‘만리장성1호돈대’까지 올랐다. 가파른 비탈은 아니지만 운동 부족으로 허약해진 두 다리에게는 험악한 시련이었고, 섭씨 33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한여름이었기에 땀도 많이 쏟았다.
힘겹게 오른 ‘만리장성1호돈대’에서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과 강 건너 신의주를 바라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호산장성을 걷는 동안 탐방객들이 박작성의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 선전하는 호산장성은 고구려의 박작성이었다. 영토는 변경될 수 있어도 역사는 바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