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없는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10.0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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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 큼직한 돌판에 쓰인 구호(?)를 본 적이 있다.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던 나철 선생의 말을 조금 바꾼 것인지 다른 의병장이 내지른 한맺힌 절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구호 앞에서 꽤 오랫 동안 서 있었다. 의병. 의(義)를 위해 떨쳐 일어선 병사들. 아니 병사가 아니었으나 병사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희미한 얼굴들이 눈 앞에 둥둥 떠왔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종영됐다. 그 마지막회에 연출된 의병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척 낯익은 모습이었다. 체포된 후 맥이 풀린 모습도 아니고, 무표정하게 카메라 앞에 선 딱딱한 포즈도 아닌, ‘앞에 총’을 하고 그 리더인 듯한 대한제국 군복 차림의 남자는 칼을 어깨에 댄 기병도 차려 자세를 취한,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무이한 의병 사진.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그 모습과 외국인 기자와의 대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1907년 초가을 영국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맥켄지 (F.A. McKenzie)는 일본 통치에 저항하고 있다는 무장 집단 의병을 취재하기 위해 충청북도 제천, 강원도 원주 일대를 배회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만행에 초토화된 마을을 보며 분노하던 맥켄지 앞에 의병들이 나타난 것은 어느날 저녁이었다. 이미 해산돼 버린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지휘관격의 훤칠한 젊은이는 맥켄지의 질문에 선선히 대답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괜찮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프레드릭 아서 맥킨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싸움은 슬픈 싸움이다 그러나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는 이에게 기다리는 것은 노예의 삶일 뿐이고, 제국주의 시대를 살던 맥켄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 이래 수없이 되풀이된 역사였다. 청나라의 의화단은 북경의 외국인 구역을 55일간 포위했지만 제국주의 군대의 무력 앞에 추풍낙엽이 됐다. 동학 농민군 10만 명이 몰려들었으나 신형 기관총 앞에서 우금치를 넘어설 수 없었다. 1898년 영국군은 수단의 5만 대군을 기관총으로 쓸어 버렸다. 영국군의 희생자는 47명이었다. 한국의 의병들도 러시아까지 꺾은 신흥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우세한 무기 앞에서는 패배할 수 밖에 없음을, 비참하게 죽어갈 수 밖에 없음을 맥켄지는 뻔히 알고 있었다. 문득 숙연해졌을 맥켄지에게 군복 입은 의병은 너무나 절절하게 부탁한다.

“우리 의병들은 용감하지만 무기가 없습니다. 총은 낡아서 쓸 수가 없고 화약도 떨어졌소. 외국인인 당신은 일본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아무 곳이나 갈 수 있을 테니 우리에게 무기를 사 주십시오. 사례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맥켄지는 기자 신분으로서 이 청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낡아서 쓸 수조차 없고 화약도 떨어진 처지로 ‘앞에 총’을 하고서 결의에 찬 눈빛을 뿜어내는 이름 모를 의병들의 모습을 영원히 역사에 남긴다. 그리고 그의 책에서 맥켄지는 이렇게 기억을 재생한다.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은 아마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보여주는 표현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맥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920

 

Company of Korean rebels 1907 by F.A. McKenzie from Tragedy of Korea ⓒwikimedia

 

맥켄지의 사진 속에 남은 이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맥켄지는 충북 제천의 몇몇 마을이 일본군의 만행에 쑥대밭이 된 것을 보았거니와 대한제국을 통으로 집어삼키기 위해서 일본군들은 그 몸뚱이 곳곳에서 돋아난 의병이라는 가시를 철저하게 발라 내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1909년 일본군이 호남 일대의 의병들을 전멸시킨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들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사방을 그물 치듯 해 놓고 마을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나그네들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됐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힘 있는 이들은 싸우다가 죽었고 힘없는 이들은 도망가다가 칼을 맞았다.” (매천 황현의 기록)

이 참극이 마무리된 후,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내용이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공표된다. 불과 5년 전 을사늑약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로 항거하고 시위에 나서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으며 울분을 터뜨렸으나 경술국치 이후는 싸늘할 만큼 조용했다. 합병 조약 공표를 1주일 미루면서까지 조선인들의 저항의 기미를 살피던 일본이 머쓱해 했다 할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줄기차게 싸웠으나 희생만 늘어날 뿐이었고, 외교권도 군대도 경찰도 사법권도 이미 다 빼앗겼으니 새삼스레 일본의 일부가 된다고 한들 큰 차이가 있겠느냐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항일의지를 다지며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도 있었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더하여 경술국치 이후에도 ‘노예의 삶’을 거부한 채 끝까지 싸운 소수의 의병들도 있었다. 나라는 망했어도 의병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최소한 1915년 11월 4일까지는.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장군이 사형당한 그날까지는.

채응언은 평안도 성천 출신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대한제국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여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한 자”였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지주나 부자들의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소작농들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거나 때로는 패대기도 질 줄 알았던 사내 중의 사내였다는 얘기가 되겠다.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 쪽으로 이사해서 화전을 일궈 살기도 했으나 ‘남보다 건강한 기운’이 출중한 채응언은 농민으로 지낼 팔자가 아니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다. 그래봐야 친위대 진위대 다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이었지만 일본은 한 치의 껄끄러움을 원치 않았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은 서글펐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일본군과 대한제국군 사이의 남대문 전투. ⓒwikimedia

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라 역적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절규하던 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한국군 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무기를 꺼내 일본군에게 저항한다. 1907년 8월 2일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은 대한제국을 배알 하나 없는 무골충 쯤으로 치부하던 일본과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이 반란은 지방의 진위대로 번졌고 현역 군인이 가세한 의병들은 한층 더 우수한 전투력으로 일본과 맞서게 된다. 힘 세고 용감한 농민 채응언도 그 일원이었다.

