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는 지금도 위조중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8.12.12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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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의 유사역사학 체크] 최근 등장한 환단고기 원본은 '진짜'인가

지난 가을에 중고책 사이트에 <환단고기> 원본이라는 매물들이 올라왔다. 서너 권쯤 올라온 이 ‘원본’이라는 책은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호기심이 생겨서 그 중 한 권을 구매했다.

이 책은 매우 특이한 물건이었다. 옛날 책처럼 생겼지만 1979년에 나왔다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없는 깨끗한 책이었다. 오래된 책은 박물관에나 있으면 모를까 헌책방에 나올 책이라면 이런 상태일 수가 없다.

 

2018년 새로 중고시장에 나온 <환단고기> 표지.

 

2018년 새로 중고시장에 나온 <환단고기> 내지.

 

이 책은 판권 표시가 기존에 나온 <환단고기>(광오이해사 발간본)와 달랐다(아래 사진 참조). 가격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유립이 붙였던 정오표(正誤表ㆍ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은 별지)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책에는 책을 발행한 조병윤의 재판후지(再版後識ㆍ2쇄를 발행하면서 붙인 일종의 발행 후기)가 붙어있다. 내지의 경우 없었던 테두리가 생겨나 있다. 기존 책보다 조금 더 큰 판형인 점도 다른 부분이다.

광오이해사에서 나온 환단고기 초판 판권. 편집자 단단학회 대표 조병윤, 1979년 9월 10일 발행이라고 적혀 있다.
광오이해사에서 나온 환단고기 재판 판권. 편집자 단단학회 대표 조병윤, 1979년 9월 10일 발행, 1979년 12월 22일 재판이라고 적혀 있다.
이번에 새로 구입한 책의 판권 부분. 가격 표시가 없어졌다.

 

<환단고기> 출판의 역사

여기서 먼저 <환단고기>라는 책의 발행 문제를 차근차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환단고기>는 1979년 9월 10일 초판이 100부 한정, 1만 원의 가격으로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단단학회 대표 조병윤의 편집으로 발행되었다. 고가의 책이었다. 이 책 이전에 1911년에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30부 발행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환단고기>를 1960년대부터 날조해나간 정황은 이유립이 발행했던 단단학회 기관지 <커발한>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환단고기>는 의외로 잘 팔렸던 모양으로 1979년 12월 22일에 재판을 찍었다. 초판과 달리 재판에는 편집자 단단학회 대표 조병윤의 재판후지(再版後識)가 붙어있다. 단단학회 설립자 이유립이 적은 정오표(正誤表)도 그대로 달려있다. 정오표가 그대로라는 것은 수정한 부분 없이 그대로 다시 찍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항간에는 조병윤이 단단학회 대표를 사칭했고 이유립 몰래 책을 발간해서 이유립이 크게 화를 냈으며 조병윤을 파문하고 책을 거둬들이기까지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사실일 수 없다. 조병윤을 파문했다면 그가 어떻게 재판을 낼 수 있었을까? 심지어 재판은 1만8000원으로 가격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여기에 조병윤은 자신을 ‘정산(靜山) 문인 한양 조병윤’이라고 밝혔다. 정산은 이유립의 호이다. 파문 당했다는 조병윤이 자신을 이유립 문하라고 밝힐 수 있을까?

광오이해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1979년 가을에 곧바로 일본의 유사역사가 가시마 노보루의 손에 넘어갔고 가시마 노보루는 <환단고기> 일역본을 1982년 7월에 일본에서 출간했다. 일역본에는 이 책이 어떻게 가시마의 손에 들어갔는지 적혀 있다.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유사역사학 기관지였던 <자유>지 발행인 박창암이 이유립 몰래 책을 건넸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사실이 아니다. 가시마 노보루는 <환단고기>를 이유립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일역본에 적어놓았다. 이유립은 가시마의 번역도 도와주었고 그런 결과 1984년에 나온 일역본 재판에는 이유립이 보낸 축시도 적혀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거짓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광오이해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말고 <환단고기>가 하나 더 있다. 이 <환단고기>는 배달의숙이라는 곳에서 나온 것으로 1983년에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에 배달의숙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는 최초의 주장은 유사역사학 잡지였던 <한배달> 2001년 7월호에 처음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배달의숙에서 나온 <환단고기>의 판권을 보면 1979년 10월 3일 재판발행으로 되어 있다. 9월 10일에 나온 광오이해사의 <환단고기> 뒤를 이은 재판이 아니다. 1911년에 계연수가 내었다는 <환단고기>의 재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광오이해사ㆍ배달의숙 '환단고기'의 차이

