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왜 노동계는 '조국수호'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가

[이광수의 오피니언] 정치 민주화와 노동자 투쟁의 상관관계 역사에서 성찰해보기

  • 기사입력 2019.10.10 08:36
  • 최종수정 2019.10.10 15:05
  • 기자명 이광수

1970년대 한국에서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 그 어떤 집단보다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압하였다. 그들은 ‘노동’이 갖고 있는 폭발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의 폭압적 체제에 억눌려 제 주장을 펴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던 노동계에 변화의 계기가 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진 것은 1978년 경부터였다. 그 첫 사건은 1978년 2월에 터진 동일방직 노동조합 똥물투척 사건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79년 8월에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의 노동조합원들이 당시 제1 야당이던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한 일이 발생한다. 경찰이 전격적으로 신민당사에 진입하여 폭력으로 농성자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21살 김경숙 양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야당의 저항에 불이 붙었고, 김영삼 총재가 제명되고 이어 부마항쟁이 터지고 급기야 10월 26일에 박정희가 암살되고 유신이 무너졌다.

1979년 YH무역사건.

결국 유신 체제가 무너지게 된 직접적 계기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었다. 그런데 그 처절한 노동 투쟁은 부마항쟁 이후 노동 운동이 아닌 정치 민주화 운동으로 고양되어버렸다. 사실 박정희가 죽은 직후 1980년 3월이 되면서 먼저 폭발한 것은 정치 민주화 운동이 아닌 노동운동이었다. 1980년 한 해 2,168건의 쟁의 행위가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90% 이상이 3월에서부터 5.17 계엄 확대 조치 사이에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투쟁은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의 사북탄광에서 터진 노동자들의 시위였다. 신군부는 이 사건의 폭발력을 감지하고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터졌고, 그 후 노동자 투쟁은 잠복기로 접어들게 된다. 5월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신군부 세력은 무엇보다 아직 조직화 되지 못한 노동자 투쟁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억압해서이기도 하지만, 독재에 대한 정치적 항거를 우선적 과제로 삼은 학생과 시민들의 정치 민주화 요구에 노동자들의 요구가 밀려나서이기도 하다.

 

