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정적'과 '암살자'에 대한 인도의 재평가가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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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정적'과 '암살자'에 대한 인도의 재평가가 의미하는 것
  • 이광수
  • 승인 2021.02.0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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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인도체크] 간디와 다른 길을 택한 두 인물, 보스와 고드세에 대한 인도국민당의 '해석의 정치'

독립운동가 자손들에 대한 능멸이 윤서인이라는 어느 친일 혐오주의 웹툰 작가에 의해 자행되었다. 윤씨는 20211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과 독립운동가 후손 집을 비교한 사진을 올리고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한 걸까. 사실 알고 보면 100년 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고 적었다. 이 글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의 김원웅 회장은 같은 날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윤씨에 대해 80억 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입법학회 회장인 정철승 변호사는 앞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번 독립운동가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형사 고소뿐 아니라 적은 금액의 위자료 청구도 함께 제기해 볼까 한다"며 윤씨에 대한 소송을 예고했다.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그것의 정치 전술의 문제가 연이어 일어났다. 흔히 알고 있는 마하뜨마 간디의 친영(親英) 온건주의 노선과 전혀 다른 길을 걸은 두 사건의 역사적 유산 위에서의 정치 전술이다. 한국에서는 역사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혐오주의에 바탕을 둔 어느 개인의 일탈로서의 사건일 뿐인 반면 인도에서는 서로 다른 역사 해석에 기반 한 정치의 문제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어찌 됐든 식민과 독립의 역사를 공유한 과거에 대한 문제에 대한 두 나라의 정치 문화적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에서는 되새겨 볼만한 부분임에는 사실이다.

 

인도 급진적 독립운동가 수바스 짠드라 보스.
인도 급진적 독립운동가 수바스 짠드라 보스.

 

우선, 첫 번째 사건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수바스 짠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의 탄신 125주년 기념행사를 두고 인도국민당(Bharatiya Janata Party) 소속 연방정부 수상인 나렌드라 모디(Narendra Modi)와 보스의 고향 주() 서벵갈(West Bengal) 주정부 수상인 뜨리나물 콩그레스(Trinamool Congress 민초회의) 소속 마마따 바네르지(Mamata Banerjee)가 벌인 그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이다. 벵갈 출신의 수바스 짠드라 보스와 그가 이끄는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이 그 주인공이다.

보스는 처음에는 마하뜨마 간디와 함께 민족운동을 벌였으나 간디의 친영 온건주의 노선에 반대하여 무력 독립운동을 주장하고 행동에 옮긴 독립운동가다. 그는 결국 1939년에 인도국민회의에서 축출당하고, 영국 정부에 의해 가택연금까지 당한 후 1940년에 간신히 탈출하여 이듬해인 1941년 독일로 갔다. 그는 독일에서 영국과 맞서던 나치 독일의 힘을 빌려 인도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그런데 독일 히틀러 측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즈음 일본은 194112월 홍콩과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그 전장에서 인도군 65,000명을 생포했다. 여기에서 이들 포로를 조직하여 인도국민군(Indian National Army)을 창설시켜 그들을 앞세워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인도인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용하려는 일본 측에 저항했다. 자기 모국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저항도 있었고, 영국 지배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인도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던 수바스 짠드라 보스를 인도국민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위해 독일로 가 그를 잠수함에 태워 일본으로 데려왔다. 보스가 리더가 되면서 인도국민군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인도인 민간인들까지 합류시켜 인도국민군을 더욱 더 큰 규모로 재정비하였다. 그해 10월 보스를 수반으로 하는 자유인도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Free India)가 발족됐으니, 일본은 이 임시정부를 일본의 괴뢰정부로 삼아 영국을 패배시킬 계획이었고 보스는 이러한 일본을 역이용하여 인도를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야심을 세우고 있었다. 19443월 미얀마를 넘어 침공해 온 일본 세력은 임팔(Imphal)에서 영국에 크게 패배했고, 보스는 패잔병 일본군과 함께 19455월 방콕으로 돌아왔고 베트남에서 일본의 패전을 접했다. 그러자 그는 이번에는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도움을 청하려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수바스 짠드라 보스는 대영제국 인도군 포로와 투항자 2만명을 모아 1943년 6월 16일 인도국민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수바스 짠드라 보스는 대영제국 인도군 포로와 투항자 2만명을 모아 1943년 6월 16일 인도국민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보스에 대한 인도 내에서의 평가는 대부분이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대중들에게 네따지(Netaji 대장님)라는 별명을 가진 큰 인기를 누린 정치인이란 것이다. 특히 그의 고향인 벵갈에서는 간디나 네루보다 훨씬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애국지사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굴의 투쟁을 전개했을 뿐, 독일과 일본이라는 파시스트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번 탄신 125 주년을 맞이하여 그와는 전혀 뿌리가 다른 정당인 인도국민당 정부가 그를 칭송하고 나섰다. 모디 수상은 20212월 첫 주에 치를 예정인 서벵갈 주정부 선거를 앞두고 그의 탄신일인 123일을 용기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이에 대해 서벵갈 집권 여당인 민초회의에서는 나라 영웅의 날로 삼았다. 두 경우 모두 현재의 자신들과 아무런 역사적 관계가 없음에도 그의 인지도를 활용하여 지지표를 많이 확보하여 선거에서 이기려는 전술일 뿐, 그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한 나투람 고드세.

