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모순'이 환단고기 '위작'을 입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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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모순'이 환단고기 '위작'을 입증하다
  • 이문영
  • 승인 2018.11.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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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의 역사 팩트체크] 천부경 발견 변천사와 위조 가능성

단군의 가르침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천부경(天符經)>이라는 글이 있다. 81자로 만들어져 있는데 우주의 진리를 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천부경>에 대한 이야기에는 너무나 많은 거품이 끼어 있어서 그 실체를 추적하기도 쉽지 않다. 여기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에 따라서 <천부경>의 비밀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천부경>이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단군교 교주 정훈모의 <단군교종령>이라는 첩(帖:종이를 접어놓은 것)이다. 1913년에 쓰인 것이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부경과 각사의 진리를 단전에 양정수련하야 심리에 도력을 득하야 감령성을 통한 교인에게는 대종사 특별히 신전에 고유하고 영고장을 수여하야 포증함.

 

천부경이 어떤 것인지는 나오지 않고 그 이름만 전하는 것인데 종교 수련의 기법처럼 적혀 있다. 단군교와 정훈모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천부경' 전문은 1920년에 간행된 <정신철학통편>에 처음 실렸다

천부경 전문 1920년 <정신철학통편>에 첫 등장

<천부경>의 전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에서였다. 이 책은 1920년 2월 7일 중국북경정신철학사에서 간행되었다. 지은이 전병훈은 고종 때 중추원의관을 지낸 관리 출신으로 190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도교에 입문하여 수련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에 <천부경> 전문과 그 내력이 실렸다. 이것이 최초로 <천부경>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 이전에도 ‘천부보전(天符寶篆)’이라는 말이 정조 때 문헌이라는 <문헌보불>에 실려있으나 이것이 <천부경>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일반적으로 유사역사학에서는 말이 조금만 비슷해도 같은 것이라고 우기는 경향이 너무 심하다. 심지어 해당 내용은 “천부보전이 비록 사실적인 물증이 없으나”라고 밝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다고 못 박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바로 이 말에 나오는 전(篆ㆍ한자 고대 서체 중 하나)이라는 말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에는 ‘동한신성단군천부경(東韓神聖檀君天符經)’이라는 장에서 <천부경>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동국의 현인 선진(仙眞) 최치원이 말하기를, 단군의 천부경 81자는 신지의 전문(篆文)이다. 옛 비에서 발견되었다. 그 문자를 해독하고 삼가 백산에 새겨넣었다. 살피건대 최공은 당나라 진사 출신으로 삼한으로 돌아와 신선이 되었다. 이 경문이 작년 정사년(1917년)에서야 비로소 한국 서쪽 영변 백산에서 나왔는데, 계연수라는 한 도인이 있어 약초를 캐러 백산에 들어갔다가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석벽에서 이 문자를 발견하고 베꼈다고 한다.

 

이어서 전병훈은 막 책을 내려고 하던 차에 <천부경>을 유학자 윤효정에게서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위의 말로부터 여러가지를 알 수 있다. <천부경>이 묘향산(여기 나오는 백산은 영변이라는 지명으로 알 수 있듯이 백두산이 아니고 묘향산이다) 석벽에 새겨져 있다는 주장을 주목하자. 물론 이런 글이 새겨진 석벽은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글을 묘향산에 새긴 사람은 최치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신지의 전문(篆文)을 보고 그것을 풀어냈다고 하는 것은 ‘천부보전’과 같은 글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천부경>을 전병훈에게 전해주었다고 하는 윤효정은 애국독립지사이다.

1921년에 애류 권덕규가 <계명>이라는 잡지에 ‘단군천부경해’라는 글을 두 페이지에 실어서 <천부경>을 풀어놓았다. 이어 1923년에는 이규준, 1924년에는 김택영, 1925년에는 김용기(대종교인), 1926년에는 최국술, 1930년에는 이용태, 1934년에는 이시영(대종교인), 1937년에는 김영의 등이 <천부경> 해설을 썼다. 이 중 김영의는 명교학원의 강사로 있었는데, 이 명교학원 1회 졸업생이 바로 <환단고기>를 내놓은 이유립이다. 명교학원은 안순환이 세운 친일 유교단체인 조선유교회에서 세운 녹동서원에 부속된 학교였다. 그리고 안순환은 단군교의 후원자로 녹동서원에는 단군교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단군교는 원래 나철이 세웠던 민족종교다. 나철은 훗날 단군교 안에 친일파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고 대종교로 종교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때 교내의 거물이었던 정훈모와 충돌했다. 정훈모는 단군이라는 이름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해서 결국 교가 둘로 갈라졌는데, 정훈모는 그후 친일인사인 안순환과 손을 잡게 된 것이다.

