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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61식은 '시티폰' 같은 전차? 원래 미래를 보고 개발한 전차가 아니다[우보형의 무기 이야기] 일본 61식 전차에 대한 오해와 이해

지난 5월 6일, 조선일보는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일본 61식 전차’가 주는 교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4월 29일자 ‘이코노미조선’의 War & Tech 칼럼에도 실렸던 이 기사는 1997년에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동년 10월에 등장한 PCS에 밀려 사업을 접은 시티폰처럼 국내 개발을 시도했지만 오랜 개발 과정으로 등장이 늦어진 전후 최초의 일본제 전차, 61식 전차의 사례를 소개하며,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10년만 먼저 완성할 수 있었다면 후속작인 74식 전차처럼 괜찮은 결과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기사의 취지는 이해할만 하지만 기본 전제가 틀린 가정은 딱히 의미가 없는 법이다.

61식 전차에 대한 오해와 이해 : 61식 전차 개발 당시의 일본 상황

기사는 61식의 개발 배경을 “일본은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자위대 창설 직후인 1955년부터 국산 전차 개발에 나섰다. 그렇게 미쓰비시 중공업이 만들어 1961년부터 배치된 전후 일본 최초의 전차가 61식 전차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61식 전차의 개발은 일본의 경제력과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50년대 초중반, 미국은 `어른의 사정에 따라 그간 주일미군이 담당해오던 일본 방위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넘기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후일 자위대가 되는 경찰예비대를 만들게 하면서 그 대책으로 1952년에 M24 전차 238대를 공여했다.

일본 육상자위대의 첫 번째 전차, M24

하지만 M24 전차는 당시 일본의 운용 제반 상황에 어느 정도 부합하긴 했어도 대전 중에 긴급히 대량생산된 물건인지라 50년대 초에 이르면 노후화로 인해 고장이 빈발했고 이미 현역이 아니기에 부품 조달도 어려웠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을 통해 공산진영이 사용하던 T-34/85 전차에 말 그대로 압도당해 한국전쟁에 파견하는 대신 그냥 일본에 공여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빈약한 성능을 가졌다. 그래서 미국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1954년에 M4A3E8 전차 200대를 추가로 일본에 공여했지만 이들 또한 전투력 측면에서야 좀 나아졌을지 몰라도 한국전쟁 시점에서 이미 재생차량들이 부지기수였고, 고장 빈도나 부품조달의 난이도 또한 M24 전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M24 전차(우측) 무용론을 잠재우기 위해 육상자위대에 공여된 M4A3E8 전차(좌측)

따라서 일본도 가능하다면 M46이나 M47, 또는 M48의 공여를 바랬으나 미국에게도 유럽 중시 정책에 더해 한국 전쟁의 전훈을 반영한 자군 일선 부대 육상 장비의 전면 교체로 인해 일본까지 신형 전차를 공여할 여유가 없었다. 만일 기사처럼 당시의 일본에 충분한 경제력이 있었다면 일본 자위대 또한 미국의 신형 전차들을 구매하거나 라이센스 생산하기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고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급한 국방 상황에 더해 기본적으로 조달 재원은 자력으로 만든 것이 아닌, MSA협정으로 195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외 원조에 기반한 것이었다. 비록 1955년부터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이 시작됐다 하더라도 1950년대 초반의 일본에 그럴 경제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게 현실이다. 결국 당시 일본이 전차 국내 개발을 결정한 이유는 일본의 경제력과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의 이유, 부족한 경제력 때문에 재원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 M47을 벤치마킹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어 기사는 “개발 당시에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미국의 M47 전차였는데 단지 모양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성능 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M47도 미국에서는 실패작이라 보고 2년 만에 생산을 종료한 후 M48 전차 양산에 돌입한 상태였다.”라며

