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이문영의 유사역사학 체크] 사라지지 않는 '쇠말뚝 괴담'의 기원과 유형

  • 기사입력 2019.04.23 10:14
  • 최종수정 2024.03.03 22:54
  • 기자명 이문영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우리나라의 명산대천에 혈침, 즉 쇠말뚝을 박아서 지기(地氣)를 끊는 풍수 침략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산속 깊은 곳에 박힌 쇠말뚝을 찾아내고 제거하는 일들이 진행되었다.

쇠말뚝을 땅에다 박아서 인재의 맥을 끊을 수 있다는 말 자체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우주와 생명의 비밀을 과학이 헤쳐나가고 있는 21세기에, 지표면에 말뚝을 박아서 인간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발상을 진지하게 믿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 풍수 중에서도 용맥이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미신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라 매우 서글픈 일이라 하겠다.

흔히 일제가 이런 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그렇게 당시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에게 패배감을 주기 위해서 일제가 이런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패배감을 주기 위해서는 면전에서 그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너희를 이렇게 능욕하고 있다고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데, 일제는 쇠말뚝을 아무도 모르게 박았다. 우리가 너희 산천의 정기를 이렇게 끊었다고 자랑한 사례가 하나도 없다. 아무도 모르게 모욕감을 준다는 것이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일제 관리들이 풍수를 믿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저기에 혈침으로 쇠말뚝을 박으면 이 지역에 인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들이 이런 것을 믿었다는 증거는 있는가? 없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미신을 믿어서 그 때문에 패배의식에 사로잡혔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를 극심히 비하하는 말이 된다. 미신에 사로잡혀서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할 줄 몰랐다는 말인 것이다.

쇠말뚝 문제에 대한 가장 자세한 보도는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에 실린 김용삼 기자의 <김영삼 정부는 ‘풍수정권’인가?>이다. 아래 내용은 그 기사를 기본으로 해서 추가 조사한 내용들을 덧붙인 것이다.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 '김영상 정부는 풍수정권인가' 기사 표지

1984년 한 산악회에서 쇠말뚝 뽑기 운동 시작

쇠말뚝을 뽑고 다닌 민간단체가 있었다. 산악동호회에서 출발한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곳에서 1985년에 4월에 북한산 백운대의 쇠말뚝 27개를 뽑아서 15개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기사에 따라서는 16개로 나오기도 하지만 15개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이때부터 경제학 전공의 서길수 박사가 풍수 침략을 조사한다고 나섰다.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에서 뽑은 쇠말뚝은 일제강점기 때 박힌 것은 맞다. 그 사실은 조선에서 발행된 일본어신문인 『조선신문』 1927년 8월 20일자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운대등(白雲臺登)-도로 기부 모집>이라는 1단 기사에 내용이 나온다. 기사 내용은 백운대 등산로 보수에 750원이 필요해서 다섯 사람의 일본인이 기부에 나섰다는 것이며, 백운대는 북한산의 최고봉으로 경기 최고의 명소로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북한산성을 쌓은 바 있다는 등 역사적 사실을 말한 뒤에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으나 도로가 험준하여 등산에 위험이 있어서 도로를 보수하고 지도표, 등산안내판, 쇠로 만든 난간과 계단 등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1927년 8월 20일자 조선신문 '백운대등(白雲臺登)-도로 기부 모집'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어 1927년 10월 1일자에는 9월 25일에 보수가 완공되어 600명의 관광객이 방문하였으며, 이 명승지가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1927년 10월 1일자 조선신문. 백운대등산로 개통 소식이 담겨 있다. 출처: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1927년 11월 12일 『매일신보』에는 유지들의 힘으로 백운대 오르는 길에 쇠줄을 둘러놓아 아기네도 능히 오를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날부터 그 기념으로 백운대 화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내용 어디에도 풍수 침략의 흔적을 볼 수 없다. 이 일은 공공연히 벌어진 것이며, 백운대에서 바라보는 절경을 안전하게 감상하라고 기부를 받아서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1984년에 ‘오르내림 산우회’라는 등산모임에서 백운대에 박혀 있는 쇠말뚝을 보고는 일본인들이 박은 쇠말뚝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북한산 인근에 살던 82세 할머니의 말을 듣고 결심을 했다. 이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왜인들이 백운대에 올라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었다고 이야기했다. 16세에 시집을 왔다고 하니 1920년경이 되므로 연도가 맞지 않지만 이런 기억은 보통 왜곡되기 때문에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증언은 그저 일본인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실일 뿐이라는 게 문제다.

