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의 디자인 팩트체크]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 르 코르뷔지에 발언의 맥락
모던 디자인의 다양한 금언들이 있다. 예를 들어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Less is more(적을수록 많다)” 같은 명제가 대표적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었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시그램 빌딩으로 대변되는 극도로 단순한 사각박스형의 고층 건물을 퍼트린 주인공이다. 이런 건물을 볼 때 그의 “적을수록 많다”라는 말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나중에 포스트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로버트 벤투리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문장의 m자를 b자로 바꾸어 “Less is bore(적을수록 지루하다)”라며 재치 있게 반격했다.
또 다른 모던 건축의 대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논쟁적인 말을 많이 남겼다. 특히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House is a machine for living)”라는 명제가 그러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 말이 맞다. 인간의 심장이 펌프 기계라면 말이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또 마르셀 브로이어는 “집이 기계라고 해도, 벽에 기댔을 때 옷에 기름이 묻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롱했다. ”(허보윤, 최윤호가 번역한 <콘란과 베일리의 디자인 & 디자인> 중 부분 발췌)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말한 기계는 진짜 기계 같은 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 말이 들어간 전체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체 문장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는 수준 높은 선택에 따른 산물이다.
비행기가 주는 교훈은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깨닫게 하는 논리에 있다.
주택의 문제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다.
건축에서의 현재 관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거를 위한 표준은 존재한다.
기계류는 자체에 이미 선택을 요구하는 경제적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다.
이 글은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적인 저술인 <건축을 향하여> 중에서 ‘보지 못하는 눈’이라는 장의 두 번째 주제인 ‘비행기’의 시작을 알리는 지면에 실렸다. ‘보지 못하는 눈’은 대형 여객선, 비행기, 자동차 이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글을 쓰던 1920년대 초반 대형 여객선과 비행기, 자동차는 새로운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첨단 기계 기술에 의해 탄생한 것들이다.
특히 비행기는 그 전에 존재해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사물이다. 대형 여객선의 전신으로는 대형 범선이 있고, 자동차의 전신은 마차가 있다. 따라서 새로운 이동 수단은 그 전의 것을 모방할 수 있다. 하지만 비행기는? 도무지 참고할 자료가 없다. 인공물에 없고 자연의 새 정도가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된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기계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된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때 급속도로 발전한 비행기의 경우 디자인의 실패는 곧 죽음이므로 그 어떤 사물보다 대단히 합리적이고, 철저하기 기능적으로 디자인된다. 그렇다고 단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만 의지하지도 않는다. 상상력도 필요하다.
반면에 건물은 어떤가? 건물은 따를 만한 전례가 너무나 많이 널려 있다. 고대의 고전 양식, 중세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신고전주의 양식, 그 밖에도 세부로 들어가면 수많은 양식들이 있다. 그런 양식들 중 하나를 가져오면 된다. 이런 과정에서는 합리성이나 상상력보다 기존의 아카데믹한 규범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자동차가 도로를 누비고 산업 제품들이 쏟아지는 20세기에도 그 양식들은 어울리는가? 르 코르뷔지에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양식의 탄생을 건축가들에게 촉구했다. 그들에게 모범이 될만한 것은 바로 비행기였다.
“비행기가 수준 높은 선택의 사물”이라는 첫 문장의 사전 숙지 없이 마지막 문장인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말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전체 맥락을 살리면 그가 말하는 ‘기계’가 비행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동원되는 ‘인간의 합리성과 상상력’으로 탄생된 그 무엇을 말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의 집은 비행기라는 기계를 디자인하는 것처럼 문제점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산업 문명에 맞는 새로운 언어로, 동시에 합리적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수준 높은 선택의 산물인 것은 그것이 기계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단원 전체를 읽으면 더욱 그 의미가 분명하게 다가온다. 사실 “비행기가 수준 높은….”으로 시작되는 짧은 문단은 르 코르비지에가 시적으로 쓴 것이다.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면에 함축적으로 쓴 것이므로 비약이 심해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 장을 전부 읽게 되면 수긍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맥락을 제거한 뒤 문장 하나만으로는 그 뜻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문장 하나만 가져와 그 뜻을 오해하고 조롱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