61식 개발 당시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국의 M47 전차였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 서술도 사실이 아니다. M47 전차는 미국이 대전 중에 중전차로 개발한 M26 전차에 종전 후에 얻어낸 독일의 전차기술들을 참조하여 스테레오 영상 합치식 조준경을 시작으로 신형 주포와 컨티넨탈 AV-1790-5B 12기통 가솔린 엔진(810마력) 등의 신기술 적용을 골자로 개발을 시작했었다. 여기에 베를린 전승기념 퍼레이드에서 확인된 소련의 신형 중전차 IS-3의 형상을 반영하여 방어력을 향상시킨 새로운 주조제 차체와 포탑 적용 여부를 놓고 개발 일정을 조율하는 상태였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이 냉전이 아닌, 평화로운 상태로 끝났다면 아마 M46, M47, M48 중 둘은 태어나지 못하고 M48의 형태로 완성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평화가 아닌 냉전이었고.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M4A3E8 전차로는 T-34/85를 압도하지 못하는 것이 밝혀지자 미국은 긴급히 M47의 차체에 새 주포만 탑재한 M26의 포탑을 결합시킨 M46을 만들어 전쟁에 투입하고. 유럽으로의 확전 상황을 가정하여 신형 차체를 적용하지 않은 원안대로의 M47도 8,600대 가까이 생산하여 일선에 배치했다. 이를 정리하면 M46이나 M47, 또는 M48은 개발 초기엔 기술적으로는 사실상 하나의 규격, 즉 90mm 전차포, 810마력 엔진을 장착하고 45톤 정도의 전투중량을 갖는 전차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3가지 제식 번호를 갖고도 패튼이란 애칭을 공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당시의 일본이 가능하다면 M46이나 M47, 또는 M48의 공여를 바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실제 운용이 가능했는지의 여부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

일본도 육상자위대에 공여되길 바랐던 M47 전차. 일본엔 시험용 단 한 대만 들어왔다.

왜냐하면 독자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일본은 평지 면적이 좁고, 산의 비중이 많은 도서 지형이다. 그리고 여전히 지진이나 화산분화가 드물지 않으며 거기에 더하여 여름에 많은 비가 내리는 기후 조건을 갖고 있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평지의 상당 면적은 논이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하천 또한 제법 많다. 이는 “육상자위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상 적군의 상륙 저지다. 관할 지역에 비해 규모가 작아 기동력이 뛰어난 기갑부대를 요지에 배치해 놓고 있다가 적이 상륙하면 신속 전개해서 막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다. 가상 적국이 바다를 건너와 일거에 상륙시킬 수 있는 전력이 제한되므로 1~2개 기갑사단 정도면 충분히 대적이 가능하다.”란 기사의 서술을 정면으로 제약하는 조건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약 속에 일본 육상자위대가 해당 전술을 전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하게도 지형 제약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로, 철도, 교량 등의 SOC 인프라스트럭처들을 건설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일본에서 실제로 운용된 미국제 및 일본제 전차의 제원을 살펴보자.


<표1>에서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항목은 차폭과 중량이고, 일본제 전차들의 차폭은 현용 3세대 전차인 90식이나 10식조차도 M47보다 넓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61식이나 M24. M41은 모두 차폭이 채 3미터가 되지 않는다. 표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M4A3E8 전차의 차폭이 딱 3미터라는 점을 고려해두기 바란다. 이 상황에서 M47을 도입하겠다는 이야기는 일본 전국의 도로, 철도, 교량을 모두 철거하고 최소폭 3.6미터 스탠다드 사이즈로 바꿔서 건설하겠다는 이야기다. 만일 일본이 한국처럼 전쟁으로 모든 것이 아예 박살난 데 더하여 (실질적) 적대 국가와 직접 국경을 대치하고 있으며, 거기에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 정권의 집권이 허용될 정도로 국가의 존립 이유가 오직 국가와 체제의 생존에만 맞춰졌던 상태였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그것도 전술했듯 MSA협정으로 1952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외 원조에 기반한 무기 도입도 어려웠던 국가에게 가능한 선택이었을까? 심지어 새 전차를 국내에서 개발하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미제 전차를 직도입하거나 라이센스 생산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인데? 결국 당시의 일본의 입장에서 개발하려 했던 전차는 일본의 좁은 도로와 철도, 그리고 교량의 한계에 맞는 크기와 중량에 소련제 전차를 압도할 수 있는 정도의 90mm 전차포와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낮은 접지압을 갖는 가벼운 전차였고 장갑을 희생해서라도 전투중량을 25톤 이하로 묶는, 한 마디로 말해 90mm 전차포를 주무장으로 탑재하는 M24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미국이 M47, 나아가 초기형 M48을 실패작으로 판단했던, 크고 무거운 810마력 엔진의 채용이 가져온 낮은 연비와 짧은 항속거리는 일본의 국내 상황적 한계에선 더 크게 다가올 일이었다. 때문에 연구용으로 도입된 단 한 대를 제외하면 일본은 M47 전차를 도입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보더라도 M47은 61식의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에 굳이 M47 전차 이야기를 끌어들인 것은 아마도 양자 모두 90mm M3 전차포를 채택했기 때문에 포탑의 모양이 비슷해보여서 아니었을까?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 주포를 90mm 전차포로 바꾼 M24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기술적 난이도가 과연 어떤 정도였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선 실제로 90mm급 전차포를 탑재하고 운용되었던 차량들의 제원과 성능들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성능을 비교하기 위해 90mm/L53급 전차포를 탑재한 전차들의 기본 성능을 표로 정리해보자.

