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세와 17세의 로맨스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성장에 관한 얘기"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9.02.2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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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 나가이 아키라 감독

낯익은 역무원이 오랜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는 산골마을 간이역. 유쾌한 걸음걸이의 사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미소와 정성스런 식탁이 정겹다.

“아, 이 맛! 역시 엄마 손맛이 최고야!”

뭉클한 느낌의 BGM과 어우러져 불과 15초 만에 시청자의 시선을 붙드는 부엌의 미장센. 여기까지라면 영락없는 휴먼드라마다. 하지만 장르는 순식간에 코미디로 바뀐다. 편의점에서‘바로 그 메뉴’가 담긴 레토르트파우치를 집어드는 어머니의 시선이 아들과 마주치는 순간.

“어? 그... 그거... 엄마!”

느닷없는 추격전(?)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끝나버리는 이 재미난 CF의 연출자는 2016년,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부천초이스 장편 부문 초청 당시 두 회 차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지상파 방송에서까지 소개되었던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나가이 아키라 감독이다.

나가이 감독이 지난해 만든 ‘히트 CF’를 언급한 것은, 그를 소개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반전(Peripeteia)’이라는 키워드 때문이다. 잠시 웃음기를 거두고 서재에서 『시학(Peri poiētikēs)』을 꺼내 펼쳐보자. 드라마투르그(dramaturg)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대략 『수학의 정석』 정도에 해당할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에서, 이 용어는 ‘운명의 급전’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나가이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만들어내,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능력을 가진 연출자라는 설명일 뿐이니까.

간단하게 줄인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시놉시스는 사람들의 스테레오타입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필자도 당연히 그 중 하나였다. 세상 모든 관객이 원작을 보고 영화를 보는 과정을 거치지는 않으니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에게 ‘의문의 존재’가 하루치 연명의 대가로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한 가지씩 정하라고 말한다. 영락없는 호러물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객석에서 비명을 지르는 이는 없었다. 그 ‘섬뜩한 이야기’가, 나가이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모두에게 삶 속에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변모한 까닭이다.

그가 3년 만에 <갈증> 이후, 한국에도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고마츠 나나를 주연으로 기용해 화제를 모은 신작,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한 줄 요약’도 만만찮은 억측을 유발한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주인공들의 미세한 심리변화를 보여주되, 클로즈업을 남용하지 않는 균형 잡힌 연출로 관객의 피로감을 가중시키지 않는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 사용된 쇼트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성과로도 이어졌다. (C)2018映画「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製作委員会 ©2014 眉月じゅん/小学館

아킬레스건 부상을 입은 고교 육상부 에이스가 패밀리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점장의 상냥함에 반해서다. 마흔 다섯 살의 점장은 이혼경력이 있고, 전처와의 사이에 초등학생 아들을 두었다. 대학시절 소설가를 지망했던 이력에(심지어 실력을 겨루던 단짝 친구는 누적판매 100만 부의 베스트셀러 작가에) 보통 이상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도 휴일에는 습작을 하거나 도서관을 찾아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 그저 평범한(혹은 조금 빠듯한) 수준의 ‘재력’과 ‘전형적인 미중년’이 아닌 ‘외모’를 거슬려 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영화는 고사하고 기사조차 읽지 않은 채 성급하게, 멀게는 무려 25년 전 방영된 TBS 드라마 <고교교사>, 가깝게는 근 1년 전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떠올리지 말아 주십사 하는 것. 다음으로 섣부른 선입견을 뒤집는 ‘반전’ 능력이야말로 모처럼 할애된 이 지면에 소환된 인터뷰이의 가장 뛰어난 재능이라는 것.

