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해적? 신라구?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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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해적? 신라구? 그들은 누구인가
  • 김현경
  • 승인 2020.07.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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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의 역사체크] 일본측 사료에 보이는 신라해적의 존재에 대하여

20081213KBS1 <역사추적>에서는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를 방영하였다. 해당 방송을 예고하는 20081210일자 뉴시스 기사 <왜구뿐 아니다, 신라 해적 대마도 약탈>에 따르면, 869년에 규슈에서 조공품으로 바쳐지던 물자를 약탈하고 894년에 쓰시마섬을 습격했던 신라해적의 정체를 추적한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내용이었다. 2012911일자 뉴스메이커 기사 <신라해적은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에서는 신라해적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는데, 이 내용 역시 2008년의 <역사추적> 방송을 바탕으로 한 기사로 여겨진다.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와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는 한국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데 반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무력 행동을 취했다는 신라해적은 매우 생소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왜구에 대한 기록이 한국측 사료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신라해적도 일본측 사료에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신라해적은 이전부터 한일 양국의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익숙한 존재였다. 그렇지만 일반 시민들 중에도 신라해적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게 된 것은 이처럼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2008년 12월 13일에 방영된 KBS 역사추적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 화면
2008년 12월 13일에 방영된 KBS 역사추적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 화면

 

한편 신라구(新羅寇)’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왜구(倭寇)라는 말이 왜()의 도적[]이라는 뜻인 것처럼 신라라는 말에 도적 구() 자를 붙인 것이다. 예를 들면 2015<신동아>에 게재된 기사에서는 일본이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한 대규모 해적으로 신라구를 들고 있고,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신라구를 표제어로 선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

 

우리 역사에 해적은 없었을까. 신라 해적이 있었다. 우리 역사서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일본 역서서엔 신라구(新羅寇)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왜구(倭寇)라고 비하하듯, 일본 역사서에도 신라 해적에 도적 구’() 자를 붙였다.

 

이 말에 따르면 ‘신라구’도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말인 것처럼 생각될 소지가 있다. 이 기사에서는 일본 역사서 속 신라구의 사례로 위키백과를 인용하여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81112월에 신라인 약 110명이 5척의 배로 고지카시마(小近島)에 침공해 약 9명을 죽이고 100명을 사로잡았다. (*고지카시마는 오지카시마의 잘못. 이하 수정)

811126, 신라선 20여척이 시모아가타군(규슈)의 사츠우라 해안에 상륙했다. (*사츠우라는 사스우라의 잘못)

8133, 신라인 110명이 5척의 배를 타고 히젠노쿠니(규슈)의 오지카시마에 상륙해 주민들과 싸웠다. 101명을 포로로 삼았다는데, 조정은 신라인들을 심문하여 귀국을 바라는 자는 허락해주고 귀화를 바라는 자는 관례에 따라 처리했다.

8202, 도토우미스루가 두 나라로 옮겼던 신라인 700명이 반란을 일으켜, 주민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살랐다. 두 구니()에서 병사를 동원해 공격했지만 제압할 수가 할 수 없었다. 7개 나라에서 병사를 모아 토벌한 결과, 전원 항복했다.

 

그런데 이 인용문 자체로만 보면 신라인이라는 표현은 보여도 신라구라고 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면 각각의 사례에 해당하는 일본측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우선 ①②에 해당하는 기록은 <일본후기> 고닌 3(812) 정월 갑자조에 보이는데 여기에 인용된 쓰시마섬 측의 보고문에 따르면 新羅船’, 즉 신라 배가 사스우라(佐須浦)에 정박했다고 한다. <일본기략> 고닌 4(813) 3월 신미(18)조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사료를 보면 신라인일백십인(新羅一百十人)’, ‘신라인 일청 등(新羅人一淸等)’ 등과 같이 신라’, ‘신라인이라고만 표기되어 있고 신라구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기략> 고닌 11(820) 2월 병술(14)조에 보이는데, 여기서도 신라인칠백인반반(新羅人七百人反叛)’이라고 해서 신라인이라고만 되어 있다.