<표2>의 첫머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 전차들 중 가장 이른 1942년에 등장한 독일의 6호전차 티거-I이다. 티거-I은 당시 어떤 연합군 전차도 1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격파가능했던 88mm/L56 kwk36 전차포와 당시의 대전차포로는 1천미터 내에서 격파가 힘든 수준의 장갑(전면 100mm, 측후면 80mm)을 두르고 100발 가까운 포탄을 장비하느라 56톤이 되어버린 거체에 700마력 엔진을 조합하여 괜찮은 수준의 기동성을 보여줌으로써 대전기 독일 전차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티거의 등장에 놀란 소련이 만든 대안은 IS-2 중전차다. 당시 소련이 가진 포 가운데 유일하게 티거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크고 무거운 포탄 때문에 장거리 명중률과 발사속도에 한계가 있었던 D-25T 전차포에, 520마력이라는 출력 한계내에서 허용하는 한의 상당히 두터운 장갑을 두르고도 46톤으로 중량을 억제함으로서 생존성과 기동성을 확보했지만 느린 발사속도, 적은 장탄수 때문에 전투방식에 제약이 있다는 한계가 있었던 전차다. 한편 미국은 1945년이 되어 M26 전차를 내놓았다. 이 글의 기준 90mm/L53 M3 전차포와 티거에 별로 떨어지지 않는 장갑을 두르고도 42톤으로 중량을 억제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당시 가용하던 엔진이 34톤급인 M4A3용으로 개발된 8기통 엔진 뿐이라 기동성면에서는 딱히 우수하지 않았다. 다행히 전후에 차체를 늘리고 고출력 12기통 엔진을 장착하며 신형 포탑을 채택한 M46/47에서야 비로소 810마력의 출력을 가진 중량에 걸맞는 엔진을 장착하여 기동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영국이 찾은 대안 A41 센츄리온은 티거보다는 판터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개발이 늦어 결국 종전 이후에 완성되었다. 그 덕에 사이즈에 걸맞는 20파운더 전차포에 합리적인 장갑, 그리고 괜찮은 출력의 엔진이 조합된 전차가 되었지만 중량 또한 무거워져 51톤이 되었고. 그 결과 구동계의 내구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당시 기술로 90mm/L53급 전차포를 탑재하고 그에 상응한 전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 45톤에서 50톤 정도의 중량이 필요했다.

한편 <표3>으로 제시한 전차들은 61식 전차의 목표 중량 25톤 정도의 전투중량을 갖는 전차들이다. 이들 가운데 90mm/L53급 전차포를 탑재한 전차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포인트다. 초기에 생각하던 25톤의 중량한계와 가장 유사한 M41도 76mm/L60 전차포에 최소한의 장갑을 두르고도 24톤의 전투중량이 나오는 상황이니 61식에 상정된 한계중량 25톤이 현실적으로는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 당시의 기술개념으로는 90mm/L53급 전차포를 탑재한 25톤짜리 전차라는 조건은 어느 나라에서도 구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61식 전차의) 개발진이 기초 설계를 해본 결과 90mm 전차포 장착을 전제하는 이상 중량은 최소 30톤이 넘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거기에 산악지형에서의 기동력 시험 결과, M4A3E8이 M24보다 오히려 양호한 기동성을 보였다는 결과가 나오자 61식 전차의 개발조건은 폭 3미터, 차고 2.5미터 이하의 크기를 갖는 차체에 90㎜포를 탑재하고 최고시속 45km로 기동할 수 있는 35톤 전차로 바뀌었고, 결국 61식 전차는 이 요구 조건에 맞춰 완성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35톤이라는 61식의 중량은 90mm 전차포를 장착하고 적합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10톤 가까이 빠진다는 이야기고 여기서 빠지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가 61식 전차의 성능을 결정하는 요인이 될 것이었다.

