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중앙일보가 그린 겨울전쟁의 모습, 사실일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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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중앙일보가 그린 겨울전쟁의 모습, 사실일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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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5.1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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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러시아 '역사의 수렁'에 빠지다…80여년前 '겨울전쟁' 평행이론> 기사 검증

지난 4월 2일 중앙일보는 "뉴스 ONESHOT 러시아 '역사의 수렁'에 빠지다…80여년前 '겨울전쟁' 평행이론"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림 1. 중앙일보 기사가 그린 겨울 전쟁의 모습
그림 1. 중앙일보 기사가 그린 겨울 전쟁의 모습

중앙일보의 주장을 검증을 위한 문항으로 치환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세를 정지시킨 이유는 그림 2의 A항에서 보듯 스키와 사격이 능한 핀란드군이 소련군 부대를 분리한 뒤 각개격파 하는 전술을 썼기 때문일까?

2. 만일 그렇다면 2월 1일 이후로는 어째서 그 이유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3. B항의 중앙일보 분석은 사실일까?

4. C항의 중앙일보 기사 서술은 사실일까?

5. D항의 전후 핀란드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중앙일보의 서술은 사실일까?

그런데 중앙일보 기사가 그린 겨울전쟁의 모습은 역사적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 겨울전쟁은 1939년과 1940년의 양상이 서로 다른데다 핀란드와 소련의 관계는 겨울전쟁만으로 결정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한데 뭉뚱그려 서술한 바람에 검증에 혼동을 줄 여지가 많아 부득이하게 글을 둘로 나눠야 했다. A항에 대한 검증은 1편 "[팩트체크] 중앙일보가 그린 겨울전쟁의 모습, 사실일까?"에서 즐겨주시고, 이번 글에서는 2번 항부터 이어질 검증을 통해 중앙일보가 뭉개버린 1940년 겨울전쟁의 진짜 모습과 그 이후 핀란드-소련 전쟁과 종전 후의 모습, 그리고 해당 주장이 나온 이유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만일 그렇다면 2월 1일 이후로는 어째서 그 이유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A. 1940년 핀란드 전장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림 2. 중앙일보 기사가 일체 언급하지 않던, 7번 구역 카렐리야 지협 전황도, 왼쪽은 11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소련군 공세를, 오른쪽은 숨마, 키비니에미, 켈리아, 타이팔레에서 소련군의 돌파시도를 보인다
그림 2. 중앙일보 기사가 일체 언급하지 않던, 7번 구역 카렐리야 지협 전황도, 왼쪽은 11월 30일부터 12월 15일까지의 소련군 공세를, 오른쪽은 숨마, 키비니에미, 켈리아, 타이팔레에서 소련군의 돌파시도를 보인다

그림 2는 1편의 그림 4로 11월 30일 공세를 시작한 소련 제7군은 핀란드군의 강력한 화력지원이 있을 핀란드만 지역의 잉크드 지역을 제외한 숨마부터 타이팔레로 이어지는 만네르헤임 라인을 공격했고, 12월 중순에 만네르헤임 라인에 도달하여 숨마, 키비니에미, 켈리아, 타이팔레에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공세를 중지했다.

그림 3. 1940년 2월 1일. 소련군 공세 재개(좌) 2월 11일. 소련군 주공 시작 (우)
그림 3. 1940년 2월 1일. 소련군 공세 재개(좌) 2월 11일. 소련군 주공 시작 (우)

그랬던 소련군이 1940년 1월 한 달을 보낸 뒤인 2월 1일부터 사단급 공세를 재개했고, 2월 11일에는 주 공세를 시작했다.

그림 4. 1940년 2월 15일. 만네르헤임선 돌파 후 비푸리를 향해 쇄도하는 소련 제7군 주공 (좌). 그리고 2월 28일 비푸리 근교에 도달한 소련군(우)
그림 4. 1940년 2월 15일. 만네르헤임선 돌파 후 비푸리를 향해 쇄도하는 소련 제7군 주공 (좌). 그리고 2월 28일 비푸리 근교에 도달한 소련군(우)

그런데 이번에는 12월과 달리 소련군이 2월 15일에 만네르헤임 라인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여 북진을 시작했고, 그 2주 뒤엔 비푸리에 도달했다.

