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노동자' 증가, 그 섬뜩한 미래

  • 기자명 이경혁
  • 기사승인 2018.09.1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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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혁의 게임 팩트체크] 노동과 놀이의 경계선은 무엇인가

얼마 전, 굉장히 보기 드문 제목의 뉴스가 여러 포털과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다음과 같다. <“왜 게임 안 해” 자녀 폭행한 40대 아빠 실형>. 일상적인 제목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일상적인 뉴스들과 뭔가 사뭇 다른 지점이 보인다. 그렇다. 게임에 빠진 아이를 폭행한 것이 아니라, 게임을 안 하기에 폭행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보통 게임, 자녀, 폭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제목의 뉴스는 본문을 읽지 않아도 내용의 조합이 가능하다. 게임에 빠진 자녀를 훈계하다 폭행에 이르렀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뉴스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자녀가 게임을 하지 않아 폭행했다고 한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 것일까.

뉴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 더 상세한 맥락을 알 수 있다. 피고인 ㄱ씨는 집에서 자신의 자녀 2명에게 자신이 플레이하는 성인용 인터넷 게임을 강제로 플레이하도록 시켰다. 아마도 레벨을 손쉽게 올리거나 아이템 파밍(아이템을 구하는 작업)을 대신 수행해주길 바라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플레이를 하진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ㄱ씨는 화를 내며 아이들을 폭행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ㄱ씨는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일반적으로 미디어에 비춰지는 게임은 대체로 너무 하고 싶어 문제가 일어나는 무언가로 등장하곤 했다.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일상을 집어던지고 오직 게임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주로 미디어는 중독이나 과몰입 같은 개념으로 묶어 다루곤 했다. 그러나 이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흥미롭게도 뭔지 알 수 없는 특정 게임 하나를 두고 그와는 정 반대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 게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폭행을 시도한 아버지와 폭행당한 두 자녀 모두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을 그리 즐거워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놀이노동: 게임 플레이는 놀이인가, 노동인가?

즐거운 놀이로 여겨지던 게임이 재미없어지면 사실 안 하면 그만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게임들은 재미가 없을 경우 대체로 플레이어들로부터 외면받기 마련이다. 재미가 없어도 꼭 해야 하는 게임이 있을까? 재미라는 단어의 두터움이 여러 가지로 나뉘긴 하겠지만, 정말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게임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경우는 게임사에서 특정 게임을 모니터링하기 위한 업무의 일환으로 플레이하거나 몇몇 게임칼럼니스트들이 글감을 위해 억지로 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드물 것이다. 이런 경우의 플레이는 어느 정도 노동으로서의 의미와 가까울 것이다. 재미는 없더라도 이 플레이를 통해 새로운 게임 제작의 실마리를 얻는다거나, 새로운 글감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재미없는 게임의 플레이는 급여의 대가이거나 새 생산의 원료로 기능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노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앞선 뉴스에서 벌어진 일들도 이와 비슷하다. 재미가 없으면 안 하면 되는 것을 놓고 가해자는 자기가 하기 싫으니 자녀에게 게임 플레이를 던졌고, 자녀들도 하기 싫어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폭행을 가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게임이길래 재미가 없어도 반드시 플레이는 해야만 했던 것일까? 사실 최근의 게임들을 접해 본 사람들은 추측이 그리 어렵지 않은 장르들이 있다. 이른바 한국형 롤플레잉 게임들이다.

강한 현질유도, 제한된 숙련도로 구성되는 최근의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들은 게임의 그 과정 자체보다는 달성된 결과를 토대로 쌓인 플레이어 캐릭터의 상대적 지위가 주는 만족감을 목표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대량의 시간을 쏟아붓거나 그에 상응하는 현금 구매 없이는 어지간해서는 만족감을 채우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하는 이러한 게임들의 양상은 그 과정을 일명 ‘노가다’ 로 부르는 플레이 형식으로 귀결되게 만든다. 빠른 레벨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플레이의 과정은 최대한 생략되어 ‘공격 성공 / 실패’ 가 단시간에 결과로만 뜨는 정도로 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플레이의 과정은 말 그대로 노동의 형태가 되어버린다.