일본 육상자위대 첫 번째 일본제 전차 61식

61식 전차의 정비가 정발 특별히 더 어려웠을까?

기사는 “61식은 대세가 된 파워팩 대신 1930년대 전차처럼 엔진과 변속기를 별도로 장착해 정비가 어려웠고 볼트식 접합 방법으로 차체를 만들어 방어력도 형편없었다.”고 서술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파워팩 방식의 구동기구를 채택한 장갑차량은 엔진과 변속기가 분리된 차량보다 정비 소요시간도 줄어들고, 파워팩 구동계에 문제가 생긴 경우엔 이를 예비 부품으로 교체하기만 해도 바로 일선 임무에 복귀시킬 수 있으니 운용효율 또한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장점에는 단점도 따르는 법이다. 파워팩은 엔진과 변속기를 일체화시킨 크고 무거운 부품이다. 그리고 전술한대로 61식 전차는 폭 3미터, 차고 2.5미터 이하의 크기와 35톤 중량에 모든 것을 넣어야 하는 전차였다. 그런 전차에 파워팩 구동계를 도입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더하여 파워팩 구동계를 적절히 운용하기 위해선 이를 교환할 수 있는 기자재와 기술, 그리고 충분한 수의 예비부품이 필요하다. 하지만 1950년대에 막 태동한, 미제 전차의 직도입이나 라이센스 생산에 충당할 재원도 없어서 국산 전차를 만들려던 육상자위대에 크고 무거운 파워팩을 탈착하는데 필요한 기자재나 장비, 인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61식으로 구상된 개념이 90mm 전차포를 주무장으로 탑재하는 M24를 만들겠다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M24도 변속기와 엔진이 분리되어 있지만 노후화로 부품공급이 쉽지 않아 수리가 어려운 상태였는데 61식이 딱히 더 정비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61식 전차의 빈약한 방어력은 볼트접합 때문이었을까?

61식의 빈약한 방어력에 대해서는 웃지못할 이야기가 있다. 채용 전에 했던 차체 방어력 시험인지, 퇴역 후 목표물로 시사되었을 때 나온 이야기인지 상세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단지 90mm(105mm라는 이야기도 있다.) 전차포로 장갑만 있는 61식의 차체에 HE탄을 발사해본 사례가 있었다 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탄체의 접촉 신관이 작동하여 폭발을 일으켰어야 했는데 그랬어야 할 HE탄이 전면장갑에서 엔진실 격벽까지(혹은 차체 측면 양쪽면을) 모두 관통해 버리고 엔진실에 남았다던 (그냥 튀어나갔다던) 사례가 있다. 포탄의 신관이 미처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장갑이 얇았다는 이야기니 이야말로 61식의 빈약한 방어력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런데 이것이 기사의 서술대로 볼트접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래 도면을 보자.

그림으로 보는 61식 전차의 각 부분 장갑두께.

이 그림은 전면장갑의 두께를 확인하기 위해 옆에서 본 61식 전차를 도식한 도면이다. 61식이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복합소재가 사용되지 않던 시대니 장갑에 사용된 균질압연강의 두께 자체가 그대로 방어력의 지표가 된다. 그런데 61식 전차는 포방패를 제외하면 100mm를 넘는 곳이 하나도 없디. 포방패와 함께 전차에서 가장 방어력이 좋아야 할 부분인 차체 전방 상면 장갑의 두께가 45mm, 60도의 피탄 경시를 감안해도 90mm급이다. 이를 한번 표2에 그대로 적용해보자

61식 전차는 포방패의 두께만은 그나마 평균치를 달성했을지 몰라도 전면 투영 면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차체 전면의 장갑두께는 다른 전차의 절반 이하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다른 전차들의 피탄경시도 딱히 61식에 떨어지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동급 화력을 가진 전차포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때 61식은 동시대 다른 전차들보다 2베 혹은 2,5배 먼 거리에서 격파될 수 있다는 이야기고. 이쯤 되면 장갑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는 딱히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61식의 형편없던 방어력은 차체를 볼트식 접합방법으로 만들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61식은 용접 차체와 주조 포탑으로 구성된 평이한 구조의 차량이다. 단지 제한된 크기와 한계중량 때문에 변속기 커버가 들어갈 공간이 없어서 M24와 마찬가지로 볼트 체결식 변속기 점검용 커버를 차체 전면에 뒀을 뿐이다. 아래 사진처럼 말이다.