홍상현:

좀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명문 미대를 나와 거대 광고영상제작사에서 엘리트 감독으로 성장했다. 코카콜라, 시세이도, 토요타에 산토리까지. 2004년 무렵부터 하루 한 시간 이상 TV를 시청한 사람 중에 당신이 만든 CF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칸 국제광고제 등 수상경력도 화려한 말 그대로 ‘톱클래스’다. (웃음) 그런데 돌연 2014년에 장편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매년 한 편씩 장편을 만들고 있고, 전작(<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까지 초청되었다. 단지 오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과다.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나가이 아키라:

말씀대로 저는 지금껏 수많은 CF를 만들어왔다. 저 스스로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 있을 정도로. 젊은 시절에는 CF를 통해 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는데 열심이었지만, 최근에는 다르다. CF에서는 클라이언트, 또는 에이전시가 만든 메시지를 얼마나 아름답게 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제 안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영화는 돈을 지불하고 시간을 내주신 관객들이 봐주심으로 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관객들께서 뭔가를 가지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셨으면 한다. 다소 거창하게 말하면 작품은 제 ‘철학서(philosophy book)’인 것이다.

 

홍상현:

유니콘처럼 보이는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감각에서 느껴지는 강한 ‘아우라(aura)’ 때문일까. 현장에서 무척 엄격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현장은 대단히 분위기가 좋기로 유명하다. 자기 PR같아서 쑥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리더십이 궁금하다.

나가이 아키라:

데뷔작 현장에서 저는 무척 위악적인 사람이었다. 프로듀서, 카메라맨, 조감독,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나빴고, 일부러 제 귀에 들리게 욕을 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고립되었던 거다. 이유는 분명 제가 감독의 자질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CF 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스태프 전원의 의견을 유연하게 들으려 했던 것이 도리어 일을 그르쳤다. 자기생각이 전혀 없는 감독으로 비쳐졌을 테지. 그쯤 되니 멋대로 일을 처리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스태프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누가 뭐라던 제 주장을 확고히 하면서, ‘제 의견을 따를 생각이 없으신 분은 그만두셔도 좋다’는 방향으로 저 스스로를 변화시켜 갔다. 해야 할 역할을 확실히 해주면 자연스레 스태프 분들도 따라와 주시는 것이다.

나가이 감독은 최근까지 유지하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 당시의 헤어스타일을 바꿨다. 무척 세련되게 보이는 한편, 조금은 수줍은 느낌으로 살짝 굳어진 표정을 보면, 3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CLUB A

홍상현:

일상에서 우리는 수없이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일에서도, 연애에서도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해야 비로소 안심감을 얻지.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바로 이 강박관념에 ‘노(No)’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자신의 플랜을 차곡차곡 달성하면서 대단히 용의주도한 인생을 살아왔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드는데.

나가이 아키라:

저는 결코 순탄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데뷔작 현장이나 흥행성적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로 애를 먹었고, 고등학교도, 말씀하신 미술대학도, 애초에 원한 곳이 아니었다. 스포츠를 하면서도, 밴드를 하면서도 번번이 좌절했다. CF의 세계로 들어가서도 일이 없어서 후배들에게 추월당했다. 하지만 인생이란 신기한 것이, 이런 수많은 좌절을 통해 지금의 제가 되었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캐릭터도 모두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좌절은 앞으로의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바이러스(virus)와 같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저도 영상의 세계로 들어와 몇 번이나 좌절했지만, ‘좋아한다’는 마음을 소중히 함으로써 지금껏 버텨낼 수 있었으니까.

 

홍상현:

슬슬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 되었다. (웃음) 지난해 가을 화제가 되었던 패밀리마트의 CF는 휴먼드라마로 시작해서 코미디로 마무리되는 반전으로 화제가 되었다. 필자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연령차 로맨스’를 꿈꾸면서 극장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실망하게 된다는 것. 아울러, 결코 ‘판타지’도 아니다. 그렇다면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떤 이야기인가?

