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쓰나미 상처 치유하는 '문학적 판타지'의 탄생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10.08 10: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필자가 2년만에 후카다 코지라는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지난 7월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오가타 다카오미 감독의 작품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에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은 주연배우, 마쓰바야시 우라라의 트윗 때문이었다.

그녀는 벅찬 심경을 밝히며 두 사람의 역대 수상자를 거론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전폭적 지원으로 탄생한 <소년 부산을 만나다>로 데뷔, <백 엔의 사랑>으로 제1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넷팩상 수상의 영애를 안은 타케 마사하루와, 그보다 4년 앞서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블랙코미디 <환대>(2010)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같은 상을 받으며 ‘국제 경쟁 영화제 수상 레이스’의 첫 테이프를 끊은 후카다 코지가 그들이다.

후카다 감독이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호토리 노 사쿠코>(2013)로 낭트 3대륙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청소년 관객상, 프리부르영화제 탤런트 테이프 어워드(Talent Tape Award)를, <하모니움(Harmonium)>(2016)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거머쥐었다. 그밖에 올해 6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학과 예술 슈발리에 훈장(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을 수여받았다. 일본의 영화인으로써는 기타노 다케시 이후 19년만이다.

그런 그가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판타지” <바다를 달리다>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이 영화는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화제였다. 감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홍콩에서 모델로 데뷔, 타이완에서 연기자로 활동했고, 인도네시아에서 뮤지션으로 활약하다 그곳에 가정을 꾸린 딘 후지오카가 캐스팅되어서다. 한국 팬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그는 사실 12년 전 홍콩 여성감독 얀얀 막(2001년 <형>으로 제3회 전주국제영화제 우석상 수상)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초청작 <8월 이야기>(2006)의 배우로 한국의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후지오카가 ‘바다’를 뜻하는 인도네시아어 이름(라우ㆍLaut)의 ‘불가사의한 존재’로 등장하는 판타지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들이 주는 상을 받은 지 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카다 감독을 만났다.

 

홍상현:

프랑스 예술문화기사훈장을 수여받은 해 <바다를 달리다>로 다시 한국에 오셨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후카다 코지:

부산국제영화제는 몇 번 작품이 초청ㆍ상영된 적 있지만, 매번 타이밍이 안 맞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 그러다 이렇게 처음 부산 땅을 밟으니 정말 기쁘다.

 

홍상현: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에 편집, 제작까지 맡은 <환대>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이래, 낭트 3대륙영화제, 칸 영화제 등을 아우르는 ‘수상 레이스’가 이어졌다.

후카다 코지:

감사하고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늘 제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홍상현:

<바다를 달리다>에 등장하는 청년들의 묘사에서 영화제를 개최해 동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상영하는 등 가슴 뜨거운 '청년예술가'로 살았던 극단 청년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후카다 코지:

나는 현재도 극단 청년단 소속이며, 그곳의 배우들, 연출가들, 그리고 대표이신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 선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 2011년 주최한 영화제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나 토미타 카츠야 감독, 마리코 테츠야 감독 등의 작품을 상영했다. 그들과 지금도 친교가 있는데, 동세대로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활약상이 늘 강한 자극과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바다를 달리다> 후카다 코지 감독. ⓒNIKKATSU CORPORATION

홍상현:

대표작 중 하나로 세계에 존재감을 알린 <하모니움>은 프랑스, 이번 <바다를 달리다>는 프랑스, 인도네시아와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인류의 보편적 감성에 호소하는 작풍(作風)이 인정받고 있는 거겠지? 

후카다 코지:

필름메이커는 자신이 만들고 싶어 하는 모티브가 보편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데, 해외에서라도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어 조금 안도감이 든다.

 

홍상현:

본격적으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게 있다. 캐스팅과 장르만 보고 <바다를 달리다>가 그저 막연하게 “탐미주의에 대중성을 가미한 작품”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졌다. 그런데 공간적 배경부터가 열강의 침략과 내전, 그리고 지진해일의 상흔이 남아있는 반다아체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를 알고 싶다.

후카다 코지:

2011년 교토대학교와 시아쿠아라대학교가 공동개최한 지진해일과 빙재에 관한 심포지엄의 기록을 맡아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처음 반다아체를 찾았다. 거기서 2004년 수마트라 지진으로 인한 지진해일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이미 지진해일 영상을 국제뉴스로 보았음에도 도호쿠에서 지진해일이 일어났을 때와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국경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진해일을 대하는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방식, 사생관의 차이도 흥미로웠다.

결국 귀국할 무렵에는 언젠가 관련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다만, 나는 해외 어디를 가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가해국인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본인들에게는 인도네시아가 일본에 우호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던 역사가 있다. 일본인으로써 인도네시아를 마주하면서 줄곧 이 관점을 유지했다.

 

홍상현:

<바다를 달리다>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당신과 1980년생 동갑내기로 모델, 연기자, 뮤지션, 심지어 영화감독으로까지 활동하고 있는 딘 후지오카가 ‘불가사의한 존재’를 연기한 것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은 그의 반응은 어땠나?

