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통념적 시간 관념을 뒤바꾸는 전혀 새로운 시간 이야기

[이승윤의 책의 재발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기사입력 2022.07.29 13:53
  • 기자명 이승윤
시간은 인간에게 영원히 신비스럽고도 불가사의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때문에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은 저 아득히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시간은 인간에게 영원히 신비스럽고도 불가사의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때문에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저 아득히 먼 옛날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1. 인간은 몹시 탐욕스런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 영역 안에 들어온 무엇이든지 탐을 낸다. 흔히 인간은 직접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물질적인 대상에게 더욱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명품, 자동차, 좋은 집, 아름다운 이성(異性), 반짝거리는 귀금속, 혹은 미식(美食) 같은 것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영역의 대상에 대해서도 강한 욕구를 지닌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까. 그 욕구의 대상은 진리가 되기도 하고, 지식이 되기도 하고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미(美) 자체가 되기도 한다. 더구나 문명이 놀랍도록 발전함에 따라서 인간은 또 하나의 추상적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대상은 바로 시간, 아니 물리학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시공간이 되겠다.

2021년 12월 미 항공우주국(NASA)은 25년의 개발 기간 동안 약 100억 달러를 투자하여 완성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을 발사했다. 파장이 긴 적외선 방식으로 관측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초기 우주 촬영에 적합한 망원경이라고 한다. 초기 우주 촬영에 주 기능이 맞춰져 있다는 것은 그 관심의 주 영역이 우주의 기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우주의 기원이란 당연히 시간의 기원을 의미한다. 만약 우주의 기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인간이 현실 가능한 범위 하에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가. 글쎄……. 기존의 허블 우주 망원경에 비해 100배 이상의 고성능을 자랑하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의 시선이 까마득히 먼 우주의 안쪽을 이미 넘보고 있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의 성능은 허블 우주 망원경의 100배에 이른다고 한다. 파장이 긴 적외선 방식으로 관측하기 때문에 초기 우주 촬영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의 성능은 허블 우주 망원경의 100배에 이른다고 한다. 파장이 긴 적외선 방식으로 관측하기 때문에 초기 우주 촬영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스위스 제네바대와 미국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학연구소 연구진은 제임스 웹 망원경이 전송해 온 우주 사진들을 조사한 후, 우주 관측 사상 가장 오래된 은하 후보들을 발견했다고 7월 20일 (현지시간)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 아카이브(arXiv)에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새롭게 찾아낸 현존 최고령 은하의 나이는 135억 년에 이른다. 우주의 역사를 138억 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 추정이 맞다면 인류의 시선이 우주의 기원에 가닿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겨우(?) 3억 년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어쩌면 인간은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시기에 138억 년 전 빅뱅이 발생하게 된 이후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의 장엄한 광경을 제임스 웹 망원경의 도움을 얻어 포착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눈에 터무니없이 막연하고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던 시간의 영역, 그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2. ‘루프양자중력(loop quantum gravity)이론’의 선구자로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며 저술가인 카를로 로벨리가 지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인간이 그토록 파악하고 싶어하는 ‘시간’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과학적,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시간의 진정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제까지 우리가 느끼고 있던 시간에 대한 통념들을 모조리 깨뜨린다.

우선 저자는 현대 이전의,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아인슈타인 이전, 시간을 바라보았던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시간이란 변화의 척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사물은 계속 변화하고,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측정하고 계산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한다. 이와 반대의 관점이 바로 만유인력으로 유명한 뉴턴의 관점이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간 외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비록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마저 사라져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게 그리고 동일하게 흐른다고 본 것이다.

기실 우리가 단순히 느낌에 따라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에 대한 관점은 뉴턴의 관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통념적 시간은 온 우주에서 균일하고 동등하게 흐른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건 시간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는 것이다. 또한 온 우주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지금’이 존재한다. 시간의 방향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를 향해 고정되어 있고 비가역적이다. 즉 통념상 시간은 ‘유일’하며 ‘방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독립적’이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이 결코 절대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선 시간은 낮은 곳보다 높은 곳에서 빠르게 흐른다. 정지되어 있는 물체가 움직이는 물체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궁극적으로 시간은 질량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시간은 ‘유일함’의 성질을 상실했다.