나가이 아키라:

저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사전조사를 하셨나. 누가 보면 스토커인 줄 알겠어요! (홍상현ㆍ나가이 아키라, 한바탕 웃음)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이 공개되었을 당시, 일반의 분들께도, 또, 언론에게도 엄청나게 두드려 맞았다. ‘범죄 같은 연애를 미화한다’고. 하지만 그건 오해다. 이 영회의 입구에는 ‘로맨스’라는 키워드가 있을지 모르지만 출구에는 사람과 사람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연령차 로맨스’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성장영화인 것이다. 인간이란 생물학적 연령이 얼마이든 성장해가는 것이고, 1센티미터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오이즈미 료가 분한 곤도 마사미는 대학시절 소설가를 지망했던으며, 보통 이상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다. 현재도 휴일에는 습작을 하거나 도서관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지만 그의 이런 모습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다. 그저 한줄의 시놉시스만을 읽고, 확인한 적도 없는 디테일을 넘겨짚을 뿐. (C)2018映画「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製作委員会 ©2014 眉月じゅん/小学館

 

홍상현:

앞의 질문과도 이어지는 내용일지 모르겠지만,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인기절정의 스타를 캐스팅하고도 성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화적 재미’와 ‘대중성’을 확보해 성공을 거두었다. (‘야후!’영화판 평점 4.24점) 당신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나가이 아키라:

‘45세와 17세의 로맨스는 성립할 수 있나’ 같은 것을 묻고 싶었던 게 아니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로맨스도 존재하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다. 고마츠 나나와 오오이즈미 료라는 전혀 다른 세대의 팬을 가진 배우들을 캐스팅해 모든 세대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란 세계를 넘어선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니까.

 

홍상현:

이번 질문의 키워드는 ‘장르’와 ‘영화화’다. 당신의 특기는 영화와 다른 장르(소설이나 만화 등)의 원작을 영화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보다 업그레이드 된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에서는 당신의 이런 ‘특기’가 어떻게 발휘되었나.

나가이 아키라:

소설이나 영화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영상을 통해 해내는 일에 항상 마음을 쏟고 있다. 음악도 그렇지 않나. 그러나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은 이미 애니메이션까지 나와 있어서 실사영화를 만들기가 무척 어려웠다. 부끄럽지만 질문하신 부분과 관련해서 답변을 드리면, 예컨대 애니메이션의 촉촉한 음악을 정반대로 뒤집어 록(rock) 스타일로 바꾸고, 고마츠 나나의 ‘액션스타성’을 이끌어낸 것을 꼽을 수 있으려나. 그녀의 생동감은 오직 실사만의 매력에서 넘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상현:

패밀리 레스토랑과 집, 그리고 학교.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무대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조금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변화무쌍한 카메라워크에 심지어 영화의 모두에서 와이어 액션까지 등장시키는 시각적 연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애정을 가지고 촬영한 부분을 소개해 달라.

나가이 아키라:

마츠유키 준 선생이 그린 원작은 심리묘사가 대단히 훌륭했다. 거기에 영화적 스케일의 느낌을 더하고 싶어 육상경기와 패밀리레스토랑 내부에서의 촬영에 특히 신경을 썼다. 경기장 장면에는 많은 엑스트라를 투입하고. 곳곳에 CG를 썼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는 관객에게 현장감을 주기 위해 카메라가 백야드(backyard)를 넓게 돌아 홀(hall)로 들어가는 주인공을 따라가거나, 손님이 주문한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을 보여주는 장치를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입부의 등교장면에서 등장하는 와이어 액션도 육상에 대한 주인공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만화에서는 그저 몇 칸의 그림이었지만.

나가이 감독은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성과로 고마츠 나나의‘액션스타성’을 이끌어낸 것을 꼽았다. 실재로 이 영화는 도입부부터 그녀의 와이어액션을 보여주며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C)2018映画「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製作委員会 ©2014 眉月じゅん/小学館

홍상현: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두 주인공은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도, 동성으로부터도 이성으로부터도 거의 ‘안티’가 없는 배우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각자 자기 나름의 컬러는 확실하다. 어떻게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이끌어냈나.

