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영어 교사가 한국에서 일할 수 없는 이유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08.29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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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다바오에서 이 글을 쓴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여러 자료를 참조해야 하는데,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 수 없어서 고통 받고 있다. 얼마 전 단동, 집안, 연길, 장춘 등 중국의 동북지역을 답사할 때도 느꼈지만 인터넷은 대한민국이 최고다.

다바오는 현 필리핀 대통령인 두테르테의 출신지다. 필리핀을 이루고 있는 7,000개가 넘는 섬 중 마닐라가 있는 루존, 세부와 함께 큰 세 섬 중 하나인 민다나오섬에 있다. 현재 민다나오는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데, 우리는 계엄령에 대한 나쁜 기억만 갖고 있어서 말만 들어도 경기가 나지만, 여기 사람들은 계엄령 덕분에 더 편안하고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다고도 한다.

많은 섬에 다양한 부족이 공존하는 필리핀에는 무려 170개가 넘는 언어가 있는데, 타갈로그와 비사야뿐만 아니라, 군소 언어가 많고, 지방 방언도 강하다. 세력이 큰 언어는 타갈로그와 비사야를 비롯한 8개다. 북부 루존 지방은 타갈로그를 쓰고, 중부 비사야와 남부는 비사야를 쓴다. 지역 범위나 인구 규모에서 비사야가 크지만, 1937년에 행정상 수도 마닐라가 있는 북부 루존 지방의 언어 타갈로그가 공식 언어로 지정되었다.

필리핀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많은 나라 5번째에 올라 있다. 영어 사용자는 6000만명이 넘는다. 출처: 위키피디아

필리핀에는 또 하나의 공용어가 있다. 1901년 영어는 필리핀에 상륙했다. 미국의 식민지 시절 영어는 식민지배 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필리핀의 교육 언어로 채택되었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웠고, 필리핀의 국어와 역사를 제외한 과목은 모두 영어로 강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영어는 필리핀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자신들의 언어인 타갈로그로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문제 또한 심각했는지 영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미국의 식민지 시대 이후 전개된 오랜 영어 공용화 실험 끝에 이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영어를 구사하는 국민들이 일부 있다는 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영어 공용화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국민의 비율이 고작 전체의 7%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7년 전 보도지만 그 사이 수치가 크게 상승했을 가능성은 없다.

이런 상황은 필리핀을 여행하다보면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필리핀 택시기사들은 영어를 하지만, 아직까지 영어를 제대로 잘 구사하는 기사를 만나지 못했다. 버스처럼 창문이 없어 온갖 소음에 노출돼 있는 지프니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드물지만, 간혹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영어가 아닌 필리핀어다. 지프니 안에서 요금이 얼마냐고 영어로 묻는 승객이나 영어로 대답하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승객 중에 일부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겠지만, 학교나 직장 밖에서는 주로 자신들의 모어를 사용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어도 자연스러운 언어는 모어다. 물건을 사거나 식사를 한 후에 영어로 ‘Thank you so much’나 ‘Delicious’라고 해도 무리 없이 통하지만, 필리핀말로 ‘살라맛(고맙습니다)’이나 ‘마살랍(맛있습니다)’이라고 하면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모어가 지닌 힘이다. 그러니 외국 여행 갈 때 영어만 들고 가지 말고 방문국의 인사말 정도는 들고 가는 게 좋다.

이렇듯 모어는 정서적으로 강하지만 실질적으로 필리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영어다. 정치인, 기업가, 은행가, 의사, 고위직 공무원, 교수 등등은 영어에 능통하다. 바꿔 말하면 영어를 잘 해야 이런 분야로 나아갈 수 있다. 항공사나 호텔 같은 관광이나 의료 분야도 인기가 있는데 좋은 직장을 구하는 필리핀 청년들에게 영어 구사 능력은 필수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영어 공부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학생들도 많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어학연수를 많이 하는 어학원 교사들은 당연히 영어를 잘 구사한다. 물론 교사들 사이에도 실력 차가 있다. 모두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질이 훌륭한 교사들이 있다. 영문학이나 영어교육을 전공한 교사들은 원어민들과 소통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그래도 바깥에서는 필리핀 영어를 백안시하고 발음이 이상하다는 선입견도 없지 않다. 그래서일까? 한국은 영어 교사에 대한 수요가 많아도 필리핀인을 고용하지 않는다. 외국인 영어 교사 채용에 관한 제도(원어민영어보조교사ㆍEPIK)에 영어가 모어인 지역 출신들만을 고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자격 미달의 원어민 교사를 고용해서 발발한 사건·사고들도 적지 않다. 영어가 전공이 아닌 원어민 교사, 대학 졸업장도 없는 교사, 졸업장을 위조해 취업한 교사도 있었고, 이들이 일으키는 술 문제, 이성 문제, 폭력, 마약 등등 폐해가 심각하다. 이렇게 한심한 상황인데도 일부 영어학원은 미국이나 호주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교사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데도 피부색이 노라면 채용을 하지 않는단다.

반면에 일본은 한국과는 생각이 다른지 필리핀 영어교사를 고용한다. 물론 채용 과정에서 엄격한 심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학력, 전공 등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선택되어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일한다. 남자 교사가 없지 않지만 성비에서 여성이 월등히 높다. 이런 여성 교사들이 문제 있는 한국의 일부 영어 교사들처럼 술, 이성, 폭력, 마약 등등의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지만, 이미 영어를 잘 해서 실전 연습이 필요한 정도의 실력이 아니면 필리핀 교사들과 공부하는 것이 영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원어민에 비해 말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좀 더 잘 들리고, 모어가 아닌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구사하므로 비교적 규범에 충실하다. 필리핀 식의 발음이 걱정이라면 같이 공부하되 발음을 따라가지 않으면 된다. 요즘은 인터넷 공간에 널린 원어민들의 생생한 발음, 회화 등이 담긴 동영상이나 음성자료 등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1960년대 한국은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다. 독일에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고, 한국은 돈이 필요했다. 양국은 그렇게 서로 도우면서 우호를 증진해 왔다. 한국과 필리핀도 호혜적인 관계는 키워나가는 것이 좋다. 현재 필리핀 영어 교사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동에도 나가 있다. 이런 나라들이 왜, 어떤 이유로 필리핀 영어 교사를 고용하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리핀 교사를 고용함으로써 교육·경제·사회적으로 실보다 득이 크다면 원어민만 고집하는 배타적인 사고와 태도, 관련 법 등을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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