그림 5. 1940년 3월 15일. 만네르헤임선 돌파 후 비푸리를 향해 쇄도하는 소련 제7군 주공 (좌). 그리고 2월 28일 비푸리 근교에 도달한 소련군
그림 5. 1940년 3월 15일. 만네르헤임선 돌파 후 비푸리를 향해 쇄도하는 소련 제7군 주공 (좌). 그리고 2월 28일 비푸리 근교에 도달한 소련군

3월이 되면 소련군은 카렐리야를 넘어 핀란드 본토까지 진입했으며 더 이상 소련군을 멈춰 세울 방법이 없던 핀란드는 3월 13일에 (이미 소련군에 점령당했고 핀란드의 남은 전력으론 되찾을 가능성도 없던) 영토 일부를 떼 주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물어주면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해가 넘어갔다지만 한 달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황이 이렇게 바뀌어버린 것일까?

B. 전황을 바꾼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라면 1939년 12월에 핀란드가 가진 카드를 다 썼고, 그 결과 소련 측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핀란드에겐 전황을 긍정적으로 바꿀 카드가 더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공세를 중지한 1939년 12월 23일 오전 6시 30분, 숨마 근처에서 제1, 제5, 제6, 제4사단을 투입, 방어를 시작한 소련군 제24, 제43소총병사단과 측면의 제138, 제123소총병사단 방어선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중앙일보 기사의 서술대로라면 여기서도 강인한 핀란드군이 소련군 일선의 4개 사단을 포위 섬멸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은 어느 한 곳에서도 이렇다 할 진격을 이뤄내지 못한 채 정오 무렵부터 소련군이 반격에 나서자 2시간 30분 뒤에 공세를 중지하고 후퇴했다. 이것이 신화와 프로파간다를 벗겨낸 1939년 12월 당시 핀란드군과 소련군의 진짜 실력이었으며, 2월에 시작될 소련군 공세의 결과를 말해주는 예언 같은 상황이기도 했다.

재편성에 나선 소련은 1940년 1월 7일, 북서전선군 사령부를 창설하고,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우크라이나전선군을 지휘하여 폴란드군의 저항을 뚫고 폴란드 동부의 요새지대를 돌파, 리비우에 입성한 세묜 티모셴코가 전선군 사령관이 되었다. 티모센코는 요새선을 돌파해본 경험이 있는 우크라이나전선군 당시의 예하 부대 다수를 북서전선군 휘하로 전속시키고, 제13군 사령부를 창설, 동부의 호수 구역에 대한 공격을 맡겼다. 카렐리야 공세를 총괄하던 메레츠코프는 유임되어 만네르헤임선 서부의 주공을 맡았다. 물론 군 사령부는 그대로였지만 휘하에는 폴란드에서 요새선을 돌파해본 경험이 있는 부대들이 다수 보충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이 일선에 내세운 장비 또한 요새전을 상정한 것들로 일신되었다.

그림 6.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T-28 탱크를 핀란드 전선에 투입했다
그림 6.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T-28 탱크를 핀란드 전선에 투입했다

가장 큰 변화는 T-28 탱크를 일선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영국 인디펜던스 탱크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탱크는 단포신 76mm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주포탑, 그리고 그 전방에는 T-37 계열 수륙양용탱크에서 사용하던 기관총탑 2개를 장착한 다포탑 탱크다. BT나 T-26에 비해 방어력도 우수했고 기동성은 BT 수준까진 아니었지만 타국의 전차들에 비해 딱히 밀리지 않았다. 76.2mm KT-28 mod. 1927 주포는 전차를 상대하기엔 명중률과 위력 모두에서 부적합했지만 기껏해야 1kg 남짓한 HE를 쏠 수 있는 T-26, BT의 45mm 포와 달리 76.2mm KT-28은 5kg 이상의 HE탄을 쏠 수 있었다. 또한 2개의 기관총탑은 접근하는 보병들을 견제하거나 제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전차전에는 신통치 않았으나 요새선과 보병이 주된 적인 겨울전쟁 당시의 핀란드에선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림 7.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이 투입한 T-26 기반의 화염방사탱크 OT-130
그림 7.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이 투입한 T-26 기반의 화염방사탱크 OT-130

벙커를 공격하는 데 가장 좋은 것은 화염방사기라는 이야기가 있듯 적절한 대전차화기가 없는 핀란드의 벙커를 상대하기 위해 T-26 탱크에 화염방사기를 장착한 OT-130을 투입했다.