일본이 유화정책으로 백운대 공사를 시행했다는 것 자체는 서길수 교수도 인정하는 바이다. 쇠말뚝 제거를 하던 당시에 한국산악회 고문이었던 김정태는 백운대 정상의 쇠말뚝은 난간과 함께 방위측정용으로 세운 것으로 이런 일은 훗날 웃음거리가 될 수 있으므로 확실히 알고 난 뒤에 뽑아도 늦지 않다고 반대했다.

서길수 교수는 “일인들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백운대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놓고 방위표시 목적이라고 유포한 것이 확실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아무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다.

1993년 7월 4일 ‘우리를 생각하는 모임’의 구윤서 회장은 속리산 문장대에 쇠말뚝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곳을 방문했다. 구윤서는 문장대 아래의 감로천 부근에서 8개의 쇠말뚝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를 뽑아서 백운대 쇠말뚝과 비교해보고 일제가 꽂은 것이라 판단하여 9월 11일, 12일 양일에 걸쳐 쇠말뚝 제거 작업을 시행했다. 이때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재미있는 발언이 들어있다.

비지땀을 흘리며 쇠말뚝을 뽑아낸 한 회원은 “이 쇠말뚝들이 일제의 단혈철주라고 못박아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이 작업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박혀 있는 일제의 철주를 제거하고 민족혼을 회복하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쇠말뚝 제거해 민족혼 되찾자', 한겨레신문 1993년 9월 13일 기사

위 증언을 보면 작업을 한 사람조차도 일제가 박은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월간조선의 기사에서는 구윤서 회장이 그 쇠말뚝을 박은 사람의 증언을 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쇠말뚝은 감로천의 물을 길어서 팔던 김중배라는 사람이 감로천에 접근하기 쉽게 1958년 무렵에 박은 것이었다. 구윤서는 김중배가 “그 중 두 개는 일제가 박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고 첨언했다. 8개 중 2개는 일제 소행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용삼 기자는 송병구(70세)로부터 문장대 쇠말뚝은 해방 전에 본 적이 없고 6.25 이후에 여러 개가 박힌 것을 본 기억이 있다는 증언을 받았다. 송병구는 그 이야기를 다른 기자들에게도 했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일제의 쇠말뚝이라는 기사만 썼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민간단체는 백운대(15개)와 마산 무학산(1개), 속리산 문장대(8개), 북한산 노적봉(1개)에서 쇠말뚝을 제거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쇠말뚝 공포가 시민사회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1994년 6월에 한국이동통신이 금오산 정상에 건립하던 대형 중계탑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금오산 정상에 중계탑이 세워지면 혈맥이 끊긴다고 시민단체들이 반대에 나서고 여기에 박세직 국회의원과 지역유지들까지 참여하여 진정서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철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당시 연합뉴스는 철거가 결정되었다고 오보를 내기도 했다.

 

정권 차원에서 '쇠말뚝 뽑기' 밀어붙인 김영삼 정부

이런 쇠말뚝 문제를 키운 것은 김영삼 정부였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광복 5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쇠말뚝 제거를 내세웠다. 1995년 2월 1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이 당시 이 일을 관할한 내무부 지방기획과 박승주 과장의 인터뷰를 보자.

“지금도 일반 국민은 일제가 국토의 혈맥 차단을 위해 쇳물을 녹여 부었다, 명당의 혈을 질렀다, 지맥을 절단했다는 소문을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피해의식이죠. 광복 50주년 되는 해에 정부가 쇠말뚝 제거에 나선 이유는 국민의 막연한 대일 피해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섭니다.” 
김용삼, <김영삼 정부는 ‘풍수정권’인가?>, 월간조선 95년 10월호

