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 신이치 감독 "진짜 드라마는 가족의 일상에 있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9.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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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째를 맞은 DMZ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드리고싶은, 조금 상반된 분위기의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대체 어떻게 이 작품을 찾아내셨느냐’는 것과 ‘왜 이 감독을 이제야 이 감독을 부르셨느냐’는 것. 올해 아시아경쟁 부문에 초청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즐거운 나의 집>(2017)과, 그 연출자 이세 신이치(69) 감독의 이야기다.

 

일단 팩트체크부터 해야겠다. 인터넷무비 데이터베이스가 소개하는 이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고작 세 편 뿐이지만, 실제로 1995년 첫 장편 다큐멘터리 <나오짱> 이후 그가 발표한 작품은 20편에 달하며(TV 다큐멘터리나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 제외), 그중 다수가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주로 ‘만성질환이 없으며 일상생활행동에 지장이 없는 사람’, 즉 ‘건상자(健常者, able-bodied person)’라는 일본식 표현의 반대편에 서있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세 감독이 대표작인 '나오짱 시리즈'(1995년 작 <나오짱>, 2006년 작 <고마워>, <즐거운 우리 집>)를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지극히 ‘사적’이다. 간질을 앓는 지체장애인 조카 나오짱(니시무라 나오ㆍ45) 때문이었다. 의사는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음악가를 꿈꾸던 아름다운 누이와 가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매형 내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세 감독은 나오짱이 여덟 살 되던 해 설날부터 기록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어느새 커다란 ‘사회적’ 공헌을 하고 있다.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시작되는 날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만났다.

이세 신이치 감독. ⓒいせフィルム

홍상현:

역사적인 시기에, 역사적인 곳에서 치러지는 영화제에 오셨다.

이세 신이치: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DMZ국제다큐영화제는 이름에 ‘비무장지대(DMZ)’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 일견 홈 무비(home movie)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즐거운 나의 집> 보다는 사회성, 정치성이 강한 작품이 주로 초청될 것 같은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직접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유이기도 하고.

 

홍상현:

데뷔작 이래 소재부터 촬영에 이르기까지 보통 사람이 일생을 투자해 고작 몇 편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작품을 많이 제작하셨다.

이세 신이치:

보통 영화작가라는 사람들에게는 ‘다작’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만들고 싶은 것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개중에는 졸작도, 걸작도 있겠지만 만들어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고, 더욱이 창작을 게을리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생업’으로 영화를 만들어 먹고산다는 일이 그런 거 아닐까. 물론 자주제작 방식으로 창작활동을 이어가기가 쉽지는 않다. 내 스스로도 지금껏 영화 만들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니까.

 

홍상현:

부친도 다큐멘터리 편집자셨고 아들도 영상 작가를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단순하게 ‘다큐멘터리가 가업이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감독의 정확한 이력을 알고 보니 소년 시절에는 야구 선수를 동경하셨고, 세칭 ‘명문사립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목수가 되려고 제자생활을 하신 경험도 있었다.

이세 신이치:

젊은 시절 영화인이었던 아버지를 보며 ‘영화 일만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더랬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어느새 ‘천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이제는 아들도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일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삼대에 걸친 가업이 된 셈이다.

 

홍상현:

막상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데뷔는 45세 때 하셨다.

이세 신이치:

장편 데뷔작은 40대가 되어 완성한 <나오짱>이었지만 영상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건 20대 부터다. 20~30대 시절에는 외주제작을 주로 했는데, 그 안에서도 장인적인 방식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경험이 내 영화적 스타일의 기본을 구성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즐거운 나의 집> 한 장면. ⓒいせフィルム

홍상현:

작품의 주인공이 주로 ‘건상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이다.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암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처럼. 치매 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안다.

이세 신이치:

장편 데뷔작인 <나오짱> 이후 이른바 ‘사회적 약자’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을 많이 만들어 온 것은, 딱히 의식을 해서였다기보다, 피사체와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만남에서 기인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강함’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 다른 이들의 힘을 끌어내는, 진정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치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친구 부부가 주인공인 2014년 작 <아내의 병> 제작이 계기다. 다른 사회적 약자를 찍은 작품도 대부분 가족이나, 친구, 지인이 주인공인데, 하나의 주제를 정해두고 피사체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만남을 중시해서다.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격려하는.

 

홍상현:

<즐거운 나의 집>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의사가 오래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던 조카의 삶을 기록하려고 시작한 작업이라지만, 영상미나 주제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나 전체적인 완성도 등을 볼 때 작가의 겸양한 표현처럼 ‘홈비디오’ 레벨이 아니다. 또한, 감히 말씀드리면 3부작을 만드시는 동안 작가로써도 성장해 오신 느낌이다.