계연수가 어떻게 <천부경>을 발견했는지 적어놓은 <계연수기서>는 1917년에 쓰여졌다.

묘향산에 '천부경' 석각 존재하지 않아

단군교의 교주 정훈모는 1921년 11월에 단군교 기관지 <단탁> 창간호를 냈다. 이 책에 계연수가 <천부경>을 어떻게 발견했고 그것을 왜 단군교에 보내는지에 대한 사연이 ‘계연수기서(寄書)’라고 해서 실렸다. 계연수기서는 1917년 1월 10일에 쓰여졌다. <천부경>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제가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동방개황지조 단군은 신인(神人)이시라. 천부삼인(印)을 지니시고 하늘에서 내려와 덕화를 크게 행하기를 사천여년이라.

 

환웅도 아니고 단군이 천부인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시점이면 이미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발간한 뒤다. 이유립의 주장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1911년에 발간되었다. 이런 책을 발간한 사람이 할 말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이뿐이 아니다. 이유립은 1979년에 쓴 ‘천부경해설’(<대배달민족사> 3권)에서 계연수는 이미 1898년에 <단군세기>, <태백일사>를 간행했고 <태백일사>안에 들어있던 <천부경>을 새로 뽑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까지 주장했다. 물론 그렇게 계연수가 썼다는 이 책들과 이 책에서 뽑아서 만들었다는 <천부경부전(天符經附箋)>은 불타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계연수가 썼다는 <천부경요해>는 버젓이 남아서 <대배달민족사> 3권에 수록해 놓고 있다.

다시 ‘계연수기서’로 돌아가자. <천부경> 발견 상황을 이 편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제가 마음에 새기고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더니 성품을 길러 공이 되기를 바라며 약초를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아 명산을 유람하기를 십여 년을 하던 중에 작년(1916년) 가을에 태백산에 들어가 길도 끊기고 인적도 없는 곳에 도달하여 계곡 시내 위 석벽에 옛날에 새긴 글 같은 것이 있어 손으로 이끼를 더듬어 벗기니 글자의 획이 분명하여 이것이 바로 <천부경>이라 두 눈이 홀연히 밝아져 무릎 꿇어 절하고 삼가 읽어보니 한편으로는 단군천조의 보경(寶經)이라 기쁘고, 또 한편으로는 고운 선생의 기이한 흔적이라 기뻤습니다.

 

계연수는 일단 그곳을 표시하고 돌아가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쉽게 찾지 못해서 사흘을 헤매고 드디어 9월 9일에 다시 <천부경> 석각을 발견해서 탁본을 했다. 한 본을 탁본해서 돌아와 살펴보니 자획이 모호한 것이 있어서 다시 한 번 탁본하고자 했으나 구름과 안개로 인해 그러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더 이상 해독이 되지 않으니 단군교당에 탁본을 바친다고 했다.

<정신철학통편>에서 전하는 발견 내력과 유사하지만 훨씬 자세한 정황이 적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교에 실제로 이런 글이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묘향산에는 이런 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석각이 있는데 한 부밖에 복사하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수없이 <천부경>에 대한 해설서가 나오는 와중에 아무도 그 석각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정훈모의 단군교는 대종교와 경쟁을 해야 하는 입장이어서 대종교가 가진 경전보다 신성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것을 1913년에 생각해낸 ‘천부경’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하여 <천부경>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런데 <천부경>은 뜻밖의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고서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것저것 다 집어넣은 <환단고기>에서 <천부경>이 이미 1911년에 소개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연수가 해석을 하지 못해 단군교에 <천부경>을 보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아버린다. 더구나 이유립은 아예 계연수가 이미 1898년에 <천부경부전>을, 1899년에는 <천부경요해>를 썼다고 말해버렸다. 뿐만아니라 1914년에는 이관집(이유립의 부친)이 <천부경직해>를 썼다고 주장했다. 이것들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커발한> 창간호

