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대통령 친위세력 공천으로 여당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가 많다?

  • 기자명 김정은 기자
  • 기사승인 2023.02.1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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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시대'에는 대통령이 총재직 겸해, 모든 총선을 똑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어
盧정부 '당정분리'의 시초,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했지만 공천에 개입하지는 않아
MB때 18대 총선, 친이계-친박계 갈등 격화 / 朴때 20대 총선, '옥새들고 나르샤'
대통령 친위세력 위주의 총선공천이 이뤄졌던 건 7건 중 2건뿐, 총선에서 진 경우는 1건
尹, 당선 직후 "대통령은 당 사무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어"

경향신문은 지난 1월 31일 <너무도 강박적인 '윤석열당' 만들기>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사진=경향신문

경향신문은 지난달 31일 <너무도 강박적인 '윤석열당' 만들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의 노골적인 여당 전당대회 개입을 비판한 글인데, "대통령 사람" 위주의 친위세력 공천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언급(아래 참고)했습니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과 윤핵관이 '친윤 대표'에 혈안인 것은 내년 총선 공천권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공천권을 마음대로 행사해 명실상부한 '윤석열당'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포석이다. (중략) 대통령에 종속화된 여당과 '대통령 사람' 위주의 친위 세력 공천이 총선 승리를 담보할 수 있을까, 역대 총선 결과는 그 반대를 보여주는 경우가 더 많다."

대통령의 입김이 공천에 작용하면, 총선에서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인데요. 뉴스톱이 확인해봤습니다. 

 

◈ YSㆍDJ... '제왕적 총재', '제왕적 대통령'이 공천을 주도

공천이란 정당이 공직선거 후보자를 추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는 당내에서 '경선'과 같은 민주적인 방법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를 결정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의 입김이 공천에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직해, 공직 후보의 공천권을 장악했던 게 하나의 '관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군부독재가 종식된 이후인 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좌)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우)김대중 대통령이 취임식 본행사에서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1993년에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5대 총선이 치러지기 두 달 전인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바꿔 '신한국당'을 창당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 "신한국당의 김윤환 대표위원은 청와대 주례당부보고를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당의 공천심사결과를 보고한 뒤, 복수추천지역에 대한 김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공천자를 최종 확정했다"는 보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당 총재 겸직이 제도화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통령의 공천 개입은 당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한국당은 299석 중 139석을 차지해, 79석을 차지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제쳤습니다.

1998년에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의 총재를 맡았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공천심사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공언하며 공천개혁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실제로 당시 대통령 정부수석비서관과 청와대 상황실장 등 '가신 출신'이 총선 공천에서 배제돼 높은 평가를 샀습니다. 하지만 "수도권ㆍ호남 등 핵심지역은 수뇌부의 조율에 의한 내천이나 실세들의 '막판 밀어넣기'로 공천자가 결정됨으로써 투명성에 흠집을 남겼다"는 지적이 나와, 여전히 '제왕적 총재'이자 '제왕적 대통령'이 당무에 개입하는 관행이 남아 있었습니다. 한편 16대 총선 때는 273석 중 한나라당이 133석을, 새천년민주당이 115석을 가져가 '여소야대' 정국을 맞이했습니다.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당 총선 공천에 개입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대통령이 총재를 겸하던 관행과 공천 후보자들이 총재에 바치던 정치자금이 합법적이었던 맥락을 고려해, 뉴스톱은 두 정부의 공천개입과 총선결과의 관계를 분석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 盧의 참여정부 '당정분리' 공식화, 열린우리당 지지 호소했지만 공천에는 개입하지 않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SBS뉴스 <대통령의 선거개입: 대통령 발언과 탄핵>

김대중 정부까지 이어지던 정당과 정부의 일원화는 2003년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 정부 때 청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였습니다. 하지만 집권 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세력인 '동교동계'와 '친노무현계'의 갈등으로 친노무현계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4월에 실시된 17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호소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은 총선을 한 달 앞두고, 대통령의 특정정당 지지 발언이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다며 탄핵을 소추했습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299석 중 152석을 차지해 과반을 획득(아래 표 참고)했고,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려 상황은 종결됐습니다.

제17대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이 299석 중 152석을 차지했다. 제작=뉴스톱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을 뽑아달라고 호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권력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당정분리'를 내세워 공직자 공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는 "대통령이 총재의 권력을 포기하고 당직 임면권과 재정권, 공천권을 갖지 않는다"며 대통령의 총재권한을 포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했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국회의원 후보자를 추천하는 '공천'에는 개입하지 않았던 겁니다. 