1983년이 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소위 유화 조치를 실행한다. 이 조치가 있고 난 이후에서야 그동안 가라앉아 있던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올 수 있었다. 유화 조치는 구속자 석방, 사면 및 복권, 학원 상주 경찰의 철수 등의 학원자율화조치를 비롯하여 정치인 해금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노동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은 독재 정권 입장에서나 시민의 입장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정권의 단계적인 유화 조치 이후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세력은 다시 결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었는데, 이에 전두환 정부는 1985년 9월 다시 강력한 탄압 정책으로 회귀해 버린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미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노동 운동은 바로 이 민주화의 물결이 다시 도도하게 타오르는 시점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정치 운동이 거세지면서 탄압하는 권력의 힘이 약해지는 시기가 되어야 노동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노동 운동은 권력과 부르주아 시민 모두에게 일차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벌어진 대표적인 노동 운동으로는 1985년 4월에 터진 인천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과 1985년 6월 서울 구로지역의 10개 노동조합이 파업을 일으킨 구로동맹파업을 들 수 있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1970년대 주로 섬유산업 등 여성 중심의 노동 운동을 남성 중심으로, 그것도 대규모 중공업 분야로 옮겨놓았다. 더불어 보통 ‘학출’이라 부르는 학생 운동 출신 노동자가 현장의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을 하며 투쟁을 했고 그 노학 연대 투쟁이 큰 성공을 가져왔다는 의의가 있다. 구로동맹파업은 다음 해까지 구로 지역의 여러 사업장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을 이끌어 낸 연대 투쟁의 대표적인 예이면서 노학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다. 이 파업은 곧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지는 모델로 작동하게 된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 운동은 학생 운동과 긴밀하게 연대하여 민주화 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 노동 운동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개헌 투쟁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전국적 조직체가 없는 상태였음에도 참여 비율이 거세게 늘었고 그 위에서 6.29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도중에 항복 직전인 6월 26일 전국 270여 개 지역에서 전개된 국민평화대행진 당시 부평에서 도로를 완전히 점거한 시위 대열의 한 가운데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창립대회를 열었던 사건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노동자 투쟁이 정치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섰고, 그래서 이후 벌어지는 1987 노동자 대투쟁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29 선언 이후 교수, 교사, 학생의 복직은 거론되었지만, 노동자의 복직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6.29 선언 8개 항 그 어디에도 노동자에 대한 것은 없었다. 권력은 고사하고 정치 민주화의 주역이 된 시민운동가들도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자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는 6.29 선언의 허구성을 규탄하면서 노동자의 원직 복직, 노동자의 부당해고 반대, 구속 노동자 전원 석방, 블랙리스트 철폐 등을 주장했다. 7월 6일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노동자공동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해고 노동자 즉각 복직, 노동3권 완전 보장, 8시간 노동제와 실질 생계비 보장하는 최저 임금제 실시, 노동 운동 탄압하는 국가보안법 즉각 철폐, 노조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 보장 등이 이루어질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87 노동자 대투쟁을 맞이하게 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6.29 항복을 받은 후 정치권과 민주화 운동 세력은 더 이상의 운동의 필요성을 그다지 갖지 못했으니 대부분이 노동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주춤하는 사이 노동자들이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대기업의 대공장 노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들에 이어 중소 규모의 노동자 대중으로 번져나갔고, 이어 서비스 사무직 노동자에게까지 번지면서 노동계 전체로 번졌다. 투쟁의 시작은 6.29 선언이 있은 1주일 뒤인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자가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파업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이 후 마산, 창원, 부산, 구미, 대구, 포항 등 영남권 공단 밀집 지역 및 수도권 지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한국 노동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8월말부터 정부가 강경하게 탄압을 함으로써 차츰 수그러지다가 10월에 대개 마무리 되었다. 1987년 6월29일부터 10월31일까지 총 3,235건의 파업을 벌였고, 이시기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숫자는 122만 5천여 명에 이른다. 신규 노조는 7월 한 달만 126개에 이르렀으며 연말까지 1,361개의 노조에 22만 명의 조합원이 새로 등록하였다. 노동조합 결성은 1988년과 1989년까지 쉬지 않고 불이 붙었으니, 1986년 2,675개의 노조, 103만 6천 명의 조합원이었던 것이 1989년에는 노조 7,883개에 노조원 193만 2천 여 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3년 사이에 노동조합은 3배, 조합원수는 76.8% 조직률은 1986년 12.3%에서 1989년에는 18.6%까지 상승한 것이니 실로 획기적인 노동 운동의 개가였다. 그 이전까지는 금기시됐던 재벌 기업과 공기업에서도 대대적으로 노조가 결성되었고, 어용 노조 또한 민주 노조로의 변화를 위한 싸움에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 주효했다. 6.29 선언 이후 노동자들의 태도는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배신감을 갖긴 했으나 일단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그 참여는 민주화 이후 노동 운동을 단계적으로 끌고 갈 토대를 만들었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었다는 데서 매우 탁월한 전술로 평가할 수 있다.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진보의 원동력으로서 노동 운동은 세계사적 발전 속에서 민주주의 대중으로부터 분리가 아니라 연대가, 노동자 계급의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해방의 과제보다는 전(全) 민족 대중과 함께 하는 과제의 해결이 더 중요하게 대두될 때 큰 힘을 발휘했다. 87년 이전의 한국의 노동자들이 6월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한 것은 이러한 세계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서 볼 때도 제대로 된 길을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또 다시 거대한 정치 민주화 운동에 휩쓸려 있다. 선출된 권력에 의해 지명된 일개 정부 부처의 일개 외청에 불과한 검찰이 대통령이라는 국민을 대표하는 직에 난(亂)을 일으키고 있다. 분노한 국민은 또 다시 촛불을 들었고, 이에 사력을 다해 수구 세력이 저항하고 있다. 그런데 눈에 띠는 현상이 하나 있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 정치 진영은 어중간 한 자세를 취하면서 한 발 빼고 있고, 노동계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상당수는 ‘조국 수호’를 버리면 ‘검찰개혁’ 촛불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으나, 그 목소리는 소위 촛불 시민들에게 거들떠 보여 지지도 않는다. 진보와 노동 세력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를 탄핵시킨 이후 들어서는 데는 자신들의 공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그들이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혹은 더 나아가 처절하게 배신당했다는 심정으로 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냉정해야 할 때다. 80년 이후와 87년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진보는 대중과 연대하지 않는 곳에서 그 어떠한 것도 이룬 적이 없다. 대중과 연대하여 힘을 키우고, 그 위에서 다시 싸우는 그것이 진보의 역사다. 대중과 연대하는 싸움에서 비켜 나 있을 때 그 후 진보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 대중과 연대하고 싸운 후에도 그 마땅한 몫을 챙기지 못하는데, 어찌 참여하지 않고 몫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유혈 혁명을 한다면야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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