가해자는 아마도 특정 게임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지위를 얻고 싶어했을 것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플레이타임 이상의 무언가를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다. 자녀들을 동원해 플레이타임을 늘리고 이를 통해 아이템과 경험치를 수급하여 원활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아쉽게도 자신에게 재미없는 게임은 아이들에게도 그다지 재미있기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동학대는 결국 스스로를 징역형의 길까지로 몰아붙이는 안타까운 결론으로 도달하고 말았다.

배틀그라운드 한 장면.

멀티플레이 시대에는 나의 플레이 자체가 게임의 완성이기도 하다

플레이의 과정이 노동이 되는 모습은 비단 이러한 게임에서만 새롭게 드러난 현상은 아니다. 현대 게임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들에서 놀이이자 노동으로서의 플레이는 자주 목격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결과 중심의 게임만이 가진 문제는 아니다.

최근 크게 유행했던 PC게임 ‘배틀그라운드’를 돌이켜 보자. 이 게임은 100명의 플레이어가 한 지형 안에 모여 점점 좁아져 가는 생존구역 안으로 몰려들어가며 서로를 견제하고 없애가며 최후의 1인으로 생존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게임이다. 전방과 후방이 없는 긴장감, 다채로운 상황을 만드는 랜덤성은 보기드문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게임 역사에 ‘배틀로얄’이란 장르를 본격적인 주류 장르로 올려놓는 데 큰 기여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 게임에 참여하는 그 100명은 오로지 소비자일 뿐인 것일까?

나 외의 99명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규칙 하에 함께 싸우는 적이면서 동시에 게임의 구조를 완성시키는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참여하는 개개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에게 나머지 99명은 내 게임 플레이를 위한 재료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동시에 플레이하는 나 또한 누군가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요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단지 물적 기능만을 수행한다는 단순한 의도는 아니고, 멀티플레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별 게이머들에게 도전과 극복의 대상으로서 자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게임사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 게이머 스스로 참여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상호작용이 가능한 모든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개별 게이머는 일종의 놀이노동으로서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내가 전술적으로 움직이고 노출된 적에게 유효한 사격을 가하는 것은 곧 상대 플레이어에게는 상당한 수준의 도전적 난이도로 게임의 재미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멀티플레이는 이미 상업콘텐츠 안에서 유의미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노동이며, 이는 다시 놀이로 참여했던 의도와 맞물리며 놀이노동이라는 개념을 창출해 낸다.

 

다가오는 미래에는 반드시 '게임 = 재미' 는 아닐 수 있다

놀이노동은 단지 게임 구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는 일부 현금거래가 가능한 온라인 게임들 속에 들어가 각종 아이템을 파밍하고 골드를 획득해 되팔기 위한 일명 ‘작업장’ 이 성행한다. 게임 아이템을 게임 속에서 수집해 되팔고 이를 현금화하면 플레이에 들어가는 노임 이상의 수입을 거둘 수 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게임 플레이는 본격적으로 놀이노동의 환경 안에 들어오게 되며, 작업장에서의 게임 플레이어는 플레이어가 아닌, 놀이노동자로서의 의미로 더 강하게 부각될 수 있게 된다.

뉴스 속에 등장한 가해자 ㄱ씨가 무슨 게임을 플레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게임 속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되는 무엇이었다면 아이들은 정말로 유사노동에 종사한 것이고, 그정도까진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ㄱ씨의 만족을 위해 무언가를 쌓아 놓는 게임 안에서의 놀이노동으로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 보편화되고 의미를 확장해가면서 이제는 게임이 반드시 재미라고만 범위를 한정하기는 어려운 시대도 열리고 있다. 재미없는 게임을 강제로 시키며 폭행한 행위가 아동학대법으로 처벌받은 이번 사례는 그래서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매우 섬뜩한 구석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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