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축왕' 정세권, 건물 기증해 말모이 편찬을 돕다

[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말모이를 후원한 사람들 ①

  • 기사입력 2019.06.13 08:57
  • 최종수정 2019.06.17 15:46
  • 기자명 정재환

북촌한옥마을은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서울의 명소 중 한 곳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한옥들 사이를 지나는 좁은 골목길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지나다 보면 마치 100년 전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독도서관 앞 네거리에서 율곡로3길을 따라 안국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윤보선 가옥에 이르게 되는데, 좁다란 골목길 앞에 눈길을 끄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터.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지금은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이지만, 일제 때는 경성부 화동 129번지였다. 보나갤러리 자리에 학회 건물이 있었지만, 표지석에 적힌 설명만으로 사라진 학회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실물이 남아있다면 학회의 역사와 활동을 기억하기에 좋으련만 아쉽게도 서울은 너무나도 많이 변했고 많은 것을 잃었다.

영화 「말모이」에서 말모이(사전)를 편찬하는 공간이었던 조선어학회가 재현되었다. 외관이 번듯한 한옥에 널찍한 실내 공간은 편찬원들이 일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수집한 말모이 카드를 가득 숨겨둔 지하실은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자 만든 비밀 서고처럼 보여 관객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영화에서 본 학회의 모습은 얼마나 실제에 가까울까?

 

영화 <말모이> 의 사전 편찬실.
영화 <말모이>의 지하 말모이 창고

 

1919년 가을, 조선어 연구회는 창경궁의 서쪽 지역인 경성 원동(지금 종로구 원서동) 휘문고등보통학교 안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휘문고등학교 연혁에서도 학교장 임경재 등 교사들이 힘을 모아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했다, 간사장을 맡은 임경재를 비롯해 최두선, 권덕규, 장지영, 이규방, 이승규 등 30명 정도 규모의 조촐한 학회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1925~1933년까지 조선인들의 계몽을 위해 발행된 종합잡지 『신민』은 조선어 연구회를 ‘조선인들의 눈에 익고 귀에 젖은 중요한 단체’라 소개했다.

1928년 조선어 연구회는 경성부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회관에 방 한 칸을 얻어 이전했다. 이른바 셋방살이였다. 좁아터진 사무실에서 이극로, 이윤재, 한징, 김선기, 이용기 등 사전편찬원들이 코를 맞대고 일을 했지만, 이곳 ‘수표동 회관’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족시켰고, ‘조선어철자 통일 위원회’를 설치하여 「한글마춤법 통일안」이 탄생했고, 조선어 표준말 사정 연구가 이루어졌다. 수표동 42번지는 현재 청계천로 118-2에 해당하는데, 태양전기공구상 등이 자리한 곳이다.

 

1935년 정세권이 건축해 기증한 조선어학회 건물 화동회관. (사진: 한글학회)

 

독립된 공간이 없어 애를 먹던 학회에 도움의 손실을 뻗친 이가 건양사 사장 정세권이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이주 일본인의 주거지 확보를 위해 경성 주변부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안과 함께 조선인들이 밀집해 살고 있던 북촌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자칫 북촌마저 일본인들에게 내주어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세권은 조선인들이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북촌(가회동, 계동, 삼청동, 인사동, 익선동 등)에서 귀족들이 소유했던 대형 한옥을 매입하여 아주 작은 규모의 한옥을 빽빽이 채운 한옥밀집단지를 건설했다. 오늘날 우리가 북촌 한옥골목에서 볼 수 있는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소규모의 정감어린 한옥들이 바로 정세권의 작품이다. 일본인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겨야 했던 시대에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을 지켰다는 것만으로도 정세권은 역사에 남을 족적을 남겼지만, 그는 민족 운동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조선물산장려운동, 신간회 활동 등에도 참여하고 있던 정세권은 말모이를 만들고 있던 학회의 어려운 실정을 알게 되었고, 1935년 화동 129번지에 있는 이윤재 소유 땅 중 32평을 매입하여 2층 건물을 지어 학회에 기증했다. 정세권은 이 건물을 짓기 위해 토지매입비 및 건설비 4,000원을 들였다. 당시 경성방직 여공 한 달 월급인 21원의 200여 명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북촌 한옥마을을 만든 한국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
사전 편찬, 잡지 간행, 철자법 통일안 작성 이밖에 여러 가지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장산사 사장 정세권 씨로부터 서울 화동 129번지 2층 양옥 한 채를 조선어학회 회관으로 감사히 제공받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7월 11날에 이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어학회가 딴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가 된 것은 창립 이후 처음 일이다. 이 학술단체가 독립된 호주가 되도록 성장한 것은 오직 조선어학회 회원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과학적 사업에 대한 사회의 많은 동정이 있은 까닭이다.
- 이극로, 「조선어학회의 발전」, 『한글』 3권 6호, 조선어학회, 1935.

 

장산사는 정세권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활성화시키기 휘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극로는 수표동회관에서 화동회관으로 이사를 마친 후 직접 붓을 들어 정세권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오로지 조선어와 한글 연구에 정진하는 학회 회원들은 경제활동에서는 빵점에 가까웠지만, 학회 활동에 공감하고 은밀하게 후원하는 민족 지사들이 있어 곤궁하나마 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세권의 도움으로 조선어학회는 독립된 가옥 한 채를 소유한 호주가 되었으나, 영화 「말모이」에 나온 것처럼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았다.

아래층에는 학회 대표 이극로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이층이 사무실이었다. 2층에는 작은 방 하나 큰 방 하나가 있었는데, 큰 방은 편찬실이었고 작은 방은 일반 업무를 보는 공간이었다. 편찬실 입구에는 ‘일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마시고 이야기는 간단히 하시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고, 불철주야 오로지 편찬 업무에만 고개를 파묻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엄숙, 경건하다 못해 비장하였다.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실(사진: 국가기록원)

편찬실에 상주하던 이들은 이극로, 이중화, 한징, 정인승, 권덕규, 정태진 등이었는데, 남향 창가에 개인 책상이 놓였고, 북향 창가 앞에는 권승욱 등이 앉았다.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어휘 카드를 주석하고 원고를 정리하고 토론과 회의를 반복하면서 하루를 보냈고, 작은 방에서는 막내 격인 이석린 등이 한글 잡지 발송, 우편물 정리 등 일을 맡아 땀을 흘렸다.

*참고문헌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극로, 「조선어학회의 발전」, 『한글』 3권 6호

김공순, 「이극로 씨 고고한 학자생활」, 『삼천리』 

이종무, 「고루 이극로 박사에 대한 회상」,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

정재환    mcstory@daum.net  최근글보기
1979년 데뷔 이래 장르를 넘나들며 개그맨, 방송진행자, 연기자 등 다양한 방송활동을 했다. 2000년 한글문화연대를 결성했고 2013년 성균관대에서 한글운동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초빙교수이며 현재 YTN ‘재미있는 낱말풀이’와 팟캐스트 ‘한마디로영어’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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