배달의숙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광오이해사에서 나온 <환단고기>와 몇 군데가 달라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오형기(이유립의 문하생 중 한명)의 발문이 없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유립은 오형기가 발문을 쓴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오형기는 <환단고기>를 필사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그 외에 문자가 달라진 곳이 여러 곳이지만 여기서는 고주몽의 연호에 대한 부분만 검토해보기로 한다. 광오이해사본에서 ‘다물’이라는 연호를 쓰는데, 배달의숙본은 연호를 ‘다물’과 ‘평락’으로 분리해놓았다.

배달의숙본에 평락은 두 번 등장한다. 주몽이 북옥저를 멸망시킨 때를 광오이해사본은 32년(다물32년이라는 뜻)으로 썼는데 배달의숙본은 평락21년으로 써놓고 있다. 실제로는 평락11년이라고 써야 하는데 얼마나 급히 수정을 했던 것인지 21년으로 오타를 내놓았다. 또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연타발이라는 인물이 죽은 때를 광오이해사본은 다물34년으로, 배달의숙본은 평락13년으로 기록한다. 이 연도는 기원전 25년으로 두 책 사이에 연도상 변동은 없다.

주몽이 다물이라는 연호를 쓰다가 갑신년인 기원전 58년에 연호를 평락으로 바꾼 것이다. 왜 연호를 바꾼 것인가? 그것은 <삼국사기>에 고구려 건국년이 갑신년으로 되어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은 뒤에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한다.

1979년에 나온 광오이해사의 <환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 이 다물과 평락이라는 부분이 정오표에 있을까? 없다. 훨씬 나중에 이 부분을 수정했다는 증거이다.

이유립은 1973년 3월 10일에 대동문화사에서 <광개토성릉비문역주>라는 책을 냈다. 광개토왕비문을 해석한 책이다. 이 책은 기존 알려진 광개토왕비문을 이유립 나름대로 해석한 책이다. 그런데 이유립 사후에 나온 <대배달민족사> 2권에는 아주 이상한 것이 들어있다. 1925년에 벽산 이덕수가 썼다는 판독문이 들어있다. 이 판독문에는 결자가 없다. 전문이 모두 들어있는 말도 안되는 판독문이다. 그런데 이 안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

광개토왕비에는 추모(주몽)왕이 세상을 떠난 대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세상의 자리를 즐기지 않아 이로 인해 황룡이 내려와 왕을 영접하였다.

 

황룡은 추모(주몽)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저 불락(不樂)이라는 대목이 이덕수 판독문에는 평락(平樂)으로 나온다. 바로 광오이해사본의 다물을 배달의숙본에서 고친 그 ‘평락’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배달민족사> 2권에는 ‘광개토지경’이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이것 역시 광개토왕비를 판독한 글로 여기에도 평락이라고 나온다. 특히 여기에는 주석도 달려있다.

平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평락[다물22년에 개원하여 평락이니 이해에 국호를 고치어 고구려라 칭하다]의 세대와 자리이신데 삼신 하느님이 누른 미르를 보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시니

 

다물22년이 바로 갑신년(기원전 37년)이고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년도이다. 즉 이 해에 고구려라는 국호를 가졌기 때문에 사실은 건국 연도는 더 위에 있지만(<환단고기>는 기원전 58년에 고주몽이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그걸 몰라서 기원전 37년에 건국한 것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그럼 왜 기원전 58년을 잡았는가? 그것은 신라의 건국년도가 기원전 57년 갑자년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단 1년이라도 신라보다 빨리 건국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이 해석문 뒤에 ‘광개토지경비의’라는 글이 실려있다. 이 글 뒤에는 작성 연도가 1975년으로 적혀 있다. 이 글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다물22년 갑신에 개(改) 국호하야 위(爲) 고구려하니 (중략) 시년(是年) 개원하야 위(爲) 평락하니 내복구토(乃復舊土)하야 이평등위락(以平等爲樂)지위야(之謂也)라.

