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가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는 세계에 대한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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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는 세계에 대한 담론
  • 이승윤
  • 승인 2022.11.2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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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의 책의 재발견]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1. 거래 규모 세계 3위였던 가상 화폐 거래소 FTX가 지난 11월 11일 파산 신청을 했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가상 화폐 시장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파산 신청 이전 2만 3천 달러를 넘었던 가상 화폐의 대표주자 비트코인의 가격은 11월 말 기준 1만 6천 달러를 넘나드는 상태로 거래되고 있다. 비트코인뿐 아니라 이더리움, 리플, 도지코인 등 다른 가상화폐 역시 FTX 파산의 악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향 추세를 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뿐만 아니다. 지난 11월 24일, 국내 게임회사 위메이드가 발행했던 가상 화폐 위믹스가 디지털자산 거래소 공동협의체 ‘DAXA’로부터 상장 폐지 결정을 받았다. 

FTX 파산 및 위믹스의 상장 폐지는 암호화폐 시장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을 차갑게 하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 버핏의 절친이자 버크셔 헤셔웨이 부사장인 찰리 멍거는 이미 지난 11월 15일(현지 시간) CNBC와의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은 사기, 망상에 가까우며 비트코인 투자는 미친 짓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과연 가상 화폐 시장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냐는 질문에 선뜻 ‘YES’ 라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이로니컬한 현실이다. 비관론이 소리를 높이 외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폭락이 오히려 가격 저점에서 우량 가상 화폐를 구매할 수 있는 투자 기회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캐시 우드 아크인베스트먼트 CEO는 최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를 통해 향후 비트코인은 100만 달러에 육박할 것이며 이미 기관투자자는 폭락한 가격의 비트코인을 매수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인정한 엘살바도르의 대통령 나이브 부켈레 역시 트위터를 통해 매일 비트코인을 구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어찌 보면 단지 온라인에서만 존재할 뿐인 ‘가상’의 화폐가 이처럼 현실 경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은 우리 세상이 실로 요지경과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이미 1980년대 초반 <시뮬라시옹>이라는 저작을 통해 ‘가상’이 오히려 ‘실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장 보드리야르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가상 화폐 대란은 오히려 시대 흐름 상 필연적인 귀결일 수 있다. 즉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상이 실재를 대신하게 되는 시대의 전환 과정에 있어 마땅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종의 통과 의례인 셈이다.

이러한 가상 화폐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새삼 우리에게 과연 가상과 실재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마저 던지게 한다. 장 보르리야르의 명저 <시뮬라시옹>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가상’에 대한 담론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온라인 속의 존재인 가상 화폐는 과연 실재성을 지니는가. [시뮬라시옹]의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아무 망설임 없이 'Yes' 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차피 우리 세상은 실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파생 실재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속의 존재인 가상 화폐는 과연 실재성을 지니는가. [시뮬라시옹]의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아무 망설임 없이 'Yes'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차피 우리 세상은 실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파생 실재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2.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의 인식론적 개념인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실재론이란 문자 그대로 주체의 주관적 인식 작용과 별개로 인식 외부에 실질적 존재 다시 말해 참된 실재가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실재론의 대표적인 예로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들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참된 실재인 ‘이데아’가 존재하지만 우리의 인식 능력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아서 그 참된 실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와 반대인 입장이 바로 유명론(唯名論)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 실재 혹은 이데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지칭하는 이름(또는 기호)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관점이다.

<시뮬라시옹>의 저자 장 보드리야르는 세계를 유명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 세계에 실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담론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의 주류 흐름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론적 관점에 있어 유명론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19세기의 철학자 니체가 언표한 ‘신(神)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의 죽음이란 단순히 종교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철학적 관점에서 신이란 참된 실재(이데아)와 등가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전지전능하며 이 세계 모든 것의 참된 근원인 신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세상에서 실재 역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3.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은 하나의 중심된 주장을 펼쳐감에 있어,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적 체계를 제대로 지니고 저술된 책은 아니다. 저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현대의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여러 영역의 다양한 사례를 예로 들며 저술한 각각의 글들을 하나로 엮어놓은 일종의 문명비평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미 저서의 앞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늘 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를 모델들을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뮬라시옹(simulation)은 명사 시뮬라크르(simulacre)의 동사형이다. 그렇다면 시뮬라크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뮬라시옹>의 역자(譯者)는 <시뮬라시옹>에서 명명되는 시뮬라크르의 가장 참된 의미가 가장(假裝)의 뜻에 가깝다고 말한다. 역자에 따르면 가장은 흉내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즉 이 세상의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실재성이 없는 파생 실재만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상술한 바처럼 신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결국 본질적으로 신이란 없었기 때문이고 오직 시뮬라크르만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신 자체도 시뮬라크르였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실재를 상상하여 만들어낸 파생 실재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차이란 없다. 서로 간에 비교 대상이 존재할 때 비로소 차이가 존재할 수 있으나 실재가 사라져 비교 대상이 없어진 사회에서 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차이가 없는 세상은 동일시의 세상이 된다. 그것은 곧 기의(記意)와 기표(記標)가 구분되지 못하고 하나로 용해되어 버리는 세상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저마다의 대상이 상호 간의 차이를 잃어버리고 동일시되는 현상을 함열(implosion)이라고 지칭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나의 극을 다른 극으로부터, 시작을 끝과 떼어놓지 않는다. 하나를 다른 것 위에 뭉개는 것과 유사하며 전통적인 두 개의 극들 중 하나가 다른 것 속으로 빠지거나 환상적으로 들어박히는 것과 유사하다. 함열. (중략) 결정론의 상이한 양태의 흡수 즉 의미의 함열, 바로 여기서 시뮬라시옹이 시작된다.”

