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전력의 한국언론 선별과 일본 내 ‘취재 선별’ 관행

  • 기자명 윤재언
  • 기사승인 2023.07.2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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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홋카이도신문, 비판 보도 후 경찰에 굴복
여러 문제와 불상사 이어지며 비판 보도 기능 약화

후쿠시마 제1원전을 운영하는 도쿄전력이 최근 한국 언론의 ‘취재 선별’에 나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7월 20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도쿄전력은 일본 내 포린프레스센터를 통해 한국언론의 현장 취재 신청을 받았는데, 한겨레와 MBC만 제외했다. 한겨레는 해당 조치에 대해 항의했으나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포린프레스센터는 1976년 업계 단체인 일본신문협회와 일본의 전경련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출자로 설립된 뒤 현재는 공익재단이 됐다고 하는데, 경단련 주요 가맹사 가운데 하나가 도쿄전력이다. 

이에 양사와 대척점에 있는 조선일보도 도쿄전력의 방침에 반발해 취재를 거부했다. 선우정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26일 미디어오늘에 “도쿄전력은 책임 있는 기관인데 언론사를 선별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이라는 이유를 들며 자사의 도쿄특파원이 취재를 거절한 배경을 설명했다.

직전 성호철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은 배제 배경에 대해 “그동안 오염수 방류에 부정적 보도를 해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며 의도성을 거론했다. 도쿄전력이 이 같은 한국 언론의 움직임에 명확히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관련 기관의 언론 선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이번 글에서는 언론이 경찰에 굴복한 2000년대 사건 하나를 짚어볼까 한다. ‘홋카이도경찰 비자금 조성사건(北海道警裏金事件, 2003년 발각)’이다.

일본 내 정치와 언론의 관계도 적잖게 문제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본 언론과 수사기관과의 관계가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홋카이도경찰 비자금 사건의 전말

홋카이도경찰 비자금 사건의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최근 한국에서도 다시금 문제가 재기되는 특수활동비와 기본적으로 같다. 경찰이 수사활동에 쓴다는 명목으로 영수증, 장부 조작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왔고, 그것을 내부에서 전별금, 격려비 등 일종의 판공비로 유용한 문제다. 잇따른 언론 보도로 해당 사실이 폭로됐다. 

사건이 명확해지자 반성의 기미를 보이던 경찰은 관심이 줄어든 시점, 언론에 수사 위협 등으로 반격을 가한다. 이에 언론이 굴복해 주요 보도 책임자를 내치고 항복한 일련의 사건이다. 해당 언론은 지역 유력지 '홋카이도신문'(발행부수 80만여부)이다. 사건과 관련한 사실 관계는 주로 당시 보도를 바탕으로 작성된 홋카이도신문과 좌천돼 회사를 나간 다카다 마사유키(홋카이도신문 전 기자, 현재는 대학교수)의 저작 등을 참고로 했다(‘追及・北海道警「裏金」疑惑’, ‘真実 新聞が警察に跪いた日’).

2003년 11월,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중앙경찰서가 ‘수사용보상비’라는 이름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던 사실이 전국 방송 TV 프로그램을 통해 폭로된다. 화면에는 입수한 회계 서류가 비치고 있었다(아래 사진). 애초 수사에 협조한 사람에 대해 제공했어야 할 수사용보상비가 과다 혹은 허위 청구됐고, 해당분이 경찰서 내 비자금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협력한 일이 없는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거나, 이미 진작에 숨진 사람의 이름이 기재된 경우도 있었다. 

방송된 경찰내부 서류(아래 유튜브 화면 캡처)
방송된 경찰내부 서류(아래 유튜브 화면 캡처)

 

해당 시사 프로그램 영상. 유튜브 제목에는 2002년으로 나와 있으나 2004년초에 방영된 해당 프로 2탄으로 보인다.

이 화면을 보고 있던 당시 홋카이도신문 경찰사법데스크 다카다는 ‘물 먹었다’고 한숨 지으며, 경찰 내 고발자가 지역 신문이 아닌 지상파에 제보한 데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 게다가 다른 전국지보다도 추종 보도가 늦어지자 홋카이도신문은 경찰기자를 중심으로 부랴부랴 탐사보도팀을 꾸렸다. 도경본부담당 3명(도경캡, 서브캡 등), 삿포로시내 경찰서 담당 5명이 팀원이 됐다. 

팀을 이끈 다카다는 단순한 추종보도로는 의미가 없으니, 해당 관행이 홋카이도 내 만연했을 가능성을 감안해 도내 전역 취재를 시작한다. 특히 전략적으로 경찰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지속적인 보도를 하자는 데 팀원과 의견을 모았다. 경찰출입기자를 중심으로 꾸린 배경에는 ‘기자클럽(출입기자제도)은 관언 유착의 온상’이라는 일본 사회 인식을 뒤엎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경찰 간부와의 취재는 철저히 ‘온 레코드’로 진행하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이런 방침에 대해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보도를 하다간 출입처에서 반격을 당해 취재활동에 지장이 생긴다”는 우려가 나왔다. 다카다는 본인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 취재를 벌인 결과, 2003년 12월 2일 홋카이도신문은 연속보도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뒤 하루가 멀다 하고, 홋카이도경찰이 복수의 관할서와 다양한 방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에 관한 보도가 이어졌다. 독자와 내부고발자로부터 직접 제보와 의견을 받기 위해 전용 전화기까지 설치했다. 걸려온 것은 대부분 보도를 격려하는 전화였다. 이 같은 보도는 2005년 봄까지 이어져 관련 보도는 1400건에 달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홋카이도경찰 전직 고위간부 등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일도 있었다(지난해 사망, 아래 영상). 계속된 의혹 제기에 일부의 문제로 축소하며 소극 대응하던 홋카이도경찰은 안팎의 비판이 이어지자 비자금 조성 사실을 인정하고 국고에 9억엔을 반납한다. 