이 사업은 원래 경상북도 기념사업이었다. 그것을 정부가 받아서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경상북도에서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학예사와 공무원들 일부가 반대했지만 막무가내로 밀고나가서 사업화했던 것이다. 경상북도는 군까지 동원해서 쇠말뚝을 찾아나섰고 이것을 안 당시 김용태 내무부장관이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칭찬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쇠말뚝을 일제가 박았다는 확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관계 공무원들은 기자들에게 “일제가 박은 것으로 추측되는”이라고 써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단양군 장군소 바위에서 제거된 쇠말뚝은 1893~1894년경에 일제가 박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쇠말뚝에는 정교한 볼트가 채워져 있어서 도저히 19세기의 물건으로 볼 수 없었지만 공무원들은 답변을 회피했다. 심지어 단양군 영춘면장을 지낸 적 있는 우계홍은 그 쇠말뚝을 자신이 박은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뱃줄을 묶어놓기 위해서 박아놓았던 것이었다. 우계홍은 그 사실을 군청에 이야기했지만 군청이 무시했다.

이 기념사업 결과 전국에서 439건의 신고가 들어왔고 8월말까지 13개 지역 18개의 쇠말뚝을 제거했다. 강원도가 제일 많아서 6개 지역(8개), 경북 4개지역(4개), 충북 2개 지역(4개), 전북 1개 지역(1개) 순이었다. 그러니까 439건 중에 불과 십여 건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정된 것들조차 김용삼 기자의 확인 취재 결과 엉터리로 밝혀졌거나 무근거한 것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 산림보호국 임시직원으로 화천, 양구 일대에서 측량업무를 도왔던 이봉득의 증언이 다음과 같이 나오기도 했다.

“스물 한 살 때 조선총독부 임정과에서 나온 고가주우켄(高賀忠賢)과 장길복이란 사람을 따라 화천 양구 일대를 누비고 다녔어요. (중략) 측량을 위해 박아놓은 대삼각점을 일제가 혈을 지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으로 오해했다. (중략) 그런데 나라 뺏긴 설움이 좀 컸나. 조선 사람들은 전국의 산꼭대기마다 들어서는 이상한 쇠막대기를 보고는 ‘왜인들이 조선에 인물이 못나오도록 혈을 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하더군.”

 

아무거나 다 일제 쇠말뚝이 되다

그러나 이런 기사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쇠말뚝 열풍은 잠들지 않았다. 1995년 국감에서 창경궁 바위에 쇠말뚝이 발견되었으니 철저히 조사하라는 주장이 나왔고, 전북 김제에서는 성산에 전망대를 세우겠다는 계획이 민족정기를 끊는다는 이유로 시민단체의 반대가 나왔다.

1997년에도 울산의 대왕암 공원에 쇠말뚝이 있다는 주장이 나와서 1998년 3월에 인천방송에서 일제의 풍수침략으로 다루는 등 계속 문제 제기를 해서 2000년에 제거하기도 했다. 이런 일에 고무받은 것인지 2010년에는 울산 대왕암에 나무뜸 혈침이 꽂혀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2010년 뉴시스는 울산 대왕암에 나무뜸 혈침이 박혀있다고 보도했다. 사진 출처: 뉴시스 기사

당시 보도사진을 보아도 쇠말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뭐든 박혀 있는 것만 발견하면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물건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소윤하 민족정기선양위원회 위원장에게 자문을 한 결과 “일제가 용으로 상징되는 우리나라의 기를 꺾기 위해 혈침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 이것 제거 작업까지 벌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목재 전신주였다. 1960년대에 군사지역에 세웠던 것인데 세월이 지나자 혈침으로 둔갑했다. 

1999년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이순신 장군 부모 묘에서 쇠말뚝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무속인이 아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저지른 일로써 일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으나 쇠말뚝을 꽂아서 정기를 훼손한다는 미신이 회자되는 결과를 낳았다. 범인은 신라 왕릉에도 쇠말뚝을 받았고 이 때문에 전국 각지 문중에서 무덤을 확인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9년에 동해시는 3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쇠말뚝찾기에 나서기도 했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계룡산 정상의 통신용 철탑이 쇠말뚝으로 정기를 끊는 것이라는 주장 때문에 이전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비판하는 책이 1999년 6월에 나왔다. 역사학자 이이화가 쓴 책 <이이화의 역사풍속기행>(역사비평)이다. 이 책에서 이이화는 일제의 풍수침략이라는 쇠말뚝은 측량에 사용되었던 것일 뿐이라는 비판을 가했다.

