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을 '사소한 박테리아'로 남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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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을 '사소한 박테리아'로 남겨야 한다
  • 김만권
  • 승인 2020.03.27 11: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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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과거와 미래 사이] 악의 평범함과 사소함을 역설한 한나 아렌트와 칼 야스퍼스

2006년 독일이 이념과 사상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걸고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를 내세웠다. 아렌트의 탄생 100주년이었고, 독일이 그 백주년을 기념할 만큼 그는 당대의 중요한 철학자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스스로 철학자가 아니라 정치이론가로 불리길 바랐음에도 위대한 철학자로 남은 이유는 아렌트가 이 세계를 향해 던졌던 질문 때문이다. “20세기 새롭게 탄생한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왜 노동에 대한 숭상이 근대를 병들게 했는가?” “폭력이 아닌, 말로 하는 혁명은 가능한가?” 아렌트는 이 질문을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3부작에 담아내며 자신만의 독특한 진단과 해법을 제시했다.

이 질문과 함께 아렌트가 더 중요한 철학자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악이란 무엇인가?”, 20세기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했던 근본적 질문 때문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이란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왔음에도 20세기 이전까지는 악이 인간보다는 자연에 깃들어 있다고 여겨졌다.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느꼈던 무력함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런데 두 번의 세계 대전, 특히 2차 대전에서 자행된 나치의 만행 앞에 인간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에 깃든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20세기 대부분의 중요한 철학자들이 심각히 고민했던 이 질문에 아렌트는 독특한 두 개념, ‘악의 급진성’(radical evil)악의 평범성’(banal evil)으로 답하며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한나 아렌트 초상화. 출처: wikimedia
한나 아렌트 초상화. 출처: wikimedia

 

이 두 개념 중 지금 우리에게 훨씬 친숙한 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의 맨 마지막 구절에 아주 잠시 등장하고 있는 악의 평범성이다. 하지만 원래 아렌트는 악의 급진성에 훨씬 더 천착해 있었다. 악의 급진성은 아렌트를 세계적인 철학자로 만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렌트는 이곳에서 전체주의가 치밀한 계획 하에 인간의 자발성을 박탈하여 한낱 파블로프의 개로 전락시켜 버렸다고 비판한다. 아렌트에게 이런 전체주의가 행한 인간본성 자체를 바꾸어 놓는 치밀한 시도는 인류사에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일까?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급진적 악(radical evil)으로 규정하며 이렇게 쓴다.

 

절대악은 이기심, 탐욕, 시기, 적개심, 권력욕이나 비겁함과 같은 사악한 동기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로도 복수할 수 없고 사랑으로도 참을 수 없으며 우정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

 

이 급진성을 따라 악을 이해하면, (동어반복이겠지만) 악은 그 자체로 이해 불가한 것이며, 우리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아무리 분노해도 복수란 건 가능하지 않으며, 위대한 사랑조차 인내할 수 없고,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불가능성, 설명불가능성, 응징불가능성, 인내불가능성, 용서불가능성이란 다섯 가지 요소들이 급진적 악의 실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칸트 이후 거의 쓰이지 않았던 이 급진적 악이란 개념을 뽑아들며 이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악행들이 있다고 규정했다.

 

야스퍼스, 아렌트에게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하다

이렇듯 악을 급진적인 것으로 보는 아렌트의 이해는 전체주의의 기원이전에 확고히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는 스승인 칼 야스퍼스가 쓴 독일유죄의 문제(Die Schuldfrage, 1946)를 언급하는 가운데 나치가 저지른 악행들이 범죄라는 차원에서는 이해가 불가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악의 급진적 요소 중 이해불가능성이 이 언급에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19461019일 아렌트에게 보낸 편지에 야스퍼스는 이런 방식의 이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 보인다. 왜 그랬을까? 야스퍼스는 모든 범죄 차원을 넘어서는 죄가 있다면, 그 죄에 불가피하게 악마적 위대성(satanic greatness)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게 됨을 지적한다. 야스퍼스는 오히려 악행을 평범한 사소함’(prosaic triviality)으로 남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런 악행의 본질을 박테리아에 비유한다. 박테리아는 나라를 휩쓰는 전염병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그 본질은 한낱 박테리아에 불과한 것이다. 그 어떤 악행에도 일말의 위대성을 부여하지 마라! 나치를, 악행을 완전히 사소한 것(total banality)으로 남겨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1951년에 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자신의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악의 사소함'을 강조하며 어떤 위대성도 부여하지 말라고 역설한 칼 야스퍼스.
'악의 사소함'을 강조하며 어떤 위대성도 부여하지 말라고 역설한 칼 야스퍼스.

 

아렌트에게 이런 야스퍼스의 조언이 진지한 울림이 된 계기는 여러분 대다수가 알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이히만 재판이었다. 아렌트는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총괄했던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그 사소함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히만이란 인물은, 허풍선이에다, 자기 모순적이며, 무조건적 복종이란 관료적 미덕을 숭상하는데다, 자신이 독일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유죄를 덜어줄 수 있다는 망상에 찬 인물이었다. 아렌트에게 이 모든 것은 자기성찰의 기능이 마비된 탓이며, 그 성찰의 결과를 실행할 수 있는 용기의 결여에 있었다. 그 모든 악행의 기저에는 생각 없이 산다’(thoughtlessness), 사소함이 있었던 것이다.