그림 8.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152mm M1937 ML20(위)과 203mm M1931 B-4(아래) 같은 중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림 8.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152mm M1937 ML20(위)과 203mm M1931 B-4(아래) 같은 중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또한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152mm M1937 ML20(위)과 203mm M1931 B-4(아래)같은 중포를 전면에 내세웠다. 핀란드군이 가진 채 200문이 되지 않는 76mm K/02 야포와는 위력과 사거리에서 상대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40kg급 152mm HE포탄이나 100~146kg에 달하는 203mm 포탄이 직격하면 만네르헤임 라인의 강화벙커라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천시(天時)였다. 1940년 2월이 되면서 천시는 더 이상 핀란드만의 편을 들지 않게 되었다. 아래 표 1을 보자.

표 1. 모스크바와 헬싱키의 월별 평균 일조 시간 비교
표 1. 모스크바와 헬싱키의 월별 평균 일조 시간 비교

핀란드의 강력한 우군으로 자리했다 했던 12월과 1월의 일조량은 2월이 되면서 모스크바와 딱히 다를 게 없어진다. 이는 광량 역시 충분해졌다는 의미고 이제는 소련이 보다 적극적으로 폭격기를 투입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림 9.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항공폭격을 더욱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그림 9. 1940년 2월부터 소련군은 항공폭격을 더욱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C. 겨울전쟁의 전환점 제2차 숨마전투

1월 한 달 동안 공세 재개 준비를 마친 소련군은 그림 3에서 보듯 만네르헤임 라인 전면에 걸친 공세를 시작했다. 우선 항공기로 핀란드군 후방을 대규모 폭격, 핀란드군의 기동을 방해하고 동시에 104개 이상의 포대를 투입, 포탄 3천발로 숨마 인근을 강타했다. 이에 맞서야 할 핀란드군 포대는 16개뿐이고 질과 양 모두에서 압도적 열세라 대응하지 못했다.

이어 하티야라흐티(Hatjalahti)와 무올라(Muola) 호수 사이의 숨마 지구에서 항공기 500대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16개 사단이 공세에 나섰다. 핀란드군은 시작 단계의 전력 차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돌파는 막아냈지만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2월 6일에는 항공기 200대와 탱크 150대 지원 하에 3개 사단 규모의 공세가 있었으나 이 또한 핀란드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2월 7일 소련군은 무올라 지역에 작은 돌파구를 형성하고 숨마에도 두 차례 타격을 가했다. 다음 날, 소련군 2개 사단이 핀란드군을 공격, 핀란드군 전력을 깎아나갔다.

2월 11일, 겨울전쟁 사상 가장 강력한 포격에 이어 소련군의 진짜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 축선은 1939년 12월의 1차 공세와 달리 숨마 마을 정면이 아니라 동쪽으로 10km 떨어진 라흐데(Lähde)였고. ("1편"의 그림 10 바로 위 문단에서 언급했듯) 이 구역에는 강화된 벙커가 3개소뿐이었다.

탱크들의 지원 속에 제123소총병사단의 공세는 2월 12일에 작운 돌파구를 형성했고, 이어 제39탱크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무냐수오를 공격한 제136소총병사단은 돌파에 성공했다. 핀란드군은 이 돌파구를 막기 위해 예비대로 배치된 제5보병사단 전력을 투입했지만 돌파구가 많았기에 투입 가능한 전력은 각 2개 대대 뿐이었다. 그리고 보병 2개 대대로는 탱크와 포병, 그리고 항공 지원을 받는 강화된 2개 연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핀란드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만네르헤임 라인의 벙커들 다수가 파괴되거나 제압되었다. 핀란드군 주방어선이 붕괴된 것이다.