이세 신이치:

오래 살기 힘들 거라는 말을 듣던 조카, 나오와 그 가족의 모습을 기록으로 담아내는데 걸린 세월이 말씀대로 나 자신과 내 다큐멘터리를 성숙시켜주었음을 확신한다. 인간을 바라보고 일상을 기록하는 작업, 특별한 뭔가가 아니라 평범한 많은 일들 가운데 진정 카메라에 담아내야할 많은 것들이 있음을 배웠다.

다만, 그렇게 담아내는 인간의 모습에는 긍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피사체를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

 

홍상현:

<즐거운 나의 집>이 특별한 매력을 지니는 것은 작품의 높은 완성도와 별개로 주인공인 나오짱과 그 가족이 마치 TV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비범한 인물로 느껴지지 않아서다. 객석에 앉아있는 우리들처럼 갈등하고, 고민하다 결국에는 화해하는 프로세스. 이 모두를 담담하게 보여주면서도 결코 따분하지 않다.

이세 신이치:

‘가족’이란 가장 친밀하면서도 보편성이 있는 인간관계다. 어떤 가족이든 그 관계의 양상을 깊이 응시해 보는 것만으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메스미디어가 다루는 휴먼스토리란 특별한 존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니 사람들이 ‘특별한 것’에 시선을 빼앗겨 ‘평범한 것’, 그 자신과 현재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소홀해져버리는 거 아닐까?

진짜 드라마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족의 일상 속에 있다.

 

영화 <즐거운 나의 집> 한 장면. ⓒいせフィルム

홍상현:

영화 속 나오짱의 모습을 통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일 거라 무심코 단정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고. 오히려 모두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세 신이치:

우리가 흔히 도움이 필요할 거라 여기는 사회적 약자들이야말로 우리를 케어해주는 존재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로가 함께 키워가는 가족의 행복’은 지금껏 내가 만들어온 ‘나오짱 시리즈’의 캐치프레이즈이기도 하다. 나오짱을 키우면서 그녀와 더불어 자라나는 가족. 행복이란 그런 것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중국, 일본, 아니, 전 세계에 수많은 나오짱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야말로 우리의 행복이 자라나게 한다.

 

홍상현:

나오짱 시리즈 첫 촬영 이후 35년이 흘렀다. <즐거운 나의 집>이 감독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도 남다를 것이다.

이세 신이치:

그간 자주상영회 등을 통해 만난 많은 분들께서 ‘(나오짱 시리즈를) 부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달라’고 말씀해주셨다. 여덟 살 되던 해 설날, 영화에 처음 등장한 나오의 나이도 어느새 마흔 다섯. 그녀의 생명력에 새삼 놀란다. 앞으로도 촬영은 계속될 것이다. 그만둘 이유가 없으니까. 나와 나오 둘 중 하나가 쓰러지는 날까지.

지난 35년 세월은 ‘생명’ 그 자체를 긍정하며 되돌아보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에게 감사할 뿐이다.

 

홍상현:

내년 1월에 칠순이 되신다. 하지만 ‘은퇴 구상’이 아니라‘ 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해 말씀하실 것 같다.

이세 신이치:

나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 없지만,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70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건방진 어린 놈’ 소리를 듣던 내가 대체 어느새 ‘건방진 할아범’이 되어버리다니...(웃음) 그래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야지.

차기작은 내년에 완성될 예정이다. 내용은 비밀인데, 이 작품에도 20년이 걸렸다.

영화 <즐거운 나의 집> 한 장면. ⓒいせフィルム

<즐거운 나의 집>에서 이세 감독은 좀처럼 화자(narrator)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 다큐멘터리 연출자로써는 이례적으로 딱 한번 카메라의 프레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독립해 그룹 홈(group home)에서 지내던 나오짱이 자신의 방을 보여주다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다.

칠십 평생의 절반 이상에 걸쳐 지켜보았을, 그러니 어쩌면 일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

“괜찮아...?’

묵직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조카딸과 시선을 맞추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서, 일견 평온한 것 같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이의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묻어났다. ‘내가 딸아이보다 먼저 죽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노라 고백하던 누이를 촬영하면서도 분명 같은 표정을 지었으리라.

요란한 미사여구는 없지만, 행간에 메우는 진심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과도 맞닿아있는 인터뷰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이세 감독이 말했다.

“저는 끈기가 있다기보다, 그저 일이 느릴 뿐이에요.”

이 즈음에서 지극히 감상적이면서도 사적인 한마디를 적어야겠다. 이세 아저씨와 나오짱,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이 최대한 오래, 지금 같은 모습으로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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