 

옛 땅을 찾아 평등으로써 즐거워진다는 것이 평락의 뜻이라고 풀어놓기까지 했다. 不과 平이 글자가 비슷해 보이니 이런 식으로 배달의숙본을 수정해 놓고 싶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게 왜 거짓말인지 밝힐 차례다. 이유립은 월간 <자유> 1976년 6/7월호에 ‘국강상곽개토경평안호태성제성릉비문역주’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이유립은 계연수가 1898년 5월에 비를 판독했고, 1912년 5월에 다시 가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 내용은 1932년 삼육사에 ‘성릉비결자징의’라고 게재하였다가 압수 처분당했다고도 말한다. 그런 끝에 이유립은 계연수가 전한 그대로 옮겨적겠다고 말한다.

해당 기사에는 너무나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불락세위’라고 적혀 있다. 해석도 실려 있다.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세상과 자리에만 즐기지 아니하시매 삼신하느님이 황룡을 보내시어 왕을 맞이하시니

 

다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대배달민족사>는 이유립 사후인 1987년에 나왔다. 과연 이유립이 이렇게 고쳐놓았던 것일까?

 

<환단고기> 배달의숙본은 정말 1983년에 나왔을까?

다시 한 번 정리해보자.

일역본이 나온 후에 <환단고기> 우리말 번역본이 나왔다. 제일 먼저 나온 번역본은 1985년 6월 8일 김은수라는 중학교 국어교사가 내놓은 <주해 환단고기 - 단군은 아시아를 통일했다>라는 책이었다. 김은수는 1982년 전남대에서 구한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를 번역했다.

그는 서문에서 1948년에 필사본 초판이, 1979년에 재판이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가 말하는 필사본 초판이라는 것은 오형기가 강화도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책을 가리킨다. 실제로는 이때 이유립은 대전에 있었기 때문에 오형기가 1948년에 필사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환단고기> 내력에 얽힌 거짓말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는데만도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이후 1985년 11월 15일에 온누리 출판사에서 강수원 역 <환단고기>가, 같은 해 11월 26일에는 배달문화원에서 임훈 역 <환단고기>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6년 5월 10일에 정신세계사에서 임승국 역 <한단고기>와 5월 20일에 한뿌리 출판사에서 이민수 역 <환단고기>가 나왔다. 이 책들은 전부 광오이해사의 <환단고기>를 번역했다.

1983년에 이유립이 배달의숙에서 기존의 미흡한 부분을 보강한 <환단고기>를 냈다면, 왜 사람들은 모두 그 책을 번역하지 않고 광오이해사의 책을 번역했을까? 해답은 명확하다. 배달의숙의 <환단고기>는 1983년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1985년 임훈 역 <환단고기>에서 한가지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사람은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인 송지영이다. 그런데 송지영은 배달의숙본을 숙명여대 도서관에 1989년에 기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즉 1983년에 배달의숙본이 나왔다면 송지영은 그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다면 임훈이 번역본을 광오이해사본으로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1983년에 나온 <한암당이유립사학총서>(천)권에는 이유립 자필 원고가 있는데 송지영이 이유립에게 썼다는 한시도 수록되어 있다. 두 사람이 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또한 강수원은 번역 당시 대종교 삼일원장으로 83년에 구한 <환단고기> 복사본을 가지고 번역했다고 말했다. 강수원이 83년이라는 시점을 못 박은 때문에 그 이전에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 같고, 또한 1982년에 일역본 <환단고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전에 나온 것으로 주장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배달의숙본을 만들 때는 미처 그런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광오이해사본을 덮어버리고자 배달의숙본 발행일을 1979년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환단고기>가 가지고 있는 각종 모순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 연도를 올린 것과 <삼국사기>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려고 평락 연호를 만든 식으로. 또는 임승국의 <한단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배가 아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몇몇 내용을 고친 뒤에 이것이 정본이요, 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만큼 또 팔릴 줄 알고.

 

계연수는 정말 1980년에 <환단고기> 공개하라고 유언했나

<환단고기>는 1980년에 공개하라는 계연수의 유언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920년에 죽은 계연수가 60갑자 후에 공개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1983년에 송호수라는 사람이 자기 책에서 처음 주장했다. 이유립이 해준 말이라고 했다. 이유립 생존 시이므로 이유립이 한 말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유립은 이미 <커발한>이나 <자유>에 <환단고기>를 여러차례 공개한 바 있었다. 앞뒤가 안 맞자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자기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합리적인 설명은 1979년에 와서야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완성해서 그 해에 출판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1980년에 공개하라고 했는데 1979년에 책이 나왔다는 것부터 넌센스다. 그러다보니 조병윤이 몰래 간행했다는 말로 이 문제를 덮으려 했다. 하지만 조병윤이 재판본을 냈다는 사실이 탄로나면서 이 거짓말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배달의숙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1983년에 나왔다고 주장되었으나 최근에는 1980년에 나왔다고 말이 바뀌고 있다. 그러나 1985~6년에 나온 모든 번역본이 1979년에 나온 광오이해사의 <환단고기>를 번역했다는 점을 볼 때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된다.