핀란드군 일부 부대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핀란드군 일부 부대는 완강히 저항을 계속했지만 이제 많은 핀란드 중대들의 전투력은 원래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어느 중대는 110명 중 86명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핀란드군은 14일부터 15일 사이의 밤 동안 숨마 부근의 진지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소련군은 15일 아침에 100대 이상의 탱크 지원 속에 2개 사단을 투입, 숨마의 텅 빈 진지를 일소, 점령했다. 그 날 오후, 만네르헤임은 방어중인 핀란드군에 후방 임시 방어선으로의 전면 퇴각을 명령했다. 이제 제7군의 돌파구는 폭 11~12km, 깊이 11km로 확대되었고, 이것이 겨울전쟁의 균형추를 소련 측으로 돌려놓은 제2차 숨마전투다. 이후 핀란드군은 소련의 진격을 단 한 번도 멈춰 세우지 못한 채 3월 13일 휴전을 맞았다.

 

3. B항의 중앙일보 분석은 사실일까?

1. 소련군에서 유능한 장교단은 대숙청으로 사라졌고, 말도 안 되는 상부의 지시만 기계적으로 따르는 지휘관만 남았다.

2. 게다가 압도적인 전력 차 때문에 전쟁이 일찍 끝날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보급품은 열흘 치도 준비하지 않았다.

1번 항은 대체로 대조국전쟁 초기 붉은 군대의 실패 원인을 스탈린의 대숙청 탓으로 돌린 데서 출발한다. 물론 대숙청으로 붉은 군대가 완전히 뒤집어졌던 것도, 대숙청의 시작이 된 미하일 니콜라이 투하쳅스키(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Тухаче́вский)를 따르던 장교들 상당수가 정규 군사교육을 받았던 장교였다는 것도, 그리고 종심이론과 기동전의 토대를 붉은 군대에 심으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만으로 그들이 정말로 유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이 대숙청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전선에 있었다면 대조국전쟁 초기에 붉은 군대의 대응이 조금은 더 나았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 모든 게 가지 않은 길이 빚어낸 가능성일 뿐이라는 점이다. 가령 그들이 일선에 있던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 당시 폴란드-소련 분쟁 당시인 1920년에 "비스와의 기적"을 빚어낸 당사자들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군사적 유능함이란 무엇을 생각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했느냐에, 그리고 결국 전쟁에서의 승패로 판가름되는 것이다. 더하여 대숙청이 문제라는 주장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 운동이 빚어낸 또 다른 정치적 프로파간다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1940년 이후의 겨울전쟁 양상은 "말도 안 되는 상부의 지시만 기계적으로 따르는 지휘관만 남았다."라는 중앙일보의 프로파간다 가득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뤄낼 수 없었던 변화이자 전과다.

다음으로 "압도적인 전력 차 때문에 전쟁이 일찍 끝날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보급품은 열흘 치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서술도 사실 패배를 덮기 위한 프로파간다, 혹은 핑계에 불과하다. 차량화 된 20세기 군대의 병참능력을 감안해볼 때 병참선이 확보되는 상황에선 일선부대의 보급품 준비량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배후의 소련 영토에 이들의 보급기지의 역할을 할 정도의 규모와 교통처리능력을 가진 배후 도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1편의 지리, 천시, 인사의 원인분석에서 핀란드군의 승리를 가져온 요인들이 그대로 작동하는 얘르비수오미에서 병참선을 구축하기가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보급물자를 얼마를 준비하던 그것을 일선부대에 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보급품의 준비여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해당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례가 겨울전쟁의 주공이자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거대한 배후 도시가 있던 카렐리야의 상황이다. 이 글 2번 항, 보다 정확히 B항의 첫 머리에서 언급했듯 보급상태가 문제였다면 1939년 12월 23일의 핀란드군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앙일보의 분석의 사실 여부는 잘 봐줘야 절반의 진실과 대체로 사실 아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판정한다.

 

4. C항의 중앙일보 기사 서술은 사실일까?

소련군은 나중에 심기일전하며 핀란드군에 소모전을 걸었다. 힘에 부친 핀란드는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당시 핀란드는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달리 외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토를 내줬지만, 소련에 흡수되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중앙일보 기사의 이 서술은 아래 세 가지 사실을 포함한다.