61식 전차의 차체전면장갑은 사진처럼 트랜스미션 점검 커버를 겸한다. 사진은 시제차인 STA1의 모습이지만 기본구조는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기사 주장이 의미하는 대로 해당 부위의 장갑을 볼트접합이 아닌, 용접식으로 결합시켰다면 방어력이 개선됐을까? 절대적으로야 조금 개선됐겠지만 현실적인 효과는 극히 미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미션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포탑을 들어내고 미션을 꺼내야 했을테니 정비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61식은 90mm 전차포를 장착하여 최소한의 화력을 확보하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속도와 괜찮은 기동성을 가진 전차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빈약한 장갑 방어력에 디젤 엔진 채용에도 불구하고 작은 차체로 인한 연료 탑재량의 제한으로 200km에 불과한 길지 않은 항속거리, 딱히 내세울 게 없는 구동성능, 거기에 변속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엉망인 변속 성능 등등이 결합되면서 빈말로도 성공적이라고 평가받긴 어려운 전차가 되었다. 결국 미국은 M24를 대체한다는 명목으로 147대의 M41 전차를 공여했고, 이들은 74식이 배치되기 시작하고도 한참 뒤인 1983년까지 현역에 있어야 했다.

미국이 M24 대체 명목으로 일본 육상자위대에 공여한 M41 전차

61식 전차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기사는 “1960년대는 T-62, M60, 레오파르트1 같은 제2세대 전차들이 속속 배치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만일 제1세대 전차인 61식이 10년 정도 빠른 1950년대에 등장했다면 최악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61식 전차의 성능이 최악이란 소리를 듣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개발당시에 설정한 목표 성능을 달성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제2세대 전차가 나올 시점에 대전형 제1세대 전차를 완성시켰다는 것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이 제2세대 전차를 출현시킨 가장 큰 원인, M65 280mm 캐논으로 발사할 수 있는 전술 핵병기, MK9 그레블 핵폭탄 출현으로 빚어질 파급효과나 유도식 대전차미사일과 RPG같은 성형작약탄 병기를 사용하는 전장의 출현을 예상해서 대응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현실적인 범위로 이야기를 좁히면 1956년 헝가리 혁명 시도 당시, 소련군이 투입했던 - 독일의 판터를 상대할 수 있도록 100mm 전차포 BS-3을 장착한 T-34라는 개념으로 1943년부터 개발을 시작, T-44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 개발을 계속한 결과로 태어난 - 100mm 전차포 D-10를 장착한 T-54/55 전차의 출현을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를 되묻고 싶어질 지경이다. 더하여 61식이 그 성능 그대로 1961년이 아닌 1951년에 개발을 끝내고 등장했다 한들 T-54/55에 대응할 수준의 성능은 아니었기에 평가 자체가 달라질 이유도 없었다.

기사는 또한 “본격 활약해야 할 미래 시점이 아니라 국산이라는 도그마에만 매몰돼 안이하게 개발한 결과였다.”고 단언하지만 전술한대로 61식은 미래를 길게 보고 개발한 전차가 아니라 내일이라도 당장 자위대가 사용할, 일본의 환경에서 운용가능한 T-34/85와 교전할 수 있는 전차로 개발되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기사의 뉘앙스대로 일본이 국산화가 아닌, 미국제 전차를 라이센스 생산의 길을 택했다면 기술적으로야 서방의 다른 전차들처럼 큰 문제없이 1959년에 영국이 개발하고, 후일 나토 표준전차포로 자리하게 될 영국제 52구경장 105mm L7 전차포로 주포를 교체하는 것만으로 T-54/55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은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술한대로 당시, 그리고 현재의 일본 SOC 인프라스트럭처의 상황을 감안해보면 그 선택은 현실적으로 선택지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전차라도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전개시키지 못하면 없는 것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74식 전차에 대한 오해와 이해