'환단고기' 쓴 이유립측의 천부경 발견 경위 계속 바뀌어

이유립의 문제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이유립은 단단학회라는 조직을 1960년대에 만들었다. 이 조직의 기관지로 <커발한>이라는 신문을 1965년부터 발행했다. 이유립의 글은 훗날 제자들에 의해서 <대배달민족사>라는 다섯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책에는 이유립이 <커발한> 시절에 쓴 글은 하나도 수록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커발한>은 이유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여러 유사역사학 측 글에서도 있었다는 사실 이상 언급되는 일이 없다. 이 실물을 보기도 쉽지 않다. 왜 이렇게 잊힌 글이 되고 만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커발한>에는 <환단고기> 날조의 모든 비밀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1979년에 완성된 <환단고기>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글들이 <커발한>에는 한가득 들어있다. 그러니 <커발한>이라는 흑역사는 완전히 묻어버려야만 했다.

<커발한> 창간호(1965.4.1)에는 이석영이 쓴 ‘천부경에 대한 나의 관견’이라는 글이 있다. 이석영은 이유립의 단단학회의 재원을 담당했던 단단학회 이사였다.

이 글에 <천부경>의 내력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있다.

이 천부경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일즉 태백산 석굴에 각치(刻置)하였던 것이나 세인이 오랫동안 구지부득(求之不得)이라가 단기 4250년(1917년)에 와서 운초거사 계연수와 국은 이태집 두 분이 영변 묘향산에 들어가 영약을 캐려다니다가 우연히 심학절벽에 유각(留刻)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천부경 81자를 각기 사출(寫出)하여 운초는 단군교 본부로 보내고 국은은 단학회로 보내여 비로소 세상에 다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단학회는 단단학회의 전신이다. 계연수가 <천부경>을 발견한 연도가 1917년이라고 되어 있어서 틀렸다. 이때 단단학회 측은 계연수가 <천부경>을 발견한 때를 언제라고 했는지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편지를 보낸 때가 1917년이기 때문에 석벽에 새겨진 글자도 1917년에 발견한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혼자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단학회 인물을 집어넣어서 자신들의 공을 윤색하고자 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천부경>에 대해서 <커발한> 35호(1973.5.1)에서는 새로운 주장이 나온다. 단단학회 부회장 조영주가 쓴 글이다.

신시개천 5814년(1917년) 정월 10일 운초 계연수 선생님이 이 <천부경> 81자를 <태백일사>의 속에 들어있는 것을 뽑아내여 평안도 묘향산(태백산) 돌벽에 새기므로 해서 일부에서는 신라 최치원님이 직접 새긴 묘향산의 천부경을 처음 발견했다고 떠들썩하였으나 실은 최치원님이 그때의 발해국 안에 들어온 기록은 없고 또 들어올 수도 없는 일이나 윤효정이 일부러 운초 선생의 서한을 고쳐 꾸며서 그 당시 지나에 교거해 있는 서우 전병훈님에게 보낸 것이 한 동기가 되어 그후 <단군부흥경략>을 엮을 때 운초 서한을 껴넣었으나 그 실은 운초의 친필 서한도 아니며 <해동인물지>에 보면 광무2년(무술)에 운초 선생이 직접 “<태백일사> <단군세기> 같은 책을 간행했다” 한 것으로 미루워 <천부경>의 전해온 사실을 알 수 있겠으며

 

석벽을 발견했던 사람이 석각을 한 사람으로 변했다. 함께 발견했던 이태집이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렸다. 위 글에 나오는 <해동인물지>는 1969년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이유립과 단단학회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커발한>의 인쇄소와 <해동인물지>의 발행사는 ‘회상사’라는 동일한 곳이다. 더구나 이 짧은 글에도 의도된 왜곡이 들어있으니 <해동인물지>에 실린 계연수의 저작물 이름은 <태백일사>가 아니라 <태백유사(太白遺史)>이다.

<천부경>의 내력에 대한 내용은 <커발한> 47호(1975.5.1)에서 확정된다. 여기 실린 ‘커발한 중흥소록’이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시개천 5813년(1916년) 병진 운초 대승정께서 천부경 81자를 묘향산 석벽에 각하시다.