A. 소련군은 나중에 심기일전하며 핀란드군에 소모전을 걸었다.

B. 힘에 부친 핀란드는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C. 영토를 내줬지만, 소련에 흡수되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그런데 A항의 서술에 해당하는 상황은 하나가 아니다. 아마도 겨울전쟁이라는 제목에 비춰볼 때, 특히 A, B만을 보자면 기자님의 생각은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의 2월 공세를 의도하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것은 이 글 3번 항에서 다룬 "소련군에서 유능한 장교단은 대숙청으로 사라졌고, 말도 안 되는 상부의 지시만 기계적으로 따르는 지휘관만 남았다. 게다가 압도적인 전력 차 때문에 전쟁이 일찍 끝날 것이라 생각한 나머지 보급품은 열흘 치도 준비하지 않았다."라는 서술과 완전히 상충된다. 이 글 2번 항에서 다뤘지만 당시 붉은 군대가 예스맨만 남았던 군대였다면 단 한 달 만에 공세 부대의 편제를 재정비하고, 전투력을 일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스맨만 남은 군대가 심기일전이라는 것을 한다 한들 과연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군사나 전쟁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모전이라는 것이 겨울전쟁 당시 소련군의 2월 공세를 의미할 수 없는 이유는 C번 항에 있다. "(핀란드가) 소련에 흡수되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은 겨울전쟁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모스크바 협정은 전쟁에서 잃은 영토보다 평화로 잃은 영토가 더 크다며 핀란드 국민들을 분노케 했고, 독일이 소련에 침공하자 핀란드도 모스크바 조약을 깨고 영토를 되찾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이른바 계속전쟁이다. 당시 핀란드로서는 비푸리를 잃었다는 경제적 문제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비푸리가 붉은 군대의 군사행동에 배후도시가 되어 핀란드를 위협할 때, 인구와 국가의 인프라스트럭처가 집중된 국토 남부의 중심지대를 내주면서도 핀란드가 국가의 체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력의 중심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그림 10. 계속전쟁의 결과, 1941년 8월 31일 비푸리를 탈환한 핀란드군
그림 10. 계속전쟁의 결과, 1941년 8월 31일 비푸리를 탈환한 핀란드군

계속전쟁에서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잃은 영토에 더해 동부 카렐리야까지 점령한 뒤에야 비로소 전선을 유지했다 이는 핀란드가 후일의 정치적 구도를 생각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는 미, 영측의 프로파간다와 달리 당시 핀란드군이 강도 높은 공세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과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이렇게 되자 소련도 1943년~44년 겨울부터 전황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대조국전쟁에서 단련된 붉은 군대를 투입, 핀란드에 잃은 영토를 되찾겠다며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Vyborg–Petrozavodsk) 공세를 준비했다. 카렐리야 축선이 주공, 그리고 겨울전쟁의 전훈을 살려 라도가 호와 오네가 호 사이의 조공으로 구성된 2축 공세였다. (아래 그림 12 참조) 라도가 호와 오네가 호 사이의 동부 카렐리야 축선 공세는 제7군과 제32군으로 구성된 카렐리야 전선군이, 주공인 카렐리야 지협 축선 공세는 제21군, 제23군, 제59군으로 구성된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맡을 것이었다. 양 전선군의 총병력은 45만, 각종 포 1만 문, 탱크 800대, 항공기 1600대가 이들을 지원할 것이었다. (아래 그림 11 참조)

그림 11. 소련의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 개요도
그림 11. 소련의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 개요도

카렐리야 축선 공세의 핵심은 제21군으로 제30붉은기친위소총병군단을 시작으로 제97, 제108, 제109, 제110소총병군단과 다수의 직할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30붉은기친위소총병군단은 바그라치온에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공세의 중핵으로 차출해온 것으로 핀란드를 무릎 꿇린 뒤엔 다시 바그라치온 공세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림 12. 붉은기친위군단의 상징. IS-2 탱크도 카렐리야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 12. 붉은기친위군단의 상징. IS-2 탱크도 카렐리야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핀란드에는 이제 만네르헤임 요새선은 없었지만 계속전쟁기간 동안 독일의 지원과 소련제 노획장비들로 장비 상황이 크게 개선되어 있었다. 겨울전쟁 내내 복엽기 수준의 대전 전 기체들을 운용하며 악전고투하던 핀란드 공군도 계속전쟁의 대가로 메서슈미트 Bf109G 160여대와 융커스 Ju88A-4 24대, 도르니에 Do-17Z 15대 등 루프트바페의 일선 기체들이 공여되었다.