기사는 “1962년부터 (61식 전차의) 후속 전차에 대한 개념 연구를 시작했다.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기에 미쓰비시는 일선 배치 시기를 70년대 중반 이후로 상정하고 당시에 활약 중인 최신 전차들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후계자가 바로 일본의 제2세대 전차인 74식 전차로 1975년부터 본격 양산돼 배치가 이뤄졌다.”라고 74식의 개발 초기 단계를 서술한다. 하지만 74식 전차의 개념연구는 기사 서술처럼 1962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61식이 1961년에 제식화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양산되어 부대배치를 시작한 것은 1963년의 일이며, 그 동안은 61식 전차의 세세한 문제들을 수정하느라 새 전차 개발을 검토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계전차 개발이 검토되기 시작된 것은 1964년이며. 그나마도 이 시기에는 105mm포로 주포를 교체한 61식(개) 전차의 개발로 갈 것인가? 105mm포의 탑재를 전제로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 전차를 개발할 것인가를 토의한 것이다. 결국 한계가 많은 61식 전차의 차대로는 중량 증가에 따른 기동력 저하를 시작으로 주포의 발사 속도 유지, 무엇보다도 장갑방어력의 개선이 불가능했기에 새 전차를 개발하는 쪽으로 결정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그리고 1965년은 서방 제2세대 전차의 시발점인 AMX30이 양산을 시작한지 5년, 레오파트1이 양산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시점이라 설계 개념부터 적용할 기술까지 아마 완성된 상태였고. 이들을 조합하여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개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74식 전차
74식 전차 개발에 많은 영향을 준 제2세대 전차들. 프랑스의 AMX30 전차(위)와 독일 레오파트1 전차(아래)

74식 전차는 경쟁자들보다 앞선 기술을 적용했던 것일까?

기사는 “이미 제2세대 전차가 대세가 된 시점이어서 61식의 실패를 교훈 삼아 74식은 배치 시점을 고려해 경쟁자들보다 앞선 기술을 적용하려 했다. 이 때문에 74식은 동종 전차에 비해 등장은 10년 정도 늦었지만 현재 최신 전차들이 채택하는 유기압식 현가장치, 레이저 거리측정기 등을 앞서 장착해 제2.5세대 전차로 분류된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74식 전차를 제2.5세대 전차로 분류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74식 전차가 채택했던 최신 기술들이라는 것들이 74식 전차를 위해 일본이 개발한 기술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예를 들어 유기압 현수장치는 1964년에 개발을 시작했지만 가격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1969년에 결국 엎어진 미국-독일 통합 처기 주력전차 개발계획, MBT/KPz70의 사제차량들에서 처음으로 적용되었던 기술이다. 또한 레이저 거리측정기, 그리고 이와 동시에 컴퓨터식 탄도계산기를 기반으로 하는 사격관제장치라거나 차체의 기동 및 지형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고 조준을 유지하는 주포안정기 같은 기술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1970년대 초반 사이에 다른 전차들에 개량형의 형태로 먼저 도입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74식전차가 개발 초기부터 당대 최신기술의 결과물들을 도입, 장비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사 서술처럼 당시의 일본에 해당 기술을 먼저 개발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74식이 제2세대로 평가되는 다른 경쟁자들보다 그만큼 늦게 개발을 시작하여 최신 기술들을 개발 초기부터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 배치 시점을 고려해 경쟁자들보다 먼저 앞선 기술을 적용했던 것이 아니다.

74식 전차는 정말로 성공적이었던 걸까?

구도로 볼 때 기사는 61식은 실패작, 74식은 성공작으로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완성도가 아닌, 기본 제원이나 성능의 절대치를 감안해보면 조금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표4>는 AMX-30, 레오파트1, 74식 전차, 61식 전차의 제원을 절대치로 비교한 것인데 61식과 제2세대 전차들의 장갑 두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90mm/L53급 전차포를 탑재한 전차들처럼 엄청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일단 제2세대 전차들의 방어력은 장갑의 두께에 기반한 내탄성보다는 피탄경시를 감안한 도탄율과 피탐성 저하. 그리고 기동성에 의한 회피에 중점을 둔 설계이기 때문인데 74식 전차는 AMX-30, 레오파트1처럼 빠른 속도로 회피하거나 이탈하는 게 아니라 200미터까지 25초밖에 걸리지 않는 가속성에 중점을 둔 설계라서 절대 속도가 빠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념은 61식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다. 심지어 AMX-30의 항속거리는 500km, 레오파트1의 항속거리는 600km인데 74식의 항속거리는 300km에 불과하여 짧은 항속거리로 비판받던 61식의 1.5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성능조건들과 차체 사이즈를 감안하여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다시 말해 1950년대의 일본이 1960년대 정도의 SOC 인프라스트럭처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면 61식의 성능은 74식에 비해 딱히 밀릴 이유가 없다고 봐도 되는 게 아닐까?