해당 인터넷 기사에서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기간인 828~846년에 일본 사서에서 신라구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고 하며 글을 맺고 있지만, 이후의 역사서에는 신라해적에 대한 기록이 다시 보인다. 여기서는 신라해적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869년 음력 522일 밤, 신라해적이 두 척의 배를 타고 하카타 항구로 와서 연공으로 바쳐지던 비단 등을 약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은 <일본삼대실록> 조간 11(869) 615일조에 보이는데, 여기에 인용된 지방 관청의 보고에는 신라해적(新羅海賊)이 배 두 척을 타고라고 적혀 있어 신라해적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보고를 받고 내려진 칙서가 <일본삼대실록> 같은해 72일조에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마침내 신라구도(新羅寇盜)로 하여금 틈을 타서 침략하게끔 하여라는 문장이 나온다. 구도(寇盜)란 도적을 뜻하는데 여기서 비로소 신라구와 비슷한 단어인 신라구도가 등장한다. 870년에 신들과 선조의 왕릉에 바쳐진 고문(告文) 중에 신라구적(新羅寇賊)’이라는 표현도 보인다. 하지만 신라구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893년에는 신라해적이 히젠 지방으로 쳐들어와 인가를 불태우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다. <일본기략> 간표 5(893) 522일조와 620일조를 비롯한 기사들에 따르면 이들은 신라적(新羅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해적의 습격은 이듬해인 894년에도 이어졌으며, 신라적이 쓰시마섬을 비롯한 변방 섬들을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부상략기>라는 역사서에도 이때의 신라해적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데, 간표 6(894) 95일 기사에는 신라적도(新羅賊徒)’, 즉 신라 도적 무리의 배 45척이 쓰시마에 도착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들은 기사 속에서 ()’ 또는 흉적(凶賊)’이라고 지칭되었다.

2008년 KBS 역사추적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 편 화면 캡처.
2008년 KBS 역사추적 '신라해적, 왜 대마도를 침공했나' 편 화면 캡처.

이로 보아 9세기 당시의 기록에는 신라해적’, ‘신라적’, ‘신라구도’, ‘신라적도라는 표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든 이든 이들이 일본 조정의 입장에서는 도적이었다는 것에 변함은 없다. 왜구에 대응되는 표현으로서 신라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일 수 있으나, ‘신라구가 사료용어 내지는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이었다고 보는 것은 올바른 이해는 아닐 것이다.

신라해적이 등장하게 된 계기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분석한 바 있다. 9세기에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부족이나 불안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해외를 떠돌게 된 신라인들 중 일부가 해적 행위를 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해적의 존재를 알게 된 현대 한국인들의 심경은 복잡한 듯하다. 블로그 포스팅에서는 신라해적에 의한 일본의 피해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우리 선조들이 해적 행위의 일방적인 피해자만은 아니었으며, ‘해적 조상이 있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지만, 최소한 역사책에서 신라 해적에 대한 내용도 공평하게 기술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왜구에 의한 피해만 부각되는 것은 균형잡힌 시각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해양경찰청 국민기자 블로그에서는 신라해적이 당-신라-일본을 오가는 무역선들을 약탈하거나 교역을 방해하고, 일본의 해안을 약탈하며 신라의 양민을 납치하여 노예무역을 행하였다고 지적하면서도 해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관점에서 볼 필요는 없습니다라며 우리 해양 활동의 일부분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신라해적은 딱히 신라의 입장을 대변한다거나 신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운 집단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신라해적은 일본 내 지방의 유력자들이나 일본 해적집단과 연대하여 침략을 일삼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인 해적단 중에는 당나라 사람도 들어 있는 등 구성원에 있어서도 다국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894년에 쓰시마를 습격한 신라해적에 대해서는 그 규모가 꽤 컸기 때문에 신라 해군이 왕의 명령을 받고출동하였다는 시각도 있는 듯하지만, 후백제의 견훤 세력과의 연관성을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9세기의 신라, , 일본에서는 많은 수의 유이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동아시아 각지에 출현하면서 해적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고, 서로 연계하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혼란에 몰아갔다. 자의 또는 타의에 의해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현상과 그러한 집단을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이처럼 신라해적에 대해서도 디아스포라의 관점을 적용하는 연구자들이 존재한다.

사실 신라적또는 신라해적이라는 말 자체도 그들을 경험하고 관찰한 일본 조정측의 시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일본은 신라해적의 습격과 약탈 사건을 계기로 삼아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상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도 신라와 일본 또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신라해적을 바라보기보다는 그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사회적 배경을 헤아리면서 침착하게 그 실체를 파악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이병로, 9세기 신라일본해적의 연대와 일본정부의 대응, 일본어문학69, 2015

정순일, 신라해적과 국가진호의 신불에 관한 연구, 역사학보226, 2015

鄭淳一, 九世紀來航新羅人日本列島, 勉誠出版, 2015

성해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해적, 퇴계학논총32, 2018

 

김현경   hyunk02.htp@gmail.com  최근글보기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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