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악전고투의 삶, '롱테이크'로 피어나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11.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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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인생: 무제> 야마다 카나 감독

“셰헤라자데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 샤리아 왕도, 독자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욕망과 결말을 알고 싶다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더더욱 이야기에 빠져들 뿐이다.”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10년 전 어느 날, 레코드회사 프로모터로 일하던 스물다섯 청년, 야마다 카나는 연극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관련 이력은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이 전부. 하지만‘겁도 없이’ 극단을 만들더니 희곡을 쓰고 배우들을 모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할 말 많은 전방위예술가’의 탄생이었다. 사진제공: 야마다 카나 감독
10년 전 어느 날, 레코드회사 프로모터로 일하던 스물다섯 청년, 야마다 카나는 연극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관련 이력은 중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이 전부. 하지만 ‘겁도 없이’ 극단을 만들더니 희곡을 쓰고 배우들을 모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할 말 많은 전방위예술가’의 탄생이었다. 사진제공: 야마다 카나 감독

전문분야보다 21세기 독자들을 위한 필독서 매뉴얼로 더 유명한 피터 박스올 서섹스대 교수(문학이론)가 『천일야화』에 대해 기술해 놓은 위 구절은, 외국어 구사력의 ‘다른 위상’을 몸소 체험했던 필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필자는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없는 가계(family line)와 환경 덕에 ‘바이링걸’로 자랐다. 이후 다른 외국어 구사력이 더해졌다. 자연스레 학교에서 남들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영화학과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외국어 구사력으로 담보할 수 있는 차별성이 없어서였다. 예컨대 피터 박스올의 저서에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나관중의 『삼국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등 각기 다른 언어로 집필된 수많은 저작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들은 그저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일 뿐, 이를 번역해 소비하는, 다시 말해 우물을 파는 건 목마른 이들의 몫이다. 할 말, 바로 콘텐츠 자체가 그들의 힘인 것이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인생: 무제>의 야마다 카나 감독도 여기 해당한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인생이라는 게 X같더라고요”라는 모놀로그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카노(이토 사이리 분). 취직을 못해 악전고투하다 출장서비스 업소에 흘러들지만, 첫날 도망을 갔다가 잔심부름꾼으로 재고용되는 그. 데이트클럽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용돈을 일하던 감독의 페르소나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인생이라는 게 X같더라고요”라는 모놀로그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카노(이토 사이리 분). 취직을 못해 악전고투하다 출장서비스 업소에 흘러들지만, 첫날 도망을 갔다가 잔심부름꾼으로 재고용되는 그. 데이트클럽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용돈을 일하던 감독의 페르소나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레코드회사에서 프로모터로 일하던 10년 전 어느 날 그는 연극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만 스물다섯. 관련 이력이라고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연극반 활동이 전부. 그런데 느닷없이 극단(극단 “로직”)을 만들더니 희곡을 쓰고 배우들을 모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가 쏟아졌다. 매년 두 세 편의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다른 공연예술 장르는 물론 이벤트 연출에까지 손을 댔다. 영화와 TV드라마,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희곡ㆍ시나리오작가, 무대연출가, 배우,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활약하며 수상(受賞) 레이스를 이어갔다.

야마다 감독의 존재를 국제무대에 알리는 신호탄이 될 <인생: 무제>에는 할 말이 많은 그의 터치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우선 “인생이라는 게 X같더라고요”라는 모놀로그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카노(이토 사이리 분)부터 그렇다. 취직을 못해 악전고투하다 출장서비스 업소에 흘러들지만, 첫날 도망을 갔다가 잔심부름꾼으로 재고용되는 카노는 데이트클럽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용돈을 벌던 감독의 페르소나다. 그리고 난폭한 보스 야마시타, 친절한 하기오, 운전수 류타, 세 남성와 카노가 돌보는 공간에서 ‘콜’을 기다리는 여성들. 내내 공책에 뭔가를 써 내려가는 치카, 가슴속에 온갖 감정의 쓰레기를 담은 채 웃기만 하는 마히루.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처럼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스토리라인은 대기실이라는 공간적 제한이 무색할 만큼 쉴 새 없이 관객을 몰아친다.

강렬한 타이틀 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문제작, <인생: 무제>의 야마다 감독을 만났다.