 

연도가 1917년에서 1916년으로 보정되었다. 조작이란 이처럼 후대로 갈수록 정교해지는 법이다. 운초 대승정이란 계연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1965년에는 운초거사였던 사람이 1973년에는 선생님으로 1975년에는 대승정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는 왜 생긴 것인가? 1965년과 1975년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사이에는 <환단고기>가 있다. 1965년에는 없었던 <환단고기>가 1975년에는 생겨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유닛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환단고기>는 1911년에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들은 이미 그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천부경>이 담긴 <환단고기>의 <태백일사>는 이기(李沂)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계연수가 1898년에 <천부경부전>을, 1899년에는 <천부경요해>를 썼다고까지 주장해 놓은 상태다. 그런데 어찌 그가 천부경을 마음에 새기고 구하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미 해설서도 두 편이나 만들었는데 구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깜깜했을 것이다.

아직 <환단고기>를 위조하지 않았던 1965년에는 그저 <천부경> 발견의 공을 나눠먹는 정도의 조작이면 족했던 것인데, <환단고기>를 만들어놓고 나니 <천부경>의 발견이라는 것이 <환단고기>의 위서를 증명하는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마찬가지로 1965년에는 그저 <천부경> 발견자에 불과했던 계연수는 <커발한> 17호(1970.3.1)에서는 단학회 2대 회장이 되어 있었다.

<표> 천부경을 언급한 문헌들


<천부경>은 1920년 전병훈에 의해서 처음 소개되었는데, 단군교가 조작한 것이 전병훈에게 전달된 것인지 전병훈이 창작한 것을 보고 단군교가 계연수를 조작하여 내놓은 것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윤효정이 1919년말에 북경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조사가 되어야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병훈이 소개한 이후에 단군교는 계연수가 <천부경>을 보내왔다는 발표를 했다. 이후 이유립의 단단학회는 계연수와 단학회 회원 이태집이 함께 발견했다고 1965년에 주장했다. 이유립은 이후 <환단고기> 제작에 들어갔고 그런 결과 어떻게 하든지 간에 <천부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1916년에 발견되었다는 <천부경>을 그 이전의 책에 수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책의 편집자가 그 경전의 발견자가 되고 말았다.

결국 단단학회 측은 계연수가 단군교에 보낸 편지가 가짜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묘향산 석벽의 각석은 계연수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환단고기>에는 <천부경>의 내력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천부경>은 천제 환국에서 구전되어 전해진 글이다. 환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후에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녹도문으로 기록했더니 고운 최치원이 신지가 전자로 만든 옛 비석을 보고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이유립은 그동안 전해져 온 내용을 조금씩 손봤다. 최치원이 옛 비석을 보고 각석했다는 것을 첩을 만들어 세상에 전했다라고 고친 것이다. 이제 석벽도 계연수도 나오지 않는다. 논란의 여지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하지만 걸출한 천재 최치원이 옛 비석을 해독했다는 그럴듯한 설정은 그대로 살려두어 이용했다. 이렇게 고쳐진 내용이 1979년 <환단고기>에 수록되었다.

<환단고기>라는 책이 정말로 있어서 그것을 이유립이 보고 있었다면 <커발한>에는 <천부경>의 내력에 대해서 왔다갔다하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 있을 이유가 없다.

'환단고기'와 일치하지 않는 기관지 <커발한>의 숱한 내용들

<커발한>의 내용이 <환단고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그때문에 <커발한>은 금단의 자료로 공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1980년이 되기 전에는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이 생겨난 것이다. <환단고기>를 공개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엉뚱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눙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시도는 전혀 소용이 없는 시도다. <커발한>에 <환단고기> 내용을 연재까지 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1970년대에는 <자유>지에도 <환단고기> 내용을 여러차례 소개했다. 이렇게 되자 이유립의 제자들은 <환단고기>를 공개하지 말라는 말은 나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공개하지 말라고 했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환단고기>의 일부는 이미 <커발한>과 <자유>지 등에 공개되었고 그 내용은 지금 <환단고기>와 다르다. <환단고기>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위서인 것이다. 당장 <천부경> 문제 한가지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이 안에 들어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글 작성에는 장신, “유교청년 이유립과 <환단고기>”(역사문제연구39)와 이근철, “<천부경>과 정훈모의 단군교”(<근대 단군 운동의 재발견>)이 크게 참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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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편집자, 게임기획자 등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며 90년대부터 유사역사학에 대한 탐구를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통해서 발표해왔다. <만들어진 한국사>라는 유사역사학 연구서를 내놓고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시민강좌, 계간 역사비평 등을 통해 유사역사학 비판을 계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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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2019-04-25 21:12:37
게임 기획자답게 역사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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