“을사5적과 정미7적같은 역신들의 살점을 2천만 동포가 씹어먹으리라.”고 격문에서 분노를 터뜨리던 채응언은 다른 의병집단이 일본군에 격파되거나 만주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끝내 나라가 없어지고 일본의 일부가 된 뒤로도 5년 동안, 장장 8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다. 황해도 수안의 헌병 주재소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함경남도 안변의 주재소가 털렸고 황해도 동쪽을 두들긴 의병대가 강원도 북쪽에 불쑥 나타나 일본 당국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출몰이 지극히 교묘하여 수비대 및 헌병의 엄밀한 수색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 일본군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을 정도로.

수십 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군 역시 독이 올랐다. 또 “일진회원을 보지 않고 죽이지 않는 자는 참한다.”는 것이 채응언 의병대의 군령이었으니만큼 친일파들에게 채응언 의병대장은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고 어떻게든 없애야 할 공포였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80원을 내걸고 채응언을 잡으려 들었다.

결국 채응언은 군자금을 얻으러 가다가 현상금에 탐난 동포의 밀고로 체포된다. 하필이면 그의 고향 평안도 성천에서였다. 체포되는 와중에 격투가 벌어져 채응언과 파출소장 다나까 모두 부상을 입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사진 속에는 붕대를 칭칭 감은 다나까가 마치 맹수를 포획한 듯 쇠사슬로 묶어 놓은 채응언과 나란히 선 모습이 담겨 있다. ‘(황해도 곡산에 위치한) 백년산 호랑이’라 불리던 채응언은 일제의 포로가 됐으나 사진으로만 보아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풀 죽은 기색이 없다. 오히려 얼어 있는 건 다나까 쪽이다.

평안도 성천 파출소장 다나까(왼쪽)와 붙잡힌 의병장 채응언

채응언은 재판 과정에서 줄곧 태연했다. 당연하다 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그는 상고에 나선다.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살인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의병이고 차라리 ‘의적’이라면 모르겠으되 살인 강도의 혐의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연히 선언을 했다고나 할까.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장군은 끝까지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죽어갔다. 그러나 일본군과 친일 부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오늘날 “독립군은 만주에서 궤멸됐으니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은 만주에 없었고 박정희나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그냥 비적 따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일부 한국인들 보기에도 채응언은 ‘의병’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울 것이다. 정규군의 풍채도 갖추지 못했고 무기 또한 빼앗은 것으로 싸웠으며 전투라고 해 봐야 헌병 기십 명 죽인 것이 다였는데 그걸 무슨 의병이라 부르며 그걸 어찌 전쟁이라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응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몰랐을까. 이미 나라가 넘어간 마당에 헌병 나부랑이 몇 명 죽이고 친일파 몇 명 처단한다고 대세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바보가 아니라면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응언은 그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의 칼바람을 몸으로 막아내며, 일본군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가며 악착같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보였다. 맥켄지의 카메라 앞에 서서 “어차피 우리는 이기지 못할 것이고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 무기를 사 줄 수 있느냐. 돈은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손모아 호소하던 의병장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들이치는 바보였다. 하지만 그 바보들은 역사에 몸을 기대고 싶었을 겁니다. 언젠가는 일본놈들이 물러가고 내 나라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 한 조각 핏빛 소원을 기억해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슬플 뿐 여한이 없노라.”(채응언),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겠다.”(이름 모를 의병장)고 당당하게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온 의병 사진. 맥켄지 기자가 찍은 1907년 사진을 재현했다.

우리는 그 바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잘나서 독립이 됐냐. 일본이 미국에 져서 독립이 온 거지.”라고 똑똑한 척 얘기하는 것만큼 거대한 어리석음은 없다. 일본이 미국에 지고 소련에 무릎 꿇고 영국에 두 손을 든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하고, 그를 위헤 싸웠음을 입증하지 못했다면,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미국의 루즈벨트인들, 영국의 처칠인들, 중국의 장개석인들 한국을 선의로 도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적절한 절차를 밟아 한국을 독립시킨다.’(카이로 선언)는 언급을 굳이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채응언을 비롯하여 수없이 나섰던 독립운동가들. 대개는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바보들이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그들을 영상 속에 복권시켰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잊었던 그들을 복원해 냈다. 기쁜 일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들의 이름을 기리는 일에 어찌 지나침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있다. 의병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나 그 이름은 우리가 결코 본받지는 말아야 할 상황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한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는데 그 나라의 정규군은 어떠한 방어전도 치르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남대문 전투 외에는 정규군 대 정규군으로 맞붙은 전투는 거의 없다. 경술국치 즈음 미국의 대통령이던 루즈벨트가 말했던 바 한국은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못 휘두른” 얼간이 같은 나라였다. 의병이란 그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고 썩어 문드러진 시궁창 위에 피어난 민들레꽃이었다

국민의 세금을 받아 운용되는 국가는 평소에 자신을 지킬 무력을 갖추고 전쟁이 나면 외침을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 평생 칼 한번 안 잡아본 시골 선비가, 귀한 가문 ‘애기씨’가 “어찌 나라의 위기를 두고 볼 것인가” 피를 토하고, 여기에 감동한 백정과 농민들이 낫과 도끼, 화승총을 들고 일어서기전에 국가가 응전에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의병이란 그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고 썩어 문드러진 시궁창 휘에 피어난 민들레꽃이었다. 우리는 민들레꽃의 향기에 취하는 한편으로 시궁창이 왜 생겨났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시궁창을 다시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의병이 필요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1895년 을미년 의병부터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바람도 그러하지 않을까.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은 멋있으나 안타깝다. “의병이 없어도 굳선한 나라”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나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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