 

언론에 의해 확대재생산 된 '쇠말뚝 괴담'

하지만 쇠말뚝 추종자들은 끄떡하지 않았다. 1999년 <신동아> 8월호에서 소윤하는 쇠말뚝은 일제의 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박은 것이며, 그의 통역관이었던 신세우의 아들 신동식에게서 들었다는 주장을 했다. 신세우가 전범재판에서 야마시타의 변론을 잘해줘서 총살형이 교수형으로 감형되자 조선 산천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을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05년 월간 <말>지에 김재중 기자가 ‘<발굴/일제가 박은 쇠말뚝은 없다> - 이성을 마비시킨 집단 최면의 주술, 쇠말뚝’이라는 기사를 통해 반박한 바 있다.

2001년에는 피카디리 극장 재건축 현장에서 발견된 쇠말뚝 7개가 일제가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 박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극장 부지에까지 쇠말뚝을 박은 일제의 만행이 되었다. 북한산에서 또 3개의 쇠말뚝을 뽑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2004년도에 쇠말뚝을 제거하는 단체에서 강화도 마리산의 쇠말뚝을 조사했다. 하지만 당시 관리사무실 직원은 1978년도 계단 공사를 할 때 박았던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으나 그 증언은 인정받지 못했다. 쇠말뚝의 내력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2005년 5월 13일 한겨레신문에서는 길윤형 기자가 ‘쇠꼬챙이에 흥분하지 맙시다’라는 컬럼을 실어서 비이성적인 쇠말뚝 소동을 비판했다. 정약용 묘에서 쇠꼬챙이가 10개 나왔는데 이것을 일제의 쇠말뚝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언론들 때문이었다. 종친회에서도 무속인 소행으로 보는데도 언론이 더 난리를 부렸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 부모 묘 사건 때는 일제가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는 더욱 광범위하게 쇠말뚝 이야기가 퍼졌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2005년 10월 24일에는 SBS뉴스에서, 28일에는 KBS 뉴스에서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 이야기를 했다. KBS 앵커는 쇠말뚝을 들고나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쇠말뚝 제거의 날’을 만들자는 독자투고가 세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쇠말뚝을 박은 사람은 야마시타 육군대장?

2005년 12월 월간 <말>지에 김재중 기자가 ‘<발굴/일제가 박은 쇠말뚝은 없다> - 이성을 마비시킨 집단 최면의 주술, 쇠말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월간조선> 기사 후 10년 만에, 이번에는 진보 진영 쪽 매체에서 쇠말뚝 문제를 다뤘다. 여기서 소윤하가 주장한 야마시타 육군대장 건이 논파되었다. 야마시타의 통역관은 하마모토라는 일본인이었으며 총살형 이야기도 엉터리였다.

야마시타는 1936년 2.26 쿠데타 때 동정적이었다고 해서 조선 용산에 주둔하던 40여단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출전하였다. 즉 좌천되어서 온 야마시타가 1년여 사이에 365 군데에 혈침을 박는 대작업을 완료하였다는 얼토당토한 이야기인 것이다.

소윤하는 쇠말뚝의 탄소연대측정 결과 3만 년으로 나왔으며 이것은 석탄을 사용한 증거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는 숯을 사용했지만 일본은 석탄을 사용해서 쇠를 제련했으므로 일본인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도 주장했다. 김재중 기자는 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서울대 AMS 연구실 윤민영 박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윤민영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2001년쯤에 그런 의뢰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연대측정을 할 수 없습니다. 탄소를 추출해 연대를 측정하려고 했는데, 당시의 쇠말뚝은 연철로 탄소량이 극히 적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근 공업적으로 제강된 철, 즉 화석연료를 통해 만들어진 철은 탄소연대 측정이 거의 불가능하죠. (중략) 현재까지 알려진 방법으로 쇠말뚝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인지 구별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 기자는 남한산성의 쇠말뚝에 대해서도 현장 취재를 한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말에서 이 소동이 시작되었다. 동네 주민들 다수는 그런 일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쇠말뚝을 뽑아서 일제를 단죄하는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여수에서, 원주 치악산에서, 봉화 청량산에서, 서산 도비산에서 쇠말뚝을 뽑았다는 기사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런 미신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KBS 2011년 11월 19일자 '일제 쇠말뚝, 북한 명산에서도 대거 발견' 기사 캡처