저자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의 중력장 연구로 통합됐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단순한 사물 외에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뉴턴의 예상은 옳았다. 뉴턴의 참된 수학적 시간은 실제로 존재한다. (중략) 그러나 이 시간이 사물과 관련이 없으며 규칙적으로 꾸준히, 그 어떤 것과 아무 상관없이 흐른다는 추측은 틀렸다. ‘언제’와 ‘어디’가 항상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옳았다. 하지만 이 무엇인가가 중력장, 곧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일 수도 있다. (중략) 그러나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또 한 부분, 이 세상에서의 ‘독립성’을 잃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던 시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을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던 시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루드비히 볼츠만의 열역학 제 2 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연구로 인해 우리는 시간의 '방향성'마저 상실했다. 엔트로피 법칙은 엔트로피가 작은 상태에서 큰 상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엔트로피가 작다는 것은 분자의 수, 온도 혹은 무질서도가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엔트로피가 크다는 것은 분자의 수, 온도, 또는 무질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루드비히 볼츠만의 연구에 의하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기본적인 운동 법칙이나 심오한 자연의 문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무질서해져서 특수하거나 특별한 상황이 점점 사라지는 것에 있다.”

즉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단지 엔트로피의 낮고 높음의 차이 밖에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과거와 미래의 차이가 사라질 수 있다. 이리하여 시간은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그 ‘방향성’조차 상실했다.

 

3. 통념적 시간의 성질들, ‘유일성’, ‘독립성’, ‘방향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럼 오늘날의 시간은 어떠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는가. 저자는 현대물리학의 실험과 측정을 통해 오늘 날의 시간이 ‘입자성’, ‘관계성’ ‘비결정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양자적 특성과 상당히 중첩되는 것인데, 저자가 주창하는 루프양자중력이론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루프양자중력이론이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을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중력의 양자적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다. 플랑크 규모를 시공간의 기본 최소 단위로 설정한 후 이 최소 단위가 기하학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시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 하에서 시간이 ‘입자성’을 지닌다는 것은 물처럼 끊이지 않고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관념과의 작별을 의미한다. 상술하였듯이 시공간은 기본 최소 단위를 지닌다.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 능력 때문에 시간은 끊이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기본 최소 단위의 시간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의 ‘관계성’은 시간의 간격을 결정하는 토대가 세상을 이루는 다른 실체들과 다른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루프양자중력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역동적인 장(Field)의 한 양상이다.

“이 역동적인 장은 도약하고 요동치며 상호 작용할 때만 구체화되며, 최소 크기 아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시간의 ‘비결정성’ 역시 시공간을 전자와 같은 물리적 실체로 파악한다면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중략)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실로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루프양자중력이론에 따르면 시간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통념 상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개의 사건과 그 사건 사이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4. 물론 우리는 카를로 로벨리의 주장에 대해 찬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주장하는 실제 시간의 성질, 즉 시간의 ‘입자성’, ‘관계성’, ‘불확정성’에 대하여 반대 입장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물리학이나 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전혀 없는 일반인들이 카를로 로벨리의 이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루프양자중력이론에 따른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 관념에 찬성하지 않거나 혹은 무지하다고 해서 이제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통념적 시간관을 견지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분명 현대 물리학은 실제 시간에 있어 유일성과 독립성을 부정하고 있다. 다시 이야기해서 이 우주 어디에서나 통용될 수 있고 사물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통해 주창한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은 무수히 많은 실제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우리는 시간이 유일성과 독립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눈으로 저마다의 새로운 시간관을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 도대체 시간이 고유의 통념에 따른 성질을 잃어버렸기에 어쩌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판을 치고, 끔찍한 전쟁이 발생하고 물가는 폭등하며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데,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시간 따위에 대해 무슨 고민이냐며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하기야 그렇다. 우리가 시간의 실체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해도, 혹은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느 쪽이나 상관없이 인간 세계의 크고 작은 여러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 거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구해 갈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우리 인류의 인식 변화에 끼친 영향이 그 좋은 하나의 예가 된다. 지동설은 비록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점차적으로 인간의 사유에 영향을 미치며 이윽고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조종을 울리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됐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사유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보편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사라진 영역에 특수한 저마다의 시간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시간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시간은 서로의 관계 속을 파고들며 흐른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의 관념 속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주어진 시간을 더욱 소중히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타인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하여 존중해 나갈 수도 있다. 나에게 특별한 시간은 타인에게도 특별하기 때문이다.

 

때는 마침 휴가철이다. 인공의 빛으로 가득한 도시의 하늘에서는 별빛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위를 피해 다다른 자연 속에서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은 가득 별을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처럼 135억년 전 아득히 멀어져 간 별빛을 볼 수는 없다고 해도, 유리알처럼 밝게 빛나는 별들이 박힌 밤하늘은 여전히 아름답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시간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기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 이중원 옮김 / 쌤엔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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