 

n번방의 상투적인, 너무도 상투적인 인간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보며 악에 대해 이렇게 쓴다. “그들이 한 행위는 괴물과 같다. 그렇지만 그 행위를 한 자는 매우 일상적이며, 평범하다. 그들은 악마 같지도 괴물 같지도 않다.” 악마적 행위와 행위자 간의 비연계성, 단절을 이렇게 표현한다.

텔레그램에서 수많은 n번방 중 일부인 박사방을 운영한 자가 체포되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만큼의 공분을 사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용서할 수 없는악마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케 하는 증언이 나온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조용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열심히 이곳저곳 봉사하면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행위 사이에 있는 비연계성으로 인해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혹스러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당혹스러움은 그가 일상에서 보여준 평범함에 있을 것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보았던 행위와 행위자 간의 비연계성이 이 사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 비연계성이 더 당혹스러운 지점은 내 주변의 누군가가 이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부축이기 때문이다.

관련해 아렌트가 언급한 내용 중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아이히만이 판에 박힌 인간,’ 일종의 클리셰였다는 점이다. 아이히만은 공개처형 전에 자신이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 후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않는 자가 다시 만날 운명을 믿는 이 모순이 어디서 나올까? 더군다나 죽음 앞에서조차 그가 기껏 떠올릴 수 있었던 말이 어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라니, 아렌트에게 그는 클리셰였던 것이다. 박사방을 운영한 자도 그랬다. 그는 포토라인 앞에서 악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 어디 만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읊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어떤 말을 할까 나름 고민해서 내 뱉은 대사가 그랬던 것이다.

 

 

n번방의 박테리아들

n번방의 운영자는 포토라인 앞에서 피해 여성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세 남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자신을 악마라고 호칭했다. 왜 그랬을까? 추측일 뿐일지 모르지만, 모든 악마들은 종래에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특히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라면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상관이 없다. 그는 자신을 악마로 부름으로써, 유명인 세 남자를 호명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영향을 줄만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줌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까지 아렌트를 소환했지만, 정작 이 글을 쓰는 이가 주목하는 건 야스퍼스의 충고다. 악행을 범죄 이상의 것으로 취급하지 마라! 그들의 본질을 철저히 사소한 것들로 남겨라.’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의 힘은 악의 실체를 사소한 것들로 남기는 데 있다.

우리는 이들이 저지른 행위를 명백히 기록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자는,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자면, 무수한 박테리아 중 하나로 남겨야 한다. 이 일을 저지른 자가 본질상 박테리아 같은 존재라는 건 n번방 사건 이후 그 이용자들의 반응에서도 보인다. 한 때 영웅이었던 그는 회원들 사이에서 이미 폐기된 존재가 되었고, ‘그냥 죽어라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 방에 모였던 이들이 본질적으로 박테리아와 별 다름 없는 존재라는 건 그들의 또 다른 행태, 자신들이 기생할 또 다른 숙주가 될 SNS 공간을 찾아 옮겨 다니는 데서도 증명된다. 생물학적 박테리아가 생존을 위해 숙주를 옮긴다면, 이들은 가학적 유희를 위해 옮겨 다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사소한 박테리아들이 모여들면, 특히 인간에게 기생하지 않아야 할 박테리아들이 모여들면 전염병이 된다. 지금 현재 온 세계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렇다. 그리고 n번방의 박테리아들도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n번방의 박테리아들도 반드시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다. 한 악마의 가학적 유희에 가상화폐니 뭐니 온갖 수단을 동원해 가며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들이 없었다면 n번방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n번방을 타고 모여들어 전염병을 만드는 데 가담한 그들은 통제되어야 하고, 그들이 자행한 행위는 기록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는 철저하게 사소한 박테리아들 중 하나로 남겨져야 한다.

김만권   mankwon@gmail.com    최근글보기
경희대 학술연구교수다. 참여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김만권의 정치에 반하다』,『호모 저스티스』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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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준 2020-03-27 19:12:53
언론이 악을 기록하고 아카이빙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만 그것이 도리어 악에게 발언권을 넘겨주고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옮겨적고 그들을 우리들과 일상적으로 어울리는 이웃들었던 것 마냥 그들을 옹호할 수 있을 법한 서사를 부여하는 행위는 조금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조용하고 말이없고 평범한 대학생이고 학점이 좋았구 어쩌구라는 말은 그들을 결코 평범하게 만들거나 사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신비롭게 만들며 공동체 내부의 개인을 의심하게 할 뿐입니다. 생각해보자면 악의 위대성이라는 것은 판타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의 판타지가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이를 넘겨주지 않으려는 정부와 언론의 태도가 요구되는 바입니다. 언론이 그들을 '사소하게'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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