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아시안게임에서 펼쳐진 명칭 대전

  • 기자명 선정수 기자
  • 기사승인 2023.10.0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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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 북한, 파오차이, 신치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선수들에겐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꿈의 무대입니다. 빅 이벤트를 기다렸던 스포츠 팬들에겐 눈이 즐거운 나날이죠. 경기장 안에서 펼쳐진 열전만큼 뜨거운 '명칭 대전'도 벌어졌습니다.  뉴스톱이 팩트체크했습니다.

출처: 연합뉴스 홈페이지
출처: 연합뉴스 홈페이지

◈2023년에 부각된 ‘괴뢰’ 논란

‘괴뢰’라는 일상생활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지난 2일 항저우아시안게임 남북 여자축구 경기 결과를 보도하면서 대한민국을 ‘괴뢰’로 지칭한 겁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조선중앙TV는 지난달 30일 열린 남북한 여자 축구 경기 결과를 지난 2일 뒤늦게 소개하면서 “경기는 우리나라(북한) 팀이 괴뢰팀을 4:1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타승한 가운데 끝났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북한팀 득점 장면 위주로 편집한 영상 하단의 스코어 자막에서도 '조선 대 괴뢰'라는 국가명을 사용했구요.

‘괴뢰(傀儡)’, ‘허수아비 괴’와 ‘꼭두각시 뢰’라는 한자를 이용한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를 뜻합니다. 비유적으로는 남이 부추기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입니다.

이게 북한 사전에는 "제국주의를 비롯한 외래 침략자들에게 예속돼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국과 인민을 팔아먹는 민족 반역자 또는 그런 자들의 정치적 집단" 이라고 풀이돼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눈에는 대한민국이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예속된’ 것으로 비치나 봅니다.

해외 각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괴뢰 정부’ 또는 ‘괴뢰 정권’(puppet state)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일제가 세운 만주국, 나치 독일이 세운 프랑스 비시 정부 등이 그 사례입니다.

출처: 전쟁기념관
출처: 전쟁기념관

한반도에선 남북이 분단된 이후 양측이 서로 상대방을 ‘괴뢰’라고 표현했습니다. 남측은 북측을 ‘북괴’, ‘북한 공산집단’, ‘북한 괴뢰정권’이라고 불렀고, 북측은 남측을 ‘남조선 괴뢰’라고 불러왔습니다. 서로 상대방을 독립된 국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연장선에서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양측의 정식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죠.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아직도 법에 등장하는 ‘괴뢰’

2000년대 이후 남측에선 ‘북괴’라는 말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미 체제 경쟁이 무의미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커져버린 것이죠. 여기에 몇 차례의 남북 해빙무드에 힘입어 북괴, 북괴군이라는 말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관련 법령에서도 괴뢰라는 말은 사라졌습니다.

국가유공자법, 출입국관리법 시행규칙 등 수많은 법령에 들어있던 북괴, 북한괴뢰집단 등의 표현은 ‘북한’ 등으로 대체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엔 북한을 ‘괴뢰’로 지칭하는 법이 있습니다.

<몰수금품 등 처리에 관한 임시특례법>(몰수품처리법)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범죄자로부터 몰수한 물품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처리하도록 만든 법입니다. 이 법은 몰수금품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데 <1. 북한괴뢰집단 및 그 구성원, 2. 북한괴뢰집단에 동조하는 반국가단체 및 그 구성원 3. 제1호 및 제2호에 규정된 자로부터 지령을 받아 활동을 하는 자, 4. 북한괴뢰집단에 동조하여 반국가적인 활동을 하는 자>로부터 몰수된 물건이나 금품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 승인을 얻어 국정원장이 사용하거나 처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연계돼 있는 법이어서 ‘북한괴뢰집단’이라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국회의 무관심 속에 유일하게 ‘괴뢰’라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2018년 문재인정부 시절 한자로 된 법문을 한글로 바꾸는 개정이 마지막이었습니다.

◈北, "정식명칭으로 불러라"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남북간 국명 논란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지난달 29일 여자 농구 남북 대결에서 북한이 패배한 뒤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이 북한 대표팀 정성심 감독에게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북한'을 언급하자, 선수단 관계자가 질문을 끊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언성을 높이며 "우리는 노스 코리아(North Korea)가 아니다.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며 "그건 옳지 않다. 아시안게임에서는 모든 국가명을 정확하게 불러야 한다"고 반발했습니다.

지난달 30일에는 북한 여자축구대표팀 리유일 감독이 한국 취재진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다시국명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리 감독은 “미안하지만 북측이 아니고 조선인민주의공화국 또는 조선이라 불러달라. 그렇지 않으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취재진이 ‘북측’이라고 부른데 대해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죠.

북측의 정식 국가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자기들끼리는 ‘조선’이라고 줄여 쓰는 모양입니다. 남측의 정식 국가명칭은 대한민국입니다. 줄여서는 한국이라고 쓰죠. 각자의 입장에서 남측은 북측을 북한으로 줄여쓰고, 북측은 남측을 남조선으로 줄여씁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뭐라 불러도 상관없지만, 대립이 격해지면 호칭 문제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것이죠.

출처: 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출처: 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항저우 김치는 파오차이?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4일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메인미디어센터(MMC)와 미디어 빌리지의 식당에서 김치를 '泡菜'(파오차이)로 표기한 것을 확인해 조직위원회 측에 항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서 교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추석 연휴 기간 내내 많은 누리꾼에게 같은 내용의 제보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파오차이는 중국 쓰촨(四川)성 지역의 채소 절임 음식을 뜻하는데, 중국은 이를 근거로 자기들이 김치의 원조라고 주장합니다.

서 교수는 "MMC에서는 중국어로 '韩国泡菜'(한궈파오차이), 미디어 빌리지에서는 '韩式泡菜'(한시파오차이)라고 표기했다"며 "영어로는 한궈파오차이를 '한국식 야채절임'(Korean Pickled Vegetables)으로, 한시파오차이를 '한국식 발효 야채'(Korean-Style Fermented Vegetables)'라고 설명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문제 제기에) 영문 표기와 설명은 'Kimchi'(김치)로 정정됐으나 한자 표기는 그대로였다"며 "오히려 MMC에서는 중국 동북 지방의 배추절임 음식인 '辣白菜'(라바이차이)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항의 메일에서 "김치의 올바른 중국어 표기인 '辛奇'(신치)로 빨리 수정해 아시아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를 바란다"고 요구하며 김치와 파오차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다국어 영상을 함께 첨부했습니다.


여러모로 명칭 논란이 많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입니다.  공존은 서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 인정의 시작이 되겠지요.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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