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소환한 12·12 반란 주역들...그 끝은 모두 사면

  • 기자명 박지은 기자
  • 기사승인 2023.12.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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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주도자 34명 중 재판에 넘겨진 16명 이력 확인해보니

12·12 군사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772만9268명(12월 14일 기준)을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12일 국방부 브리핑에서 ‘서울의 봄’을 언급하며 "군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가운데,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소임을 다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12·12 사태를 일으킨 반란 주역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에게 내려졌던 법적인 판단과 군사반란 이후의 이력을 알아봤습니다.

KBS 다큐멘터리극장 방송영상 갈무리
KBS 다큐멘터리극장 방송영상 갈무리

◇ 반란 주역 전두환 형량 '사형' 등... 하지만 결국 모두 사면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주동 하에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뤄진 군사반란입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군사 반란 행위가 적법한 체포 절차도 밟지 않고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것으로 “육군참모총장 개인에 대한 불법 체포 행위의 의미를 넘어 대통령의 군 통수권 및 육군참모총장의 군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라고 판결했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의 반헌법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당시 군사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은 12·12 반란 이후 10년이 지난 1993년 7월 19일 전두환을 포함한 반란주도자 34명을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29일 검찰은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후 여론의 반발이 거세지자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한 34명 중 16명이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최종적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은 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 이희성, 주영복,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최세창, 차규헌, 장세동, 박종규, 신윤희, 박준병 총 16명이었습니다.

1996년 8월 26일 제1심(서울중앙지방법원 95고합1228)에서 반란군 주역으로 이후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 6월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서울고등법원)에서는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형량이 줄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황영시, 허화평, 이학봉에게 반란 중요임무 종사죄 등을 적용해 각각 징역 8년을, 그리고 정호용, 이희성, 주영복에게는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또 허삼수, 유학성에게는 징역 6년, 최세창에게는 징역 5년 그리고 차규헌, 장세동, 신윤희, 박종규에게는 각각 징역 3년6월이 선고되는 등 대부분 1심보다 낮은 형량이 선고됐습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박준병 피고인에 대해서는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15명 중 14명이 감형을 받은 것입니다.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판결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판결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감형된 형량조차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정부는 특별사면을 통해 유죄를 받은 15명 전원을 사면했습니다. 앞서 진행된 유죄선고가 '사면을 위한 처벌'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 재판에 넘겨졌던 16인, 그들의 삶은...

재판에 넘겨졌던 16명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와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자료에서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의 당시 직책과 대표 경력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는 군사 반란 이후 각각 11대·12대, 13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외의 반란 가담자 중 6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대부분 장관, 공사 이사장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습니다.

출처 =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뉴스톱 재가공
출처 =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뉴스톱 재가공

군사 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비서실장이었던 허화평은 포항에서 제14대(1992년) 국회의원에 이어 15대(1997년)까지 당선되었으나, 1997년 대법원 상고심 재판에서 징역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이후 1998년 설립된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올해 초까지도 도서를 집필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학봉은 군사 반란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2차장을 이어 제13대(1988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됐습니다. 그는 2006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난 반대 세력이 뭐라 해도 당당하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잡으러 간 것에 대해서 추호의 죄책감이 없다"는 말을 남긴 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 2014년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제50보병 사단장 소장이었던 정호용은 1987년 제25대 국방부 장관을 맡고 이어 대구에서 제13대(1988년), 14대(1992년)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8년간 육군사관학교 발전 기금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정호용은 하나회 핵심 인물 중 생존자로 2021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국내로 돌아왔지만,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사 반란 당시 육군 1군단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황영시는 제24대 육군참모총장에 이어 1984년부터 4년간 제11대·12대 감사원장을 두 차례 지냈습니다. 지난해 4월 9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국방부 군수 차관보였던 유학성 중장은 군사 반란 이후 중앙정보부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전국구 의원으로 제12대, 경북 예천 지역구 의원으로 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14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2년 후인 1997년 사망했습니다.

최세창은 군사 반란 이후 제22대 합동참모의장을 시작으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제29대 국방부 장관을 맡았습니다. 이후에도 대한광업진흥공사, 대한태권도협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허삼수는 부산에서 제14대(1992년)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되었고, 이후 한국문화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한 후 2004년까지 국제장애인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군사 반란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직책을 맡았던 이희성은 국방부 기획국장, 육군 참모차장 자리를 거쳐 국토교통부 장관과 한국 토지주택도시공사 이사장직을 역임하였고 지난 해 9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출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뉴스톱 재가공
출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뉴스톱 재가공

반란 당시 수도군단장이었던 차규헌 중장은 이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참모차장, 2군사령관을 지냈습니다. 전역 이후 비상기획위원장을 거쳐 국토교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11년 사망했습니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2·12 군사반란 이후에도 국방부 장관으로 1982년까지 재직했습니다. 이후 내무부 장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뒤 2005년 사망했습니다.

전두환과 더불어 5공화국 실세였던 장세동은 반란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과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2003년 군사반란 주동자들과 함께 공무원 연금관리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했습니다. 장 씨는 당시 중심인물 중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입니다.

박종규는 군사 반란 이후 육군본부 정보처장과 육군 제56보병 사단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추모사업회 측에 “지난 30년은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며 12·12에 참여했던 자신과 부하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군사 반란 당시 수경사 헌병 부단장이었던 신윤희는 육군 고위직인 헌병감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2012년 <12.12는 군사반란인가>라는 저서를 남겼고, 이후의 근황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던 박준병은 군사 반란 당시 제20보병 사단장이었습니다. 2009년 작고한 박세직 전 서울시장, 최근 극우단체 대표로 활동 중인 박희도과 함께 ‘쓰리박’이라고 불렸던 그는 충북에서 제12대~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됐으며 2016년 투병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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