발군의 연기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젬스톤 상을 수상한 카노 역의 이토 사이리 배우. 「인생: 무제」에서는 특유의 감각과 뛰어난 시나리오 분석력으로 야마다 감독과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발군의 연기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젬스톤 상을 수상한 카노 역의 이토 사이리 배우. 「인생: 무제」에서는 특유의 감각과 뛰어난 시나리오 분석력으로 야마다 감독과 환상의 팀워크를 보여주었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상현

국제영화제에 작품이 초청된 건 4년 전이지만 해외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 초청은 이번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야마다 카나

대단한 영광입니다.

코로나 19만 아니었다면 한국에 직접 가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해외에서 제 작품이 상영되는 건 정말 기쁜 일이에요.

 

홍상현

평소에도 한국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걸로 유명하십니다. 좋아하는 한국영화의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으신지요.

야마다 카나

봉준호 감독님은 이제 영화작가로 제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마더>나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인간의 집요한 업보를 뛰어나게 그려내실 뿐만 아니라 <옥자>처럼 엔터테인먼트성 높은 작품도 만들어 내시죠. 또 <기생충>의 칸영화제 수상 소식은 같은 아시아인인 제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습니다. 정말 큰 기쁨이었지요.

또, 평소에 케이팝 뮤직비디오 보는 걸 좋아해요. 컷의 분할이라든가 색채의 사용도 화려하고 멋질 뿐 아니라 서정적인 면과 미학적 감각 등에 집중하다 보면 정말 많은 공부가 됩니다. 특히 블랙핑크마마무를 좋아하고요. ‘아, 저런 여성이 되고 싶구나’하면서 동경하고 있습니다. (웃음)

 

홍상현

강렬함이라는 면에서 뭔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이는데요? (웃음)

자, 그럼 여기서 잠깐 시간을 10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음반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돌연 사직, 극단을 만들어 창단공연을 하셨습니다. 보통의 경우 회사를 그만두고 배우가 되기 위해서 극단의 연구생이 되거나, 조감독 생활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자신의 극단을 만들었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데요.

야마다 카나

‘연극을 할 거라면 내 극단을 만들자’는 생각 외에 다른 선택지를 두지 않았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면 연극의 세계 자체를 잘 몰랐던 거죠. (웃음) 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연극반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외부로 프로 연극인들의 공연을 보러간 적은 많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 연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 현실감을 갖지 못해서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렇다 보니 막상 연극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지식도, 기술도 없이 무작정 작품을 만드는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관객들의 반응도 제 마음 같지 않아서 괴로움도 겪었어요. 다만, 그런 가운데 만난 이들로부터의 배움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전고투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카노,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실은 가장 큰 분노와 상처를 안고 있는 마히루,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버려진 상처를 안고 있고 결국 그로인해 파국을 맞게 되는 아츠코. 「인생: 무제」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서울 정도로 디테일하고 아프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악전고투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카노,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실은 가장 큰 분노와 상처를 안고 있는 마히루,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버려진 상처를 안고 있고 결국 그로인해 파국을 맞게 되는 아츠코. 「인생: 무제」의 모든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서울 정도로 디테일하고 아프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상현

게다가 지금까지 관여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직접 각본을 쓰셨습니다. (물론 연기도 하셨지만) 특별히 “전업 작가”보다 “전방위예술가”의 길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야마다 카나

제 스스로 “전방위 예술가”의 길을 택해야겠다는 의식은 따로 없었습니다. 다만, ‘흥미가 있다면 도전해봐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무대연출가로 살아가다 감독 데뷔도 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해요. 하지만 이 또한 영화를 택하겠다는 자각보다, 연출가로써의 역량을 높이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홍상현

6년의 세월이 흘러 무대연출가로서 인정받은 후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인 <밤, 도망가다>로 영화감독에 데뷔하신 이력이 이제야 이해되네요.

