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스포츠 숙적 일본, 이제는 '타산지석'

  • 기자명 김지석
  • 기사승인 2024.02.2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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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경기력 변화의 시작...일본에서 배우자

대한민국의 4대 프로스포츠란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며, 가장 가깝게 접하고 열광하는 인기 엘리트 스포츠로서, 흔히 축구, 야구, 농구, 배구를 포함한다.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 대표팀의 최대 라이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가 이웃 나라 일본을 답할 것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한·일전은 양국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가 된다. 한·일전은 단순한 승패를 넘어 국가 간 자존심의 대결로 확대되곤 하는데, 서로를 넘어서기 위한 이러한 라이벌 관계 속 선의의 경쟁은 양국 엘리트 스포츠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4대 스포츠, 세계 무대에서의 일본

4대 프로스포츠 종목에서 최근 일본 대표팀들의 국제 성적이 대단히 흥미롭다.

일본 축구는 지난 FIFA 월드컵에서 우승 후보 독일, 스페인을 차례로 꺾고 16강에 오른데 이어, 이후 독일과의 원정 리턴매치에서도 4대 1로 대승하며 독일축구 역사상 첫 감독 경질의 불명예를 안겼다. 지난 아시안컵에서는 비록 8강에서 탈락하였으나, 여전히 FIFA 랭킹 10위권대, 아시아 랭킹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여자축구는 이미 2011년 FIFA 월드컵 우승 경험을 가진 명실상부 세계 최강이다. 이는 남녀 통틀어 아시아 팀의 첫 월드컵 우승이기도 하다.

일본 야구는 지난 WBC에서 우승하며 지금까지 5번의 대회에서 통산 3번의 우승을 달성했다. WBSC 세계랭킹 1위를 고수한 지는 오래다. 여자 야구 역시 지난 제7회 WBSC에서 우승하며 이미 5번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세계 최초로 여자 프로야구 리그를 창설하여 운영 중이다.

지난 FIBA 농구 월드컵에서 일본 남자농구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팀을 상대로 3승을 챙기며, 월드컵 참가 32개국 중 최종 19위에 오르는 호성적과 함께 아시아 1위 자격으로 2024 파리올림픽 본선에도 직행했다. FIBA 세계랭킹 톱 10에 진입한 일본 여자농구는 올림픽 여자농구 최종 예선에서 세계랭킹 4위 스페인, 5위 캐나다를 잇따라 물리치며 1위로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냈다. 일본 여자대표팀 평균 신장은 174.4 cm에 불과했다.

일본 남자배구는 지난 VNL에서 세계 3위의 성적을 거두며 배구계를 놀라게 했다. 이 또한 아시아팀 역대 최고 성적이다. 여자배구 역시 VNL 7위에 올랐다. FIVB 세계랭킹은 남녀 각각 4위, 9위를 기록 중이다.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화려한 배구를 구사하는 일본은 세계무대에서 가장 매력적인 팀으로 각광받고 있다.

모든 종목에서 일본은 지난날에 비해 확실히 업그레이드된 결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제는 그 수준에서 안착되어 가는 모습이다.

YTN 방송화면 갈무리
YTN 방송화면 갈무리

일본 대표팀 경기력에서 보여지는 특성

4대 프로스포츠 종목에서 나타나는 일본 대표팀들의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①축구 - 패스웍 위주의 세밀한 축구를 추구했던 일본은 지난 월드컵에서는 점유율의 허상에서 벗어나 실리 축구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였다. 기존의 정교함에 더불어, 스피드를 기반으로 한 역습 축구를 입힌 것이다. 상대에 따라 ‘지배하는’ 경기와 ‘실리적인’ 경기를 모두 수준 있게 구사한다. 장점인 정밀함을 유지한 채, 부족했던 피지컬의 변화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를 대체할 ‘속도’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 특유의 ‘정밀’하면서도 ‘속도감’있는 축구는 일본 축구의 뚜렷한 색채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 아시안컵에서는 고질적인 피지컬과 투지 부족 문제가 크게 드러나며 고전했다. 이제 일본 축구는 피지컬의 극복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②야구 - 크지 않은 피지컬에도 불구하고 150km대의 강하고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즐비하다. 정교한 제구력은 원래 좋았다. 고교야구에서 나무 배트를 사용하는 우리와 달리, 일본은 여전히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한다. 투수들은 금속 배트의 반발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 강하고 더 정확한 공을 던져야만 한다. 정교한 타격 역시 뛰어나지만, 세계무대에서 일본 야구의 가장 두드러진 강점은 타자보다는 아무래도 투수 쪽이다. ‘제구’에 ‘구속’까지 혁신적인 발전을 더했다.

③농구 - 국제무대에서 동아시아 팀들이 높이와 피지컬로 경기를 지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구나 일본은 전통적으로 아시아에서도 높이와 피지컬의 열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일본 농구는 높이의 약점을 높이의 향상으로 따라가려는 것이 아니라(물론 귀화선수들로 피지컬에서도 개선을 가져왔다), 완전히 다른 농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완벽을 추구하는 듯한 ‘외곽 확률 향상’과 Run&Gun 형태의 빠른 ‘속공’ 농구를 구사하고 있다.

④배구 - 일본 배구는 오래전부터 높이의 열세를 기술을 바탕으로 한 빠른 배구로 극복해 왔다. 일본 배구의 수비 기술은 한 마디로 ‘모든 어택을 다 받아낸다’고 할 정도로 완벽에 가깝다. 공격만 할 줄 아는 반쪽짜리 선수가 없다. 신장이 큰 미들블로커들도 기본적으로 리시브가 된다. 수비에서의 ‘완벽한 기본기’와 ‘빠른 공격’으로 신장의 열세를 완전하게 극복해오고 있다.