후카다 코지:

그는 대단히 클레버(clever)한 인물인지라 시나리오를 읽고 처음 만날 때쯤에는 이미 작품의 의도를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는 그에게 있어 가정의 터전이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까닭에 이야기의 배경이 그곳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촬영한 그의 첫 영화가 <바다를 달리다>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바다를 달리다> 주연 딘 후지오카 ⓒNIKKATSU CORPORATION

홍상현: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태평양전쟁의 직접국인 일본이 현지에서 어떻게 회자되고 있는지까지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지점이었다.

후카다 코지:

일본에서 제작된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역사영화가 ‘일본인이 어떻게 그 독립에 공헌했는지’ 운운하는 애국주의적 내용인 것을 보고, 절대로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우리는 가해자’라는 전제를 절대 잊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 거다.

 

홍상현:

<바다를 달리다>에서는 “I love you”라는 영어 표현을 “달이 곱군요”라고 해석했다는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통설이 시퀀스에 사용되는 등, 문학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시종일관 드러난다.

후카다 코지:

나는 원래 문학청년이었다. 물론 일본의 문학 작품도 좋아하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쓴 『불가사의한 소년』(원제는 <The Mysterious Stranger>로 이 제목을 쓴 것은 영문학자이자 평론가, 나카노 요시오다)이라는 작품을 의식하며 각본을 썼다. 돈이 드는 까닭에 어느 정도의 통속성이 요구받을 수밖에 없는 영화계에 있다 보니 역시 문학작품의 자유로움을 동경하게 되는 면이 있다.

 

홍상현:

같은 맥락에서 이 작품은 시각적 속임수에 의존한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적 판타지’를 구현한다.

후카다 코지:

나는 어떤 작품이든 끝난 후에 관객들이 가능한 한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로 제작에 임한다. 그것이 영화를 어떤 프로파간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바다를 달리다>는 특히 지진재해와 전쟁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이야기인 까닭에, 설령 영화적 카타르시스와 재미가 희생된다 할지라도 상상력을 속박하지 않고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게 신경을 썼다.

 

<바다를 달리다> 한 장면. ⓒTokyo Theatres company Inc.

 

홍상현:

생물학적 연령 따위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은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가 대단히 기대된다. 이 작품이 당신의 영화인생에서 갖는 의미와 앞으로의 구상을 듣고 싶다.

후카다 코지:

<바다를 달리다>는 내 첫 해외로케 작품이었는데, 그 즐거움, 풍요로움과 더불어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기회였다. 앞으로도 수많은 미지(未知)의 사람들과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또한 요즘 일본에서 내년에 공개할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데, 이 작품으로 다시 한국의 여러분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홍상현:

<바다를 달리다>의 공동제작을 담당했음은 물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나라이기도 한 인도네시아에서 최근 커다란 자연재해가 있었다.

후카다 코지:

그렇다. 이번 재해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프다.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도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일본도 올해 지진과 호우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재해는 나라와 사람을 가리지 않기에 누구라도 미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상상력’을 가지고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진해일이 할퀴고 지나간 반다아체의 분들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딛고 일어서 보다 밝고 강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신다. 술라웨시의 분들께도 부디 그런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바다를 달리다> 한 장면. ⓒTOKYO THEATRES COMPANY Inc.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유의미하게 재구성해 보일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을 언급하며 재해를 당한 이웃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건네는 선량함. 필자는 문득 영화라는 매체의 한계가 미처 잡아내지 못한 디테일까지 모두 담아내는 대표작(<바다를 달리다>와 <하모니움>)의 동명소설 두 권에 기가 질려 인터뷰를 주저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어버렸다. 물론 눈앞을 막아서는 숲으로 된 성벽을 헤치고 들어가 휘황한 장미정원과 맞닥뜨리듯, 그 어떤 인문학자의 강연보다 만족스러운 지적 포만감을 느끼게 해준 대화였다.

특유의 유머와 낙천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문면에서 애드가 앨런 포의 소설을 멍청한 역자가 실수로 바꿔 쓴 것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드는 마크 트웨인의 『불가사의한 소년』을 언급했다고, 뒤늦게 <바다를 달리다>의 라우를 사탄을 자칭하는 주인공에 끼워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단지 필자의 머릿속에 남겨진 말은 오직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상상력”이었다.

“극중에서 모든 이들의 상처를 아우르는 라우는 ‘영화’라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아름다운 세계의 비전을 제시하는 후카다 코지의 페르소나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후카다 감독이 내놓은 대답을 곱씹어보면 더더욱 그랬다.

“각본을 쓰다 보면 어떤 캐릭터에 나 자신을 조금씩 끼워 넣게 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라우가 스피노자의 신(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저 자신을 투영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자연에 대한 내 생각을 상징하는 존재가 라우라고 본다면, 그 언저리 어디쯤 저와 이어져있는 부분이 존재할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진지하면서도 예리한 말들 속에 숨겨보려 하지만 끝끝내 아름답고 평화로운 에메랄드 색을 드러내는 바다, 혹은 라우가 필자의 눈앞에 있었다. 새삼 오랜만에, 모두에게 권해줄만한 영화 한 편이 생겼다고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2018년 10월 8일 정오 수정: 제목에 '역사'가 들어가면 시대극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필자 요청에 '역사' 단어를 뺐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