쇠말뚝 괴담의 원조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

쇠말뚝 괴담의 원조 격인 이야기를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6년 7월 16일자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나주에 불상을 받으러 가던 황엄이 전라도 진원현(지금의 전남 장성군)을 지나가다가 그곳의 신령스러운 나무 백지수(百枝樹)에 구리못을 박았다. 수행하던 관원이 그것을 눈치 채고 구리못을 뽑고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다. 보는 바와 같이 쇠말뚝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가 이미 기록되어 있다. 나무에 구리못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벼랑에 구멍을 팠다는 이야기로 과장되어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쇠말뚝 괴담은 임진왜란 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1934년에 선산에서 채록된 이야기를 보자.

임진왜란 때, 왜군이 경상도 선산까지 쳐들어와서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왜군 중에 한 지사(地師)가 있어 그곳 산맥을 살펴보니, 많은 인재가 속출하고 국가는 나날이 흥기할 것 같이 보였었다. 그래서 왜군 지사는 이 산맥의 활기를 죽여버릴 양으로 군사들을 시켜 선산읍 뒤에 이어 있는 산맥에다 불을 성하게 이루어 숯을 구은 뒤 그곳에다 커다란 쇠말뚝을 박아 그 산맥의 활기를 죽였다고 한다. 그런 뒤로는 이상하게도 선산에는 인재가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하며, 그 산맥이 근방 고을에까지 통하여 있었으므로 역시 근방 고을에서도 인재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고 한다. - 선산군 선산면 박생원 담(談) (최상수, <한국민간전설>, 통문관, 291~292쪽)

이뿐이 아니다. 조선의 개혁군주라고 불리는 정조(正祖)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1797년, 정조는 우의정 이병모(1742 ~ 1806)와 나눈 대화다.

“요즘 인재가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 있소. 명나라 초에 도사 서사호(徐師昊)가 우리나라에 와서 산천을 구경했는데, 단천(함경남도) 현덕산에 이르러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아놓고 떠났으니 북쪽에 인재가 없는 것은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오.”

정조의 말에 등장하는 서사호는 공민왕 때 명에서 온 사신이다. 공민왕은 서사호가 자신에게 압승술을 쓸까 두려워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 즉 서사호는 이미 압승술로 유명한 도사였던 것이다. 서사호는 쇠말뚝 대신에 고려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비석을 세우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조는 그를 모함한 셈이긴 하지만, 서사호가 비석을 세우고 22년 만에 고려는 망해버렸으니 그의 신통력이라는 게 사실 별 볼 일 없었던 것이니 피장파장이라 하겠다.

정조는 뒤이어 또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서울에 내려온 맥은 삼각산이 주장이 되는데, 과인이 듣기로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 아래에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은 뒤 태워서 소금산을 만들어 맥을 멈추게 하였으니 서울에 인재가 없는 이유가 이것이 아니라 할 수 있소?”

신하들이 얼른 찬동을 하고 나서서 정조는 정말 소금산을 태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있어야 태울 것이 아닌가? 이것 역시 괴담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도 소금산을 본 이가 없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전해져오는 이와 같은 전설들이 일제의 식민지 시기와 맞물리면서 쇠말뚝 괴담으로 부활한 것이다.

인재가 없는 이유는 인재를 양성하지 못하는 사회 탓이다. 쇠말뚝에 미뤄놓으면 속이야 편할지 모르겠지만. 일제가 박았다고 믿고, 그것이 민족정기를 훼손한다고 믿는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비웃음을 받을 일이다. 만약 정말로 일제가 그런 짓을 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러니까 망하지”라고 대폭소를 하면 그만이고 그런 것을 뽑는다고 돈 한 푼 쓸 필요가 없다.

 

* 2024.03.03. 22:50 오타 두 곳 수정했습니다.

이문영     최근글보기
작가이자 편집자, 게임기획자 등 다양한 직종을 거쳤으며 90년대부터 유사역사학에 대한 탐구를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를 통해서 발표해왔다. <유사역사학 비판>라는 유사역사학 연구서를 내놓고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시민강좌, 계간 역사비평 등을 통해 유사역사학 비판을 계속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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