현재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배달의숙본의 연대는 송지영이 숙대에 기증했다는 1989년뿐이다. 아직 이 이전의 배달의숙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다. 확인한 바로 가장 빠른 번역본은 단학회 연구부의 <환단고기 역주본·장구본>으로 1998년 코리언북스에서 출간되었다. 그 후 2012년에 안경전이 상생출판에서 낸 <환단고기>가 있다.

이유립은 1986년 4월 사망했다. 이때까지 나온 책만 김은수, 강수원, 임훈 역의 3종인데 김은수는 이유립과 알 길이 없었을 수 있으나 강수원의 책은 이유립과 오래 활동한 안호상이 추천사를 썼으며, 임훈은 배달문화원 원장인데, 배달문화원은 안호상이 설립한 단체로 1984년에 이유립을 배달문화원 배달문화대상으로 선정한 바도 있다. 이때 번역자 중 한 명인 강수원도 특별상 수상자였다. 강수원은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본 <환단고기> 재판에 대종교를 소개하는 <大倧敎とは ― ここに眞なる宗敎あり(대종교란 - 여기에 참된 종교가 있다)>라는 장문의 글을 싣기도 했다. 이유립, 가시마 노보루, 강수원은 모두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1985년에 나온 <환단고기>가 1983년에 나온 배달의숙본을 저본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배달의숙본이 1980년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은 더더욱 성립할 수가 없다.

 

자칭 원본인 새 <환단고기>는 진품일까?

이런 와중에 새로운 <환단고기> 원본이 등장한 것이다. 기존의 광오이해사 <환단고기>보다 더 크고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 바로 조병윤의 ‘재판후지’ 부분이다.

 

왼쪽이 재판, 오른쪽이 새 환단고기. 과거 책을 복사해 새 환단고기를 위조했는데 복사과정에서 글자가 뭉개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원본과 비교했을 때 선명도가 확 떨어지는 복사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왼편의 글자가 네모 안에 공간이 보이는 것과 달리 오른쪽은 공간이 뭉개져버렸다. 복사하다가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은 위조품이다. 왜 이런 위조품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광오이해사본의 재판 때문이다. 이유립이 광오이해사 <환단고기>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말은 재판이 12월에 나오면서 거기에 조병윤의 재판후지(再版後識)가 들어있는 것으로 무력화되었다. 그러자 재판후지가 광오이해사 판본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꾸미고자 한 것이다. 계연수가 1911년에 낸 책을 초판으로 하고, 1979년에 나온 책을 재판이라고 주장하면 조병윤의 재판후지가 광오이해사본의 재판이 아니고 <환단고기> 자체의 재판이라고 우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다. 조병윤의 재판후지에는 마지막에 ‘기미년 복월(復月)’이라고 쓴 날짜가 들어있다.(아래 사진) 복월은 음력 11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9년 9월 10일에 나온 책의 후기가 1979년 12월(재판이 나온 12월 22일은 음력 11월4일이다)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책 말미에 기미복월(己未復月)이라고 적혀 있다. 기미년은 1979년, 복월은 음력 11월이다. 즉 이 책은 1979년 12월에 나온 책이다.

<환단고기>는 이미 탄로난 거짓말을 메꾸기 위해 누더기가 되어 있는 상태인데, 여기에 또 하나의 천이 덧대어진 것이다.

*2019년 1월 21일 오후 4시 1차수정: 안호상이 임훈 번역본에 추천사를 썼다고 언급했으나 연설한 내용을 추천사로 착각하여 잘못 언급했습니다. 이에 <강수원의 책은 이유립과 오래 활동한 안호상이 추천사를 썼으며, 임훈은 배달문화원 원장인데, 배달문화원은 안호상이 설립한 단체로 1984년에 이유립을 배달문화원 배달문화대상으로 선정한 바도 있다.>고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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