나가이 아키라:

딱히 조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공기를 뿜어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연기자로서 대단히 존경하는 한편,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받았다. 고마츠 나나에 맞춰 오오이즈미 료가 연기의 열기를 억제하는가 하면, 역으로 오오이즈미 료에게 고무되어 고마츠 나나의 연기의 열기가 오르는 등, 애초부터 아주 좋은 관계였다. 두 사람이 매우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덕택에 캐스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원작 팬들도 막상 영화가 공개된 후에는 충분히 납득해주셨다. 그리고 오오이즈미 료의 유머로 인해 현장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리허설을 할 때도 스태프와 다른 연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더라. 주인공 두 사람이 따뜻한 관계로 비쳐진 데는 그의 공로가 크다.

 

홍상현:

광고계에서도 모델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파악해서 활용하는 감독으로써의 명성이 있었다. 디렉션을 할 때도 배우 자신보다 그를 더 잘 파악하고 코멘트를 한다는 것이 당신과 함께 작업한 이들의 중평이다.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에서는 어땠나?

나가이 아키라:

제가 영화 현장 경험 없이 CF 감독을 하다 갑자기 발탁된 까닭에 다른 감독들과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연기자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세세한 지시를 하는 감독’이라고들 한다. 제게 있어서는 평범한 일인데 오오이즈미 료는 힘들어 하더라. (웃음) 대사 한 마디도 바꾸지 말아달라고 했거든. 게다가 만화와 동일한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구까지 했었다. (웃음) 연기자란 외롭다고 생각한다. 좋은 연기를 하게 될지, 혹은 나쁜 연기를 하게 될지가 감독에게 달려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연기자에게 조금 무리한 요구를 한다. 달성했을 때 더욱 충실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해서다.

 

홍상현:

고마츠 나나가 처음 작품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떤 코멘트를 했고, 촬영이 이루어지는 동안 자신의 캐릭터를 어떻게 창조해갔는지 궁금하다.

나가이 아키라:

그녀와의 첫 만남은 크랭크인 2~3개월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스토리는 재미있지만, 주인공 캐릭터의 기분이 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주인공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만나기 전 고마츠 나나는 굉장히 쿨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모델 체형의 캐릭터라는 주인공을 꼭 닮은 이미지였는데, 실제의 그녀는 무척 밝고, 잘 웃으며 촬영의 중간 중간에도 노래하며 춤을 출 만큼 유쾌한 성격에, 밥을 너무 좋아해 다이어트가 지속되지 않는 건강한 여성이었다. (웃음) 아직은 동세대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즐거운 시기다 보니 오매불망 45세 중년의 상대에 대해 생각하는 주인공의 울적한 내면을 이해하기도 힘들었겠지. ‘아차’ 싶은 순간에 그녀의 상냥함이랄까, 밝은 성격이 나와 버리기 때문에 그 부분에 무척 유의해서 연출했다. 그녀로서는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아키라처럼 웃지 않는 배역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밖에 애슬리트(athlete)로 말하자면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에 해당하는 스타일이라 꾸준하면서도 성실하게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거기에 오오이즈미 요의 도움도 주인공에게 다가가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니 촬영 후반부에 가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여성 육상 선수를 전문적으로 담당해온 트레이너로부터 주법과 몸만들기를 철저하게 익힌 고마츠 나나는 경기장면에서 완벽한 에슬리트의 모습을 연기했다. (C)2018映画「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製作委員会 ©2014 眉月じゅん/小学館

홍상현:

감독으로서는 어떤 것을 요구했나?

나가이 아키라:

어쨌든 원작을 읽을 것. 그녀는 원래 만화를 읽지 않는 편이라, 거기 여러 가지 힌트가 숨겨져 있다고 말해주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어조도 고치도록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완벽한 육상선수이므로 복근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해낼 수 없었다. 워낙 밥을 좋아하는 친구라서. (웃음)

 

홍상현:

그런 전말이 있었나. (웃음) 하지만 <사랑은 비가 갠 뒤처럼>의 고마츠 나나는 완벽한 육상선수의 모습이다. 그밖에도 많은 것들을 열심히 준비한 모양이다.