야마다 카나

앞서 드린 대답과 내용이 다소 겹치는 것을 감안하고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높이고 싶었던 까닭에, 무대연출을 통해 만들어 온 것들을 영화현장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또, 영화제작을 경험한 뒤에는 무엇을 무대연출로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은 흥미가 있었어요. 연출가로서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막상 도전을 해 보니 영화제작이 너무 힘들어서 ‘이러다 머리칼이 남아나지 않겠구나!’ 싶을 만큼 골머리를 앓았답니다. (웃음) 그런데 그 순간을 넘어서니 새로운 세계가 있고,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거기 서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는 결국 ‘인간’을 그리는 작품을 만든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니 뭔가를 선택해서 어느 쪽으로 집중이 되었다기보다, 모든 것들이 제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오히려 상당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홍상현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 무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무대를 포함한 이전의 필모그래피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주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릴 때 가장 빛나는 재능이 발휘된다는 것인데, 역시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야마다 카나

한 몇 년 전부터 이 스타일이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섹슈얼리티를 말하는 것은 난센스라 생각하고, 더러는 ‘여성적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지는 않는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 몇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발표했지만, 역시 제가 보다 많은 분들로부터 평가를 받은 것은 힘겨운 삶 속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고 살아나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통해서 아니었나 싶어요.

무엇보다 저 자신, 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로부터 용기를 얻습니다. 그녀들은 갈등을 겪는 가운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기회를 쟁취하고 있거든요. 그것이 이상적이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현실적으로 사회적인 입장이라든가 주변의 반응을 의식해서 인내를 강요당하는 일도 많으니까요.

난폭한 보스 야마시타, 친절한 하기오, 운전수 류타, 세 남성와 카노가 돌보는 공간에서‘콜’을 기다리는 여성들.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처럼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스토리라인은 대기실이라는 공간적 제한이 무색할 만큼 쉴 새 없이 관객을 몰아친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난폭한 보스 야마시타, 친절한 하기오, 운전수 류타, 세 남성와 카노가 돌보는 공간에서 ‘콜’을 기다리는 여성들.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처럼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스토리라인은 대기실이라는 공간적 제한이 무색할 만큼 쉴 새 없이 관객을 몰아친다. 사진제공: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홍상현

<인생: 무제>에는 원작이 있습니다. 2013년 감독님의 극단에서 초연한 동명의 연극인데요. 놀라운 것은 사회의 저변에서 자신의 몸을 매개로 하는 생업을 가진 여성들에 대해 매순간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될 만큼 디테일이 뛰어나다는 겁니다. 무척 오랜 시간을 들여 취재를 하신 것 같은데요.

야마다 카나

6년 전 연극의 대본을 쓸 당시의 취재는 성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SNS 투고를 읽는 게 메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자기의 고민이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일기장이 아니라 익명으로 인터넷에 쓰는 여성들이 많았거든요. 관찰하는데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 때문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진심이, 어떤 책보다, 혹은 마음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취재하는 것보다 훨씬 명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성 노동에 종사했던 친구의 경험담이라든가, 제가 학생이었을 당시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 이른바 ‘데이트클럽’대기실의 분위기 등을 전체적인 묘사에 포함시켰습니다.

일단 이런 것들을 기본 얼개로 하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무책임한 작품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관련 업계의 상황, 그리고 남성 종사자들에 대한 리서치 등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고요.

 

홍상현

또 한 가지 <인생: 무제>에서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감독 특유의 캐릭터가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는 느낌입니다.

‘화(火)’라는 한 글자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대단히 정중하고, 낙천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늘 내면에 불, 다시 말해 분노, 혹은 보통사람의 레벨을 아득히 넘어서는 열정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요.

야마다 카나

‘불’이라고 표현해주시니 너무 기쁜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불’은 꺼진 뒤의 엄청난 외로움이나 시커먼 숯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허무 또한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까닭에 제가 볼 때 저는 기가 약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약하니 강한 것을 동경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면서 다양한 견지를 가늠할 수도 있겠지요. 이런 동(動)과 정(靜)이 늘 제 안에 더불어 존재하고 있는 걸 느껴요. 그 결과 <인생: 무제>에서도 격렬한 감정의 부대낌이나 마음이 시릴 만큼의 외로움, 무의미한 쓴웃음 등을 담은 다양한 장면을 그려낼 수 있었지 않나 합니다.