그림 13. 핀란드 공군 융커스 Ju88A-4(위) 메서슈미트 Bf109G-6(아래)
그림 13. 핀란드 공군 융커스 Ju88A-4(위) 메서슈미트 Bf109G-6(아래)

또한 핀란드 육군도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을 통해 스스로, 혹은 독일이 노획한 소련제 탱크들에 더해 독일에서 구입한 돌격포를 더한 기계화사단(Panssaridivisioona)을 창설하는 한편 자군 인원을 독일군에 경보병부대의 형태로 파견 독일군 휘하에서 소련군과 싸우며 현대전의 경험을 더했고 이들은 1944년 봄에 귀국, 방어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림 14. 핀란드 기계화사단. 실제로는 돌격포대대의 돌격포 40여대와
그림 14. 핀란드 기계화사단. 전차대대 정수 대부분은 T-26이 차지했기에 실제 전력은 돌격포대대의 돌격포 40여대와 T-28. T-34, KV로 구성된 중전차 중대(도합 15대 남짓)이었다

여기에 더해 독일은 노르망디에서 미영 연합군의 공세와 바그라치온 공세에 시달리던 와중에도 핀란드가 소련과의 전쟁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핀란드군에는 판저슈레케 5,000기와 판저파우스트 7,000기룰 지원하고, 쿨마이 비행단(Gefechtsverband Kuhlmey)과 해군육전대 제303 돌격포여단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림 15. 쿨마이 비행단 소속 기체들, 포케불프 Fw190A-6 (위), 포케불프 Fw190F-8 (중간), 융커스 Ju87D-5 Stuka(아래)
그림 15. 쿨마이 비행단 소속 기체들, 포케불프 Fw190A-6 (위), 포케불프 Fw190F-8 (중간), 융커스 Ju87D-5 Stuka(아래)

그림 15의 쿨마이 비행단은 II./JG 54(포케불프 Fw190A-6 29-62대), I./SG 5(포케불프 Fw190F-8 16대), I./SG3(융커스 Ju87D-5 Stuka 33대)의 전력에 정찰을 맡는 Teile NaGr 5(메서슈미트 Bf109G-8 8대)와 보급수송을 맡는 TGr.10(사보이아-마체타i SM.81 35대)로 구성된 임시편제 부대지만 지상목표물에 대한 전술타격, 특히 대전차능력이 우수한 비행대였다.

그림 16. 행군중인 제303돌격포여단(Sturmgeschütz-Brigade) 소속 돌격포
그림 16. 행군중인 제303돌격포여단(Sturmgeschütz-Brigade) 소속 돌격포

그림 16의 제303돌격포여단과 돌격포들은 독일군 기준에서는 특별할 것은 없는 부대고 장비였지만 핀란드 지형에서 방어전을 하기에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사이인 1944년 6월 10일에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는 그 동안의 전쟁에 단련된 붉은 군대의 공세역량과 전술능력이 허당이 아님을 입증하듯 매서웠다. 아니 상상 이상이었다.

그림 17. 사진은 2차 방어선인 VT 라인의 유개호. 핀란드의 예상을 뛰어넘는 붉은 군대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견뎌내지 못했다
그림 17. 사진은 2차 방어선인 VT 라인의 유개호. 핀란드의 예상을 뛰어넘는 붉은 군대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견뎌내지 못했다

핀란드군은 1차 방어선의 강화된 참호라면 이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폭격기 1,600대를 투입한 소련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과 이어진 포격 앞에 참호 자체가 완전히 박살나면서 일선의 핀란드군 부대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고 붕괴됐다. 1차 방어선은 당일에, 2차 방어선은 6월 15일에 돌파당했다. 압도적인 폭격, 포격에 이어 탱크 부대의 진군을 교묘하게 조합한 소련군의 공세에 핀란드군은 속수무책이었고 레닌그라드 전선군은 6월 19일 비푸리에 도착했다.

그림 18. 방어전투를 준비중인 핀란드군 병사들의 모습
그림 18. 방어전투를 준비중인 핀란드군 병사들의 모습

하지만 이 무렵부터 독일의 지원 전력이 도착, 전투에 참가하고 핀란드의 노력이 집중되서 탈리부터는 붉은 군대의 공세가 조금씩 둔화되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결국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7월 1일엔 탈리를 내주고 이한탈라로 후퇴해야 했다.