두 번째로, 역사 해석을 이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또 하나의 사건이 202111일 인도 북부의 마디야쁘라데시(Madhya Pradesh) 주에서 발생했다. 힌두 극우 세력인 힌두 마하사바(Hindu Mahasasabha 힌두대회의) 소속 단원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라는 이름의 마하뜨마 간디 암살자의 행적을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딴 고드세 지식원’(Godse Gyanshala)라는 이름의 도서관 겸 연구소를 개소한 것이다. 그러나 이틀 뒤 야당의 강력한 항의와 반발에 부닥쳐 도서관 겸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고드세는 1948130일 새벽 5시 반경 아침 기도회에 참석한 후 파키스탄으로 떠나려는 마하뜨마 간디를 면전에서 소지하던 권총으로 가슴을 쏴 절명시킨 자다. 당시 간디는 이미 독립국이 된 파키스탄으로 가 수상 진나(M.A.Jinnah)를 다시 한 번 설득하러 가는 길이었다. 고드세는 법정에서 간디가 국가의 원수인 무슬림을 포용하자고 해서 암살했다고 말했다. 간디는 줄곧 힌두와 무슬림의 사랑과 포용을 외치면서 인도 인민의 단합을 꾀했으나 초기의 영향력은 시간이 갈수록 약화되었고 두 나라로 분단이 될 무렵에는 이미 힌두와 무슬림의 두 종교 공동체 간의 반목과 갈등 그리고 폭력을 중지시키는 데에 대해 거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의 영향력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인류사 최대 규모의 강제적 이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분단 정국에서 파키스탄에 살던 힌두들은 모두 집, 재산, 부모, 고향 등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피난 와야 했고, 그 와중에 어린 자식은 열병에 죽고 딸은 납치되고, 마누라는 강간당하는 일이 셀 수 없이 발생했다. 간신히 살아남아 인도로 들어온 난민들은 고드세가 속한 힌두 마하사바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무슬림에 대한 증오는 갈수록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을 용서하고 포용하자고 주장한 간디는 그들로부터 처단해야 마땅할 첫 번째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가 마하트마 간디를 총으로 암살하는 장면.
1948년 1월 30일 나투람 고드세가 마하트마 간디를 총으로 암살하는 장면.

 

지금의 연방 정부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은 바로 이 힌두대회의의 후신이다. 그리고 모디 수상은 또 다른 방계 조직인 민족의용단 소속 단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2014년과 2019년 연이은 총선의 대승과 인기몰이를 앞세워 제1 야당인 회의당에 뿌리를 둔 간디가 추구한 통합의 정치를 반대하고, 적 즉 무슬림과 파키스탄에 대한 응징을 통한 정치를 추구한다. 그러한 역사 해석의 선상에서 그들은 은연 중에 간디를 국부(國父)로 칭하는 역사에 반발하기도 한다. 20195월 보빨(Bhopal)에 지역구를 둔 쁘라기야 싱 타꾸르(Pragya Singh Thakur)라는 여성 국회의원이 고드세를 애국자로 공개적으로 칭해 전국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것이 그 좋은 예다. 타꾸르는 2008년 말레가온(Malegaon) 폭발 테러 용의자이기도 하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길을 걸었다. 하나는 영국과 선린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친구로서의 이별을 택했고, 또 하나는 무슬림과의 통합을 통해 분단 아닌 하나의 나라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가 택한 정치 노선은 그가 죽은 후 인도의 전 인민에게 70년 넘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으나 두 가지 지점 모두에서 상당한 반발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수바스 짠드라 보스의 무력 투쟁론이고 또 하나가 고드세로 상징되는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반()무슬림 척결론이다. 물론 이 둘 가운데 전자는 상당히 대중적이고 정상적인 역사 해석의 하나로 인정받는 반면에 후자는 아직은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그러나 후자는 10년 가까이 지속되는 힌두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이 추진하는 힌두국가로 성격을 개조해가는 길에서 점차 그 비중이 커져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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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외국어대 교수(인도사 전공)다. 델리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가락국 허왕후 渡來 說話의 재검토-부산-경남 지역 佛敎 寺刹 說話를 중심으로- 〉 등 논문 다수와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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