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주 69시간 근무, 일제강점기 일본도 안 했다?

  • 기자명 송영훈 기자
  • 기사승인 2023.03.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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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원산총파업 도화선은 일본인 감독의 차별과 폭력
파업 요구 사항에, ‘최저임금’, ‘8시간 노동’ 포함돼

소셜미디어와 온라인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주 69시간은 일제(일제강점기 일본)도 생각 못 했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공유됐습니다. 최근 정부가 주 최대 69시간 연장근로가 가능하도록 제도 변경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심지어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주 65시간 근무 때문에 파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관련 사료와 문헌들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온라인커뮤니티 원본 이미지
온라인커뮤니티 원본 이미지

원본은 디시인사이드와 루리웹

‘원산총파업: 일제가 조선인 주 65시간 착취노동 시켜서 일어남’이라는 제목의 해당 게시물은 당시 시위장면으로 보이는 사진과 함께 “주 69시간은 일제도 생각 못한...”이라는 한 줄의 본문이 있습니다. 원본은 유명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월 21일 14시 46분에 게시됐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앞선 게시물도 있습니다. 역시 유명 커뮤니티인 루리웹에 지난 3월 7일 01시 43분에 게시된 ‘일제 시대 최대 규모의 조선인 총파업이 발생한 이유’라는 제목의 게시물입니다.

본문 첫 부분에 “원산 총파업 당시 조선인은 주 평균 65시간을 일하여 일본인보다 주 10시간 가량 더 일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을 하는 일본인에 비해 30%나 월급을 덜 받았음”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산총파업은 1929년 일어난 대규모 파업

‘원산총파업’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당시로는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습니다. 영국계 기업인 문평 라이징선 제유회사에서 시작돼 원산 지역 노동자 대부분이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의 교과서 용어 해설은 ‘원산총파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원산 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 회사 제유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조선인 차별이 심했던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자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노동자들의 강한 저항에 회사 측은 폭행 감독 축출, 파업 중 임금 4할 지급 및 새로운 임금 협상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록 회사 측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929년 1월 13일 문평 제유 공장 노동조합의 보고를 받은 연합회는 최저 임금제 확립, 8시간 노동제 실시, 감독관 파면, 단체 계약권 확립 등을 요구하며 부분 총파업을 선언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9년 01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의 ‘원산총파업’ 항목 서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이었다. 당시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있었는데, 그 지배인과 주요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조선인 노동자들을 민족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타마(兒玉)라는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는데, 1928년 9월 초 또 다시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정책주간지 K-공감에서도 관련 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김정인 춘천교육대 교수가 쓴 ‘3·1운동 이후 노조 봇물원산 총파업이 ‘백미’’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원산총파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원산 교외의 라이징 선 석유회사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는 이에 굴복해 3개월 후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3개월의 약속 기간 동안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 반면 회사 측은 책임을 회피하며 3개월을 허비했다.

세 곳의 역사관련 공공기관이 ‘원산총파업’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원산총파업은 차별과 폭력행위를 한 일본인 감독 때문에 촉발되었으며, 최저임금제 확립, 단체계약권 체결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입니다.

 

'주65시간이 원인' 확인 어렵지만 8시간 근무 요구

‘주 65시간 근무’가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언급은 찾을 수 없지만, ‘8시간 노동제 실시’ 요구가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파업 당시 상황을 따져보면 그 배경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열악하고 차별적인 근로조건과 대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하였고, 노동시간 역시 12시간 이상 근무하는 노동자가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일본인 관리자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멸시했고 폭언과 폭력이 빈번했지만, 일본 당국은 아무런 제도적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게시물에서 언급한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 주 65시간 근무는 대체로 사실입니다.

2021년 발행된 ‘일제시대의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의 성격’ 논문에 따르면, 1920년대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보통 하루 12시간을 초과했는데, 노동시간이 긴 방직 부분에서 일본인은 12시간 노동시간이 0.4%를 차지하는 것에 비해 조선인은 82.2%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전 산업을 기준으로 하면 일본인의 경우 12시간 이상 노동이 0.3%였는데 조선인은 46.9%에 달했습니다. 또, 평균임금을 비교해 보면, 1929년 기준 일본인 노동자는 하루 1원16전인데 비해 조선인은 58전이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2배 이상이었습니다.

2007년 발간된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내의 쟁의행위와 재일한국인 쟁의행위 비교’에서도 당시 근로시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0년 당시 일본인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8시간미만이 1.4%, 8시간에서 10시간 사이가 45.3% 10시간에서 12시간 사이가 43.6%, 12시간 이상은 0.3%인데 비하여, 한국 근로자들은 1931년 말 현재 8시간미만이 0.8%, 8시간에서 10시간 사이가 28.7%, 10시간에서 12시간 사이가 11.9%, 12시간 이상이 46.9%, 일정하지 않은 경우가 0.3%로 나타나고 있다.

일요일 휴무와 함께 토요일 오전 근무가 주로 시행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는 대체로 한 주에 평균 65시간 정도 근무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원산총파업은 일제가 조선인 주 65시간 착취노동 시켜서 일어났다, 일제도 주 69시간 근무는 생각 못 했다’는 온라인 주장의 직접적인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과 파업 요구조건 등을 감안하면 일정 부분 개연성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를 감안해 '절반의 사실'로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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