「인생: 무제」의 제작과정에서 야마다 카나 감독이 가장 만족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이토 사이리 배우가 캐스팅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던 일. 그는 이를 기점으로 모든 좋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이토 사이리 배우의 연기는 이 말의 충분한 근거가 되어준다. (C)2019 TIFF
「인생: 무제」의 제작과정에서 야마다 카나 감독이 가장 만족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이토 사이리 배우가 캐스팅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주었던 일. 그는 이를 기점으로 모든 좋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이토 사이리 배우의 연기는 이 말의 충분한 근거가 되어준다. (C)2019 TIFF

홍상현

앞에서도 이와 관련한 언급을 해주셨는데요, 예컨대 악전고투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자 작품의 화자인 카노, 싱글벙글 웃고 있지만 실은 가장 큰 분노와 상처를 안고 있는 마히루,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버려진 상처를 안고 있고 결국 그로인해 파국을 맞게 되는 아츠코 등 <인생: 무제>의 모든 인물들이 결국 야마다 카나라는 작가의 자아가 가진 모습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야마다 카나

제가 쓴 시나리오로 만든 작품인 이상은 어떤 등장인물에서도 제가 배어나오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이는 또한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건 배우들이니까요. 배우들이 자신의 신체나 경험을 통해 캐릭터를 성립시켜주고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제가 아닌 다름 사람이니까. 창작자들은 흔히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아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과 같은 DNA를 가진 다른 인간들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홍상현

다음은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인생: 무제>에는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야마다 영화”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른바 “야마다 테이크”라고 부를 수 있는 특유의 롱 테이크인데요.

이 영화에서는 마치 무대처럼 같은 장소에 모든 배우가 모여 연기를 하고, 카메라는 이것을 최대한 편집하지 않고 보여줍니다. 자칫 기술부족으로 보일 수도 있는 부담이 있는데, 오히려 관객이 캐스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낌이 들 만큼 성공적인 표현기법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야마다 카나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까지 배우가 대화하면서 이끌어가는 시나리오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라고요. 카메라워크가 심하면 대화에 몰두할 수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배우가 요동치는 순간을 놓쳐 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배우의 힘을 믿으면서 롱 테이크로 가자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또, 이건 촬영을 준비하면서 프로듀서인 우치다 에이지 감독과도 합의했던 내용인데요. 장편 데뷔작이고, 원작은 희곡이기도 하니까 영화적 발상을 뛰어넘는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촬영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퍼스트 컷도 카노역의 이토 사이리가 카메라를 노려보는 컷부터 시작하지요. 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 가장 먼저 대치하는 것이 관객이라는 점을 의식해 결정한 사안이었습니다.

부천국제판티스틱영화제의 또 다른 초청작 「시그널 100」과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얼굴을 보인 츠네마츠 유리 배우. 아역 출신인 그는 「인생: 무제」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인 마히루 역을 맡아, 이토 사이리 배우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C)2019 TIFF
부천국제판티스틱영화제의 또 다른 초청작 「시그널 100」과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얼굴을 보인 츠네마츠 유리 배우. 아역 출신인 그는 「인생: 무제」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인 마히루 역을 맡아, 이토 사이리 배우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C)2019 TIFF

홍상현

<인생: 무제>에는 누구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연기력의 캐스트가 모여 있습니다. 캐스팅과 관련해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계셨나요.

야마다 카나

우선, 모든 것이 카노 역의 이토 사이리 배우가 캐스팅은 흔쾌히 수락해 주신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제안에 꼭 응해줄 거라 믿고 있었어요. 기쁘게도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더니“이 역은 꼭 제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일단 이 일을 시작으로 우리 팀의 캐스팅은 정말 행복하게 진해되었어요.

그밖에 오디션과 제안이 병행되었는데 오디션의 경우에는 시나리오 상에 존재하는 캐릭터를 영화 속 인물로 재창조하는데 있어 영감을 줄 수 있을 만한 연기자들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중에는 연기 경험이 전부하신 분도 계셨는데요. 결과적으로 최고의 캐스팅을 진행한 것 같아 너무나 만족하고 있어요.

 

홍상현

<인생: 무제>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역시 배우라는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이해하고, 최고의 역량을 이끌어내는 감독님의 재능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라는 겁니다.