저자는 시뮬라시옹의 문화적 현상 중 하나로 1971년 촬영된 미국 방송의 한 다큐멘터리를 든다. 현실의 실제 가족인 라우드家 사람들의 일상을 대본도 각본도 없이 찍은 다큐멘터리는 7개월 동안 촬영되었다. 애초에 정해진 대본이 없기에 라우드 집안의 사람들이 ‘실재’ 그대로 생활하는 모습이 미국의 시청자들에게 방영되었으나 그들의 생활 모습은 당연히 실재를 닮은 비실재일 수밖에 없었다. 라우드 家의 출현자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진실로 실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의 시청자들은 TV를 통해 라우드 家의 사람들의 실재로 포장된 비실재적인 일상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TV 화면 속에서 실재와 비실재는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시청자들이 간과하고 있던 요소가 있다. 그것은 오히려 TV가 시청자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이다. TV는 비실재의 실재를 바라보는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의 반응을 살핀다. 이제 실재와 비실재도, 관찰 대상과 피 관찰 대상도 구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주체도, 초점도, 중심도, 주변도 없다: 순수한 굴곡 또는 순환적인 굴곡, 더 이상 폭력도, 주변도 없다. (중략) 유일한 <정보>, 즉 비밀스러운 독성, 연쇄반응, 느릿한 함열, 그리고 여전히 실재효과가 작용하러 오는 공간들의 시뮬라크르들.”

결국 실재와 비실재가 서로 차이를 잃어버리고 융합되어버린 함열의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권력, 자본, 시스템은 저지(沮止) 전략을 통해 파생 실재의 참모습을 은폐하고자 한다. 역자의 해설에 따르면 저지 전략이란 파생 실재의 전략으로서 실재를 시물라크르로 대체해 버린 이후에 혹시라도 시물라크르가 아닌 고전적 의미의 실제 상황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저지하는 전략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세상이 실재가 아닌 파생 실재의 세계라는 것을 일반인들이 인식할 수 없도록 아직 실재가 존재하는 듯 자신의 부정적인 요소를 조작하는 작업이 저지 전략이다.

저자가 제시한 저지 전략의 여러 실례 중 하나가 디즈니랜드이다.

“디즈니랜드의 상상 세계는 참도 거짓도 아니고 실제의 허구를 미리 역으로 재생하기 위하여 설치된 저지 기계이다. 그로부터 이 상상 세계의 허약함과, 유치한 백치성이 나온다. 이 세계가 어린이 티를 내려 하는 이유는, 어른들이란 다른 곳 즉 <실제의>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이며, 어른들의 유치성 그 자체가 그들의 실제 유치성을 환상으로 돌리기 위하여 여기서 어린이 흉내를 낸다.”

다시 이야기해서 디즈니랜드를 고의적으로 비실재적 세계의 모습으로 꾸며냄으로써 디즈니랜드의 바깥 세계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실재의 세계라고 믿도록 의도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세계의 비실재성을 깨닫는 것을 저지하는 시스템의 일환으로서 디즈니랜드는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도 저지 전략은 진행된다. 이 세상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뉴스 중 하나가 정치 스캔들과 관련된 뉴스이다. 부패한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도덕성에 대하여 비판하는 뉴스는 언제나 메인 기사로 장식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부패한 정치인들이 재판을 받고 죄수복을 입은 채 감옥으로 향하는 뉴스를 바라보며 우리 사회의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정치인들의 비리를 폭로하는 뉴스를 통하여 파생 실재의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환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권력은 존재와 정당성의 미광을 재발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살해를 연출할 수 있다.”