나가이 아키라:

복근이야 어찌되었든, 여성 육상 선수를 전문적으로 트레이닝 해 오신 저명한 선생님의 지도로 주법(走法)과 몸만들기를 철저하게 배웠다. 촬영 때도 선생님이 모니터를 지켜보면서 주법을 세세하게 지도해주셨다. 가령 ‘이 테이크는 쓰지 마라. 조금 전 테이크가 낫다’ 하는 식으로.

 

홍상현:

‘나가이 영화’의 결말부에는 한 가지 일관된 경향이 있다. 영상과 대사,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사람들을 울린다는 거. (물론 여기에는 나도 포함된다) ‘전형성 ’같은 평론가의 단어가 아니라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는 것 같은 힘’이라 표현하고 싶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을 만들었을 때도 시사실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속출해 화제가 되었다)

나가이 아키라:

엔딩 크레디트는 그저 스태프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라스트 신이라고 생각한다. 제 사고방식이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마지막 컷은 엔딩곡으로 이어지는 인트로라고 생각하며 편집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게 끝인가?’하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관객들이 엔딩곡이 흐르는 순간 ‘끝’과 동시에 ‘시작’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컨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음악 연출은 완벽하지 않았나. 앞으로 제작할 작품에서는 조금 다른 접근 방식을 쓸 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연출을 추구해가고 싶다. <다이하드>같은 대단원도 좋아하는 까닭에.

먹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창천(蒼天)의 느낌 같은 성장영화 <사랑은 비 갠 뒤처럼>은 ‘밤이 새어 밝다; 넓고 훤하다’ 혹은 ‘시원하고 상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시원할 상(爽)’자를 떠올리게 한다. (C)2018映画「恋は雨上がりのように」製作委員会 ©2014 眉月じゅん/小学館

인터뷰의 말미에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없느냐고 묻자, 잠시 머뭇거리던 나가이 감독이 수줍게 운을 떼었다.

“저는, 데뷔가 늦다 보니 50이 되어서도 여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신인감독입니다.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만, 그만큼 많은 꿈도 가지고 있어요. 언젠가 이 순간을 웃으며 되돌아보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저 스스로에 대한 격려이기도 하겠네요. 부디 여러분께도 소중한 이야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문득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쉰을 앞두고 헤어스타일을 바꿨다는(그는 3년 전과 다르게 최근 앞머리를 세웠다) 그의 사진에서 왜 살짝 긴장감이 느껴졌는지. 2016년 7월 28일 오후 8시 30분. 부천시청 어울마당에서 무척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한국 관객과의 대화를 여전히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또한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럴 것으로 보이는 이, 올해 만으로 마흔 아홉이 되는 ‘소년’에게서, 문득 “영화를 좋아하길 잘했던 거 같아. 영화는 나에게 친구를 줬으니까”고 말하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의 ‘나’와, 늦은 밤 서재에서, 신현실주의 소설가처럼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너무나 경박하다”는 문장을 써내려가는 <사랑은 비 갠 뒤처럼>의 곤도 마사미가 느껴졌다. 본인이야 언제나처럼 “아, 아니에요”하며 손사래를 칠 테지만.

원고지 위에 만년필로 적어 넣는 느낌으로 ‘시원할 상(爽)’자를 타이핑하다 미소를 지었다. ‘밤이 새어 밝다; 넓고 훤하다’ 혹은 ‘시원하고 상쾌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이 글자에서. 사방을 뒤덮은 먹구름이 걷히는 순간, 찬란한 푸른빛을 드러내던 <사랑은 비 갠 뒤처럼>의 창천(蒼天)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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