해당 가정에 맞춰 AMX-30, 레오파트1, 74식 전차, 61식 전차의 제원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온다. 61식의 성능을 제약하던 1950년대 정도의 SOC 인프라스트럭처와 기술력 대신 74식의 개발 배경이 된 1960년대 정도의 SOC 인프라스트럭처와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면 74식에 비해 딱히 떨어지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10%씩 늘어난 디멘전은 105mm/L51을 수용할 여지를 확보하며 10%씩 늘어난 전폭과 차체 체적은 보다 큰 디바이스들을 실을 여유를 확보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MX-30이나 레오파트1 만큼의 성능, 특히 구동 성능을 달성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선전과 달리 74식 전차의 개념이 실제로는 2세대 전차의 표준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61식이나 74식이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딱히 어느 하나가 성공적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한 결과물을 내놓은 상황이 아니다. 그저 시대의 배경에 맞춰 그냥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었지만 시대의 변화로 인해 평가 기준이 달라지면서 하나는 성공하고, 다른 하나는 실패한 것같은 착시를 불러왔을 뿐이다.

74식 전차는 과연 적시에 나왔던 것일까?

만일 74식 전차가 제2세대 전차로서 표준 이상의 성능, 즉 제2세대 전차의 성능 기준인 괜찮은 화력에 AMX-30, 레오파트1처럼 빠른 속도로 위험을 회피하거나 이탈할 수 있고 장대한 항속력을 살려 전술을 전개할 수 있는 전차였다면, 그리고 거기에 더해 유기압 현수장치의 장점을 살려 산악전에서도 효과를 발휘하는 전차였다면 필요할 때 필요한 성능을 내는 적시성의 훌륭한 사례가 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74식 전차는 화력과 개념까지는 어느 정도 베낄 수 있었으되 현실적으로 제2세대 전차의 성능에서 가장 중요했던 속도와 기동성은 달성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미국의 M60이나 영국의 치프틴처럼 방어력과 생존성을 달성한 것도 아니었다. 결국 74식 전차도 61식과 마찬가지로 필요할 때 등장하여 필요한 만큼의 성능을 발휘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에 적합한 사례가 아니었던 셈이다.

거기에 더해 74식 전차의 적시성은 74식 전차의 양산이 시작된 1975년에서 겨우 4년이 지난 1979년이 되면 독일의 레오파트2, 미국의 M1 에이브럼스로 대표될,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된 제3세대 전차들의 양산이 시작한다는 점에서 의문시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일본이 이 개념을 받아들여 제3세대 전차, 90식을 완성시킨 시점은 선진국의 제3세대 전차들이 등장한 지 10년 이상 지난 뒤였다. 물론 74식이 다른 2세대 전차에 비해 조금 더 오랫동안 현역에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20세기 동안 105mm 전차포를 탑재한 전차를 퇴역시킬 수 없었던 어른의 사정 때문에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국이 도입했던 여러 가지 기술들을 도입하여 생존 기간을 늘려왔던 것이지 74식만의 특출난 장점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결국 대전 이후에 개발된 일본 전차를 개발 적시성의 사례로 보는 것 자체가 많이 무리한 주장이란 이야기다.

74식 전차 개발 직후 등장한 제3세대 전차들. 독일 레오파트2 전차(위)와 M1에이브럼스(아래)

마치며

기사에서 10년 먼저 나왔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던 시티폰에 대한 가정 또한 011, 017 핸드폰과 달리 수신이 되지 않았고. 장점이자 존재의의였던 ‘발신’ 기능도 엉망이었다. 이론적으로야 공중전화 반경 200m 내에서만 사용 가능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이하의 거리에서도 걸리지 않는 일이 허다하여 그냥 유선 공중전화를 쓰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동중 사용은 꿈도 꾸지 못했다. 통화 품질 또한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기에 PCS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2년만에 사업을 접었던 것인데 이러한 원인들을 고려치 않은 채 단순히 10년 먼저 나왔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만약에...' 놀이는 흥미로운 지적유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어서 결심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경우, 다시 말해 동시대 결정권자들의 무지나 편견으로 선택되지 않는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지 전제조건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갈 수 없는 길 위에선 성립할 수 없는, 기본 전제가 틀린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에는 만약에...라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도록 하자.

필자 우보형은 2004~2005년 <국방일보> ‘전사 속 신무기’ 연재했다. 2010년 <보급전의 역사>, 2017년 <세계의 병기 대도해>, <조지 패튼 : 내 아는 전쟁>을 번역 출간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 군사사와 병기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보형  nextop4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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