전직 경찰의 실명폭로 보도(출처: https://frontlinepress.jp/1848)
전직 경찰의 실명폭로 보도(출처: https://frontlinepress.jp/1848)

 

실명 폭로에 나섰던 전직 홋카이도경찰 간부 하라다 고지.

경찰의 반격과 언론의 항복

하지만 경찰의 홋카이도신문 취재 방해 행위는 진작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연속 보도가 시작된 때부터 간부들의 아침밤취재(夜討ち朝駆け, 경찰 주요 간부의 자택 등에서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는 취재수법) 거부가 끊이지 않았고, 한 경찰 간부가 훗카이도신문 기자에게 “도내에서 테러가 일어나도 귀사에는 일체 정보 제공하지 않겠다”고 반협박조로 말하는 일도 있었다. 일부러 다른 언론사에 정보를 주고 ‘물을 먹게’ 하는 일도 줄을 이었다.

팀을 이끌던 다카다는 “어차피 공식 발표나 재판에서 알게 될 사실을 미리 보도하는 것보다, 숨겨진 사실을 폭로해 권력감시하는 게 압도적으로 중요하다”며 보도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는 일본 언론에서 좀처럼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사건 취재에서 경찰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최근 다소 줄어들었다고 하나 여전히 경찰 간부의 입을 가장 중요한 소스로 삼는 관행 속에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홋카이도신문의 경찰 비자금 보도는 권위 있는 상을 잇따라 수상하며 안팎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보도가 줄어들자 경찰의 반격은 홋카이도신문사 상층부를 타겟으로 격렬해졌다.

당시 사내 비리를 포착한 경찰은 홋카이도신문 간부들에게 직접적으로 압수수색과 조사 가능성을 내비친다. 사실상의 ‘언론탄압행위’였으나, 홋카이도신문 고위층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경찰의 위협 사실이 드러난 계기는, 경찰을 저지하기 위한 폭로가 아니라 비자금 책임자로 지목된 경찰 간부가 사임 뒤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의 증거제출이었다.

홋카이도신문사 취재팀은 어느 정도 사실관계가 명확해지고, 경찰이 책임을 인정한 뒤 사건 보도 경위를 정리한 책 2권을 출간했다. 이 책에 대해 비자금 책임자가 경찰을 그만 둔 뒤 지엽적 부분에서 사실관계가 틀렸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재판부에 제출된 원고 측 증거 자료가 경찰의 압박을 시사하는 문서였다. 양측의 비밀 교섭은 최소 36차례 진행되고 있었다.

해당 증거 자료에는 편집국장이 일부 오보가 있던 것을 인정하고 경찰에 사과한 뒤, 다카다 등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담겨 있었다. 즉 증거의 초점은 경찰의 압박이 아니라 ‘신문사 측의 사죄’에 있었던 것이다.

민사소송에서는 전직 경찰 간부의 주장 일부가 받아들여진다. 다카다는 재판 과정에서 위증, 위증 교사 혐의 등으로 고발됐으나 검찰은 불기소로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다카다와 취재팀 주요 멤버 등은 민사소송 등을 이유로 좌천을 당한다. 일시적으로 반성에 내몰렸던 경찰이 결과적으로 큰 책임(특히 형사적)을 지지 않은 채, 반격에 성공한 셈이다. 오히려 일본 경찰의 언론에 대한 막강한 힘을 확인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고도 하겠다.

 

다양한 문제점 노출하고 있는 홋카이도신문

이 같은 사건 전개는 홋카이도신문에 있어 퇴행의 시발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사내 안팎으로 다양한 문제가 나오고 있다. 2021년 6월, 당시 도내 대학문제를 취재하던 1년차 기자가 출입금지 건물에 들어간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다. 그러나 홋카이도신문사가 신참 기자를 지키기보다 현장에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언론 관계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나왔다. 

올해 1월과 7월에는 사내 간부급 인사들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이른바 '사내 갑질'로 인한 자살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는 중이다. 특히 7월에 숨진 53세 편집국 차장은, 인사 문제 관련해 편집국장에게 심하게 질책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인과관계를 두고 의혹이 제기되는 중이다. 해당 차장은 그동안 사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 이른바 ‘개혁파’로, 때로는 선후배들과 새벽까지 마시는 등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번 꺾여진 펜과 그동안 누적돼 온 사내 조직의 문제가 홋카이도신문에게는 더 방치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서는 관청이나 수사기관에 대해 언론사 간 최소한의 연대도 실종된 상황이다. 신문노련(신문노조) 중앙위원장을 지낸 미나미 아키라 기자(아사히신문 출신)는 최근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노조가 있어도 다 같이 기자클럽과 같은 관행을 바꿔서 정치가나 관청에 대항하자는 분위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현실을 전한 바 있다.

기본적으로 이 같은 환경의 고착화 혹은 습관이 이번 도쿄전력의 한국 대응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글에서 모두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홋카이도신문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물론 도쿄전력(원전사고 뒤 현재는 사실상 정부소유)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는 윤석열 정권의 언론 배제 움직임을 고려해 선별 작업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저 일본 관청과 수사기관이 해오던 관행의 반복, 혹은 응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더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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