야마다 카나

제 디렉션은 우선 배우와의 공통 언어를 알아내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고방식이나 촬영에 임할 때의 멘털리티, 그밖에 다양한 내용을 피부감각이나 대화를 통해 알아차리는 거죠. 이는 무대연출이나 더러 제안을 받아 출연한 작품에서 직접 연기를 하면서 체득한 내용인데요. 상대를 관찰하고 감정을 움직일 때, 저는 소리의 음정이나 근육의 움직임 등 다양한 각도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합니다.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몸에 밴 방식이에요. 따라서 만난지 몇 시간 만에 상대방의 성격이나 과거의 환경을 알아맞히는 등, 본의 아니게 점성술사나 무슨 테라피스트 같은 역할을 하게 될 때가 있지요. (웃음)

촬영을 하면서도 이러한 관찰력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같은 감정이라도 무엇을 기점으로 그 감정에 도달했는지에 따라 표현 또한 변화하니 이를 배우와 명확하게 공유할 수 있었던 거죠.

 

홍상현

특히 주인공인 이토 사이리 배우의 경우 첫 장면의 강렬한 모노로그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젬스톤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야마다 카나

이토 사이리 배우는 대단히 섬세하고 온화한 사람이고, 카노를 연기하면서도 정말 최선을 다해주었습니다. 워낙 감각이 좋은 데다 시나리오를 숙독해서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여주더라고요. 디렉션이라기 보다 감정이나 이미지를 공유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거예요.

다만, 저 자신 현장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가지고 디렉션을 하는 까닭에 세세한 것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는 편입니다. 머리로 생각한다기보다 배우의 몸에 제가 호흡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을 테고요. 물론 그렇게 촬영을 진행하다 마무리를 할 때는 두뇌를 풀가동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들이 많아지지만요. (웃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골감독으로도 유명한 우치다 에이지 감독(오른쪽)과 함께. 우치다 감독은 최근 쿠사나기 츠요시 배우가 트랜스젠더를 연기해 화제를 모은 「미드나잇 스완」으로 흥행감독에 등극했다. 야마다 카나 감독과는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에서 작가와 감도긍로 함께했던 사이. 제공: 야마다 카나 감독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단골감독으로도 유명한 우치다 에이지 감독(오른쪽)과 함께. 우치다 감독은 최근 쿠사나기 츠요시 배우가 트랜스젠더를 연기해 화제를 모은 「미드나잇 스완」으로 흥행감독에 등극했다. 야마다 카나 감독과는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에서 작가와 감도긍로 함께했던 사이. 제공: 야마다 카나 감독

“이제야 정말 영화감독으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 시도해보고 싶은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다양한 기획을 여러 사람의 프로듀서에게도 제안하는 중인데요. 아무쪼록 많은 것들이 현실화되었으면 좋겠어요.

처음 이 작품을 쓸 무렵의 저는‘여성’이라는 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성과 비교했을 때 힘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었죠. 게다가 저 자신 같은 여성들에 비해서도 외모나 스타일이 압도적으로 뒤진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인생: 무제>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제 분노를 맡겼던 겁니다. 여성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저로 살아가고 싶고, 나아가 그저 여성ㆍ남성으로 라벨링 되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의 인생을 확실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것이 이 작품의 타이틀에 담겨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어두운 면을 고발한다기보다 다양한 약자가 대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그린, 일종의 인간 찬가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여러분, 이번에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가지 못해 정말 아쉬웠어요. <인생: 무제>를 같이 보고, 여러분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부디 다시 만나 뵐 기회가 찾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간해서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특유의 맛깔 나는 화술에 매료되어 인터뷰이의 이야기가 좀 더 오래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필자의 모습을 발견했던 인터뷰를 끝내고 기사를 준비하는 동안, 야마다 감독은 또 하나의 ‘사건’을 일으켰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포함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판타지아영화제 등 총 4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인생: 무제>의 극장개봉(11월 13일)을 약 한달 정도 앞두고 있던 지난 10월 21일 첫 장편소설을 출판한 것.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인터뷰이는 영화 개봉 이벤트와 겸한 첫 소설 출판 관련 온오프 이벤트를 코로나 19 국면에도 아랑곳없이 전개 중이다. 자신의 SNS에 이 모든 내용을 끊임없이 안내하고, “정보과다로 죄송하다”며 사과까지 해 가면서.

하지만 부디 야마다 감독이 사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할 말이 많지만 그것이 늘 새롭고, 그로인해 활력을 얻는 사람들 또한 많으니까. 당연히 필자를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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