파생 실재의 저지 효과는 무시무시하다. 체제의 부정을 통해 체제의 지속성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생 실재를 부정하여 파생 실재를 죽음으로 몰아갈 때 파생 실재는 죽음을 통해 오히려 부활한다. 마치 디즈니랜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사유를 통해 우리 세계의 실재성이 인정받듯이, 정치인의 타락과 부패를 드러냄으로써 파생 실재는 오히려 그 존재의 정당성을 승인받게 되듯이 말이다. 자신의 실재에 대한 부정을 통해 그 실재가 존속하게 되는, 그리하여 실재와 비실재가 구분되지 못하는 뫼비우스와 띠와 같은 반복적이고 혼돈스러운 영원회귀 속에서 우리는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자의 시각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시스템에 대적하여 이 진행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시스템은 그의 죽음이 없어서 죽었기에 우리에게 오직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다.”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비실재는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일 수 있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인공 지능의 놀라운 발달은 오래지 않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비실재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비실재는 오히려 실재보다 더 실재적일 수 있다.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인공 지능의 놀라운 발달은 오래지 않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비실재의 세계를 사이버 공간을 통해 창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파생 실재가 온 세계를 완전히 압도하는 세상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4. 시대를 앞선, 저자의 뛰어난 통찰은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거대 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더욱 우리를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리라고 주장 부분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입체 영상을 다룬 부분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당신과 입체 영상 사이를 가르지 않도록 입체 영상이 판 앞에 투사되면 (중략) 환각은 완전한 것이 되고 정말로 미혹적인 것이 된다. (중략) 회화처럼 눈만을 위한 투시권 대신에, 여기서는 당신 자신을 투시의 소실점으로 변환시켜서 당신이 거꾸로 깊이감 속에 있게 된다.”

당신 자신이 투시의 소실점이 되어 당신이 거꾸로 깊이감 속에 있게 되는 세계, 이 세계야말로 오늘 날 주목받고 있는 가상 현실 속 세계 즉 메타버스(metaverse)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메타버스는 초월적이라는 뜻의 메타(meta)와 세계라는 뜻의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서 문자 그대로 초월,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세상에서 살아오긴 하였으나 적어도 실재에 대한 믿음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메타버스의 세계가 완전히 현실화되면 실재에 대해 믿음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 비실재가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인 세계에서 도대체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직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 신경과 접촉하는 메타버스 시스템의 디지틀적인 전기 신호 혹은 자극일 뿐이다. 그 신호, 그 자극의 실재감이 메타버스의 밖의 세계에서 우리가 감각하는 ‘실재’ 자극보다 더 실재적일 때 우리의 실재 세상은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저 기념비적인 SF 영화 매트릭스의 세상이 아닌가.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우리의 미래 세계는 저자가 주장하는 시뮬라크르의 세 가지 질서 중 마지막 질서의 단계 즉 정보, 모델, 정보통신학적 게임 위에 세워진 시뮬라시옹의 시뮬라크르들 – 완전한 조작성, 파생실재성, 완전한 통제 목표가 온전히 구축된 세계가 되어버릴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 세계는,

“역설적으로 실재가 우리의 진정한 유토피아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가능한 것의 질서에 속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실된 대상으로서 거기에 대해 꿈만 꿀 수 있는 유토피아이다.”

그러한 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인가. 세상 모든 것이 응축되고 뒤섞여 버리는 함열적인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판단은 쉽지 않아 보인다.

 

5. 이제 <시뮬라시옹>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 속으로 돌아와 보자. 실재와 비실재가 구분될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 세상에서 가상 화폐가 전적으로 가상 혹은 허상의 대접만을 받게 될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미 너무 많은 실재 자금이 가상 화폐 시장에 투입되었고 가상 화폐 시장의 시스템 역시 가상이란 명칭이 무색해질 만큼 상당한 실체성을 지니게 된 것 역시 사실이다. 상술한 바처럼 중미 국가인 엘살바도르의 경우 이미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인정했을 정도가 아닌가.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반(反) 서방 국가들 중 일부는 가상 화폐의 활성화를 통해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위치를 흔들고자 하는 의도조차 꾀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재의 가상 화폐들이 앞으로 달러 혹은 다른 실제 화폐들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가 비실재의 실재화이며 그러한 경향의 한 양상으로서 가상 화폐 역시 그 영속력을 유지해 나갈 확률이 크다는 것이다. 현재의 가상 화폐들이 화폐로서의 신용을 상실한다고 해도 또 따른 형태의 가상 화폐들이 그 공백을 대체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문제는 결국 욕망이 아닐까. 가상 화폐가 실질 화폐보다 더 실재성을 지니는 대상으로 성장하여 인간의 욕망을 보다 자극하게 된다면 인간은 기꺼이 가상 화폐를 선택할 것이다.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거대한 인터넷 네트워크가 구축해 낸 메타버스의 세상이 현실 세상보다 더 실재적이고,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보다 더 충족해 줄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이 과연 비루한 현실 세계를 고집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지금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특이점의 시간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하태환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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