MBC 방송영상 갈무리
MBC 방송영상 갈무리

한·일 대표팀 경기력의 격차는?

육상, 체조, 수영 등 기초종목에서의 한·일간 격차는 이미 상당하다. 4대 프로스포츠 종목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자존심을 지켜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일본에 뒤처지는, 아니 그 격차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는 이제 라이벌이라 지칭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났다고도 한다.

대한민국 축구 U23 대표팀이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와일드카드 없이 U21 대표팀을 내보낸 일본을 결승에서 이기며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최근 A대표팀 간 한일전에서는 연이어 0:3 패배를 기록 중이다. 전력 누수가 없다는 전제하에 A대표팀 베스트 라인업 간의 단판 경기력은 쉽게 가늠할 수 없겠으나, 일본은 그러한 A대표팀을 여러 개 만들고도 경기력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 전력이라는 점에서 양 팀의 roster depth의 차이는 분명 크다. 각급 연령별 대표팀 경기에서는 이미 일본에 연전연패하고 있다. 여자축구 역시 상대전적 4승 11무 17패로 일본에 크게 밀린다.

대한민국 야구는 지난 아시안게임에서 모처럼 일본을 꺾었지만, 일본 대표팀은 사회인 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지난해 WBC 한일전에서 우리는 일본에 4:13으로 크게 졌다. 콜드패까지도 우려되는 경기였다.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는 우리팀 젊은 투수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고,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자신 있게 넣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현격한 기량차가 여실히 드러난 경기였다. 여자 야구는 비교 불가다.

대한민국 남자농구는 지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자국내 2.5군에 해당되는 대표팀을 내보낸 일본을 상대로도 패했다. 여자농구 역시 준결승에서 만난 일본에 20여점 차로 크게 졌다. 냉정하게 농구 종목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농구의 혁신적 변화와 개선 없이는 남녀불문 우리 대표팀이 일본을 다시 이기는 데에 상당한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배구는 지난해 아시안게임에서 인도(73위), 파키스탄(51위)에도 패하며 61년 만에 아시아무대 노메달, 최종 7위에 그쳤다. VNL에서도 (국가대항전 1부리그에 해당되는) 코어 국가명단에서 제외된 지 오래다. 지난 2021 도쿄올림픽 4강 신화를 쓴 여자배구의 몰락은 참담하다. VNL 27연패라는 전무후무한 치욕을 당했고, 대회 내내 한 세트를 따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지난 아시안게임에서도 베트남에 패하는 등 최종 5위, 노메달의 수모를 겪었다. FIVB 세계랭킹은 40위로 곤두박질했다. 남자팀에 이어 VNL 코어 국가에서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 배구는 이제 남·녀 대표팀 모두 VNL, 올림픽과 같은 최고 무대에는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일본을 만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KBS 방송영상 갈무리
KBS 방송영상 갈무리

일본에겐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종목에 따라 차이는 존재하겠으나, 일본의 대표팀들이 가진 기본적인 철학은 대체로 ‘철저한 기본기’에 바탕을 둔 ‘속도’‘효율성’으로 요약되는 듯하다. 운동생리학(Exercise Physiology), 운동역학(Exercise Biomechanics) 등 스포츠과학의 토대를 기반으로 자신들이 가진 신체적 특성에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기술적 전략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방향성을 설정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표팀에서 유소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선수 양성을 시도해왔으며, 이제 그 성과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 왜 질까? 스포츠 인프라와 저변, 참여형 스포츠에 기반한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 종목별 협회 예산의 규모, 스포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인식, 기업과 개인의 스포츠에 대한 투자와 규모, 스포츠를 바라보는 문화, 스포츠과학의 발달과 현장 적용력 등 다양한 요소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한·일 대표팀의 경기력 격차를 가져온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부분은 모두가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라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아니지만, 우리 또한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선·발전해 나가고 있는 부분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표팀의 철학과 방향성과 시스템 부재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오고 있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는 계속해서 간과되어오고 있는 부분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우리 대표팀들은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팀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립이 뚜렷하지 않은 모습이다. 철학과 방향성이 없으니, 구현해나갈 Methodology(방법론) 즉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가 없다.

통상 우리 대표팀들은 성적이 안 좋으면, 감독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감독이 교체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감독이 바뀌면 감독의 특성에 따라 대표팀의 색깔도 완전히 바뀐다. 그러다보니 팀의 고유성이라는 것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 대회에서의 실패의 경험도 성공의 경험도 누적되지 않는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표팀들의 운영이 늘상 ‘미봉책’,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와 같은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표팀의 철학과 방향성에 대한 큰 줄기의 정립은 결국 우리 유소년, 청소년 스포츠의 성장 철학으로 연결된다. 그러면 감독이 바뀌어도, 기술위원장이 바뀌어도 대표팀이 나아가는 큰 흐름이 요동치지 않고 일관성이 유지되는 힘을 갖게 한다. 그러한 큰 줄기 위에 새로운 것들이 옷 입혀지며, 10년, 20년, 30년 지속될 때 불가능해보였던 결과를 꽃피우게 된다. 사실 나쁜 전략, 나쁜 전술이란 없다. 우리에게 맞는 전략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그것을 얼마나 완전하고 완성도 있게 수행할 수 있는 내구성을 갖추었느냐가 바로 승부처가 된다. 이것 찔끔 저것 찔끔 애매하게 해보아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스포츠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다.

자, 우리 대표팀의 철학과 방향성은 무엇인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가?

이제 우리도 종목을 막론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우리 대표팀들의 경기력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SBS 방송영상 갈무리

* 타산지석 (他山之石): 남의 산에 있는 돌이라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 또는 허물과 실패까지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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