그림 19. 탈리-이한탈라 인근 어딘가에서 격파된 IS-2. 아래는 T-34/85
그림 19. 탈리-이한탈라 인근 어딘가에서 격파된 IS-2. 아래는 T-34/85

그러나 6월 20일 이후 붉은 군대의 손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더욱이 6월 22일 독일군 중부군집단을 목표로 하는 바그라치온 작전이 시작되면서 병참 부담까지 겹치자 지금까지는 기세좋게 공격에 나섰던 제21군도 7월 9일에는 공세를 중지하기에 이른다.

그림 20. 아야라파-부오살미를 돌파하려다 격파된 소련의 T-34/85 탱크
그림 20. 아야라파-부오살미를 돌파하려다 격파된 소련의 T-34/85 탱크

한편 소련 제23군의 공세도 아야라파-부오살미(Äyräpää-Vuosalmi) 선을 넘지 못하고 7월 17일에, 일로만치-라도가 카렐리야 지역의 조공 또한 얘르비수오미의 지형과 핀란드군이 잘 하던 방어전에서의 모티 전술이 결합하면서 더 이상의 공세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이 시기의 전투 중지는 바그라치온 작전의 영향으로 더 이상 공세역량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소련 측의 문제도 있었지만 독일의 지원으로 부족한 전력을 채운 상황에서 핀란드군의 방어전투 역량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덕분에 핀란드는 이무 대책 없이 소련의 처분만 기다리던 겨울전쟁 당시와 달리 이번에는 모스크바 조약을 지킬 것이라는 전제가 걸렸지만 9월 3일 종전협정을 맺었고 이것으로 비로소 핀란드는 소련에 흡수되거나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한 4년 실전에서 단련된 군대로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이라면 심기일전이란 표현을 쓰는 것에 딱히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작전은 겨울전쟁의 영역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는 딱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중앙일보의 서술은 기자님께서 겨울전쟁, 나아가 소련-핀란드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으시거나 기사에 언급하지 못함을 자복한 사례라 하겠다. 따라서 당연히 사실 아님으로 판정한다.

 

5. D항의 전후 핀란드의 정치적 선택에 대한 중앙일보의 서술은 사실일까?

그 대가로 핀란드는 중립국의 지위를 선택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소련(나중에 러시아)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 또 핀란드군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을 반대하는 방송ㆍ도서ㆍ영화를 자체 검열하는 등 소련의 눈치를 봤다. 이른바 ‘핀란드화(Finlandization)’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핀란드가 어째서 중립국의 길을 선택해야 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 핀란드는 1944년 소련군의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 당시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독일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 계속 싸우는 길을 택했다. 사실 독일의 이 지원이 없었다면, 그리고 바그라치온 작전이 없었거나 조기에 실패했다면 핀란드는 아마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소련군의 새로운 공세에 휘말려 나라를 잃었을 것이다. 이를 잘 알았기에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당시 핀란드 대통령인 라티 개인에게 책임을 한정하는 대신 핀란드가 독일의 지원을 받는 것을 양해했다.

반면,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의 처칠은 핀란드가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핀란드는 모스크바 협정에 더해 군사력까지 제한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핀란드는 식량 자급조차 어려운 가난한 나라가 되었음에도 영국의 반대와 방해로 경제 재건을 위한 최소한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핀란드는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더 웃기는 일은 국방력을 제한당한 핀란드가 해군함정을 구매하려 했을 때 대전기 호위함을 돈받고 팔아치운 나라가 영국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핀란드 정부가 국민들의 분노를 무릅쓰고 서방의 손을 잡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핀란드가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을 반대하는 방송ㆍ도서ㆍ영화를 자체 검열하는 식의 정치적 선택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더하야 핀란드가 소련과 친하게 지내는 길을 선택한 데엔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핀란드가 중립국이 되면서 동-서 양 진영 중계무역의 창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핀란드는 상당한 경화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런 상황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때 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종전 후 반세기가 지난 1970년대 초중반 중앙일보 기사처럼 핀란드의 선택을 조롱하는 정치적 견해가 나왔다. 그리고 그 일환인지 아래 그림 21의 이 책이 나왔다.

그림 41. 타임라이프 스칸디나비아 전쟁 편
그림 21. 타임라이프 스칸디나비아 전쟁 편

타임라이프 WWII 스칸디나비아 전쟁 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칸디나비아 전쟁을 테제로 다룬다. 그런데 이 책이 디룬 핀란드-소련 전쟁은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반세기전 핀란드인들이 소련의 침공에 맞서 톨바얘르비-애글래얘르비 전투와 수오무살미 전투의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는 서술만 남아있었다. 핀란드는 전통적으로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반세기 전에는 소련에 맞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전통까지 있었다. 그러니 그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 나토에 가입하여 소련의 핵과 군사적 위협을 나눠지라는 정치색 짙은 프로파간다적인 의미였다. 그리고 이것이 핀란드화라는 조롱의 진짜 의미였다.

만일 이것이 서방측이 핀란드에 새로운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와 군사 및 경제 지원을 할테니 서방 체계로 들어오라는 제안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가 동서 양 진영에 대한 원교원근의 길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라면 핀란드화는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도 없이 핀란드화 웅앵웅하는 조롱만 하고 있으면 그 어느 나라도 새로운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앞서 말했듯 핀란드는 가난한 나라였고, 동-서 양 진영 중계무역을 버리는 선택을 하면 당장 굶어죽을 처지에 있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한편 타임라이프는 그 명성에 걸맞게 한국에도 원서 발간 10년이 지나 한국어로 번역되어 풀렸고, 냉전이 극한으로 치닫던, 그리고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0년대의 실질적 섬나라, 한국은 무비판적으로 이 관점을 수용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0년이 흐른 1995년부터 각국의 기밀문서가 기밀에서 해제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모습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덕분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핀란드-소련 전쟁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는 기자를,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언론을 자처하는 정치색 넘쳐나는 미디어를 통해 아직도 반세기전에 나온 냉전의 프로파간다를 앵무새나 고장난 녹음기처럼 읊어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중앙일보의 이 기사 또한 사실이 아니라 판정할 수밖에 없다.

 

6. 맺으며

1편에서도 말했듯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놓고 겨울전쟁에 대한 공통점을 느꼈다는 중앙일보 기자님의 감상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기자님의 느낌이 아닌, "뉴스 ONESHOT 러시아 '역사의 수렁'에 빠지다…80여년前 '겨울전쟁' 평행이론" 기사의 겨울전쟁 서술은 역사적 사실의 영역과 매우 거리가 있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차후 유사 기사를 쓰실 때에는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 기사를 쓰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한 비사를 좀 더 밝히자면 우선 중앙일보 기사를 처음 본 것이 기사가 나온 직후인 4월 2일이 아니라 4월 16일에 다른 기사를 찾다가 보게 된 것이란 점이다. 더 빨리 쓰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디. 이것이 이번 팩트체크가 늦게 나온 결정적인 이유였다. 다음으로 이 글의 내용은 2019년 6월 19일에 뉴스톱이 승인된 "핀란드 스키부대는 정말 소련군 전차 포신에 총을 들이밀었나"와 그 글의 팩트체크 원문이던 6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 "[터치! 코리아] 대통령이 핀란드서 꼭 봐야 했던 것"이란 제목의 칼럼 때문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그 때는 이번에도 보다시피 제법 양이 많아 2편 이상으로 나눌 정도의 분량인데다, 핀란드 소련 전쟁이 딱히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뉴스톱의 구조를 잘 모르던 시절이라 몇 편에 걸친 글을 승인할 것 같지 않아 미뤄뒀던 글이었다. 하지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그 당시를, 그 상황을 소환하다 보니 투고할 기회가 생겨 이 글을 공개하게 되었다. 프로파간다가 아닌,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은 분들에 대한 좀 더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보형   nextop4u@naver.com    최근글보기
2차세계대전 이후 군사사와 병기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04~2005년 <국방일보> ‘전사 속 신무기’ 연재했다. 2010년 <보급전의 역사>, 2017년 <세계의 병기 대도해>, <조지 패튼 : 내가 아는 전쟁>을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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