 

◈ 15대부터 21대 총선까지 공천파동 잡음 컸던 사례는 2건뿐

① [MB정부] 18대 총선, '친이계' VS '친박계' 

그렇다면 경향신문 칼럼이 주장하듯 '대통령 사람' 위주의 총선 공천이 있었던 때는 언제였을까요? 뉴스톱이 뉴스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와 국회가 운영하는 '국회의 역사' 등을 검토한 결과,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치러진 18대ㆍ20대 총선에서 공천파동이 이뤄졌음을 확인했습니다. 

 

2007년 8월, 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경선 후보 합동토론회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맞섰다. 사진=KBS더라이브 <최순실부터 BBK까지, 알고보니 예언? 전설의 2007년 경선 돌아보기>

18대 총선에서는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의 계파 간 갈등이 분쟁의 시초였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시절이었을 때부터 친박계에 경고장을 내밀었습니다. 2007년 <뷰스앤뉴스> 보도에 의하면 "이명박 최측근 정두언 한나라당 위원이 박근혜계의 최측근 이혜훈, 곽성문 의원을 지목해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친이계는 대통령의 당선 직후에도 '당정 분리'를 손봐야 한다고 주장했고 친박계는 당정 분리 당헌을 유지해야 한다고 맞서, 한동안 대립을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했습니다.

제18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이 299석 중 153석을 차지했다. 제작=뉴스톱

이후 2008년 이 전 대통령의 취임 두 달 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도 당내 분쟁은 격화됐습니다. 친이계가 친박계를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키면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공천심사위원회의 '무원칙한 공천'을 비판한 겁니다. 결국 총선 직전 친박계는 이명박 정부에 반발하는 의미로 '친박연대'를 만들어, 집권여당의 분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압승'이었습니다. 299석 중 153석을 차지해 원내 과반수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위의 표 참고). 심지어 직전 총선보다 무려 10.71%p 증가한 점유율(51.17%)을 기록해, 통합민주당은 물론 '친박연대'까지도 무대 뒤로 퇴장시켰습니다. 경향신문이 주장한 것과 다르게, '대통령 사람' 위주의 친위 세력 공천이 총선에서 승리한 사례인 셈입니다.

 

② [박근혜 정부] 20대 총선, "배신의 정치" VS "옥새들고 나르샤"

19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시절 치러졌지만, 정권말 레임덕으로 인해 실권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친이계-친박계'의 화합을 내세우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300석 중 152석을 얻어 과반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총선 승리의 기세를 탄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대통령 자리에 앉았습니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의 '공천 개입'을 비판했는데, 2016년 정권 말 이뤄진 20대 총선에서도 전임 정부와 똑같은 행보를 보여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20대 총선을 앞두고 '옥새파동'을 패러디한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국민의힘 유튜브 채널 '오른소리'

20대 총선에서는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비박계'와 '친박계'의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 정부의 정책기조를 정면 지적하며 싸움이 시작된 겁니다. 박 전 대통령은 유승민 대표를 겨냥하며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고 맞섰고, 유승민 의원은 총선 한 달 전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다. 이후 김무성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공천개입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몇몇 선거구에 대한 공관위 추천장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며,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는 3월 25일 저녁까지는 최고위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결과적으로 합의가 이뤄져 총선이 무사히 치러졌지만, 이른바 '옥새파동', '옥새들고 나르샤'라고 불리는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공천 개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낙인됐습니다.

제20대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이 300석 중 123석을 차지했다. 제작=뉴스톱

총선 직전까지 이어진 공천 파동으로 결국 더불어민주당이 1석 차이로 승리해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했습니다(위의 표 참고).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50.66%의 의석률을 기록했던 새누리당은 20대 총선에서 40.66%를 기록해 10%p나 하락한 성적을 받게 됐습니다. 20대 총선 결과는 경향신문의 분석대로 친위 세력 공천이 총선에서 패배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명박 정권 말 치러진 19대 총선과 문재인 정부 때 실시된 21대 총선에서도 잡음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내 공천 결과를 두고 갈등이 불거졌고, 21대 총선에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한 '위성정당' 창당으로 민주당이 180석을 확보하자 문 전 대통령은 "위대한 국민의 선택에 기쁨에 앞서 막중한 책임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총선에서는 당내 공직선거자를 추천하는 공천에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는 논란이 불거지지는 않았습니다. 빅카인즈 등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대통령의 공천 개입이 명확하게 드러났던 건 18대 총선과 20대 총선뿐이었습니다.


제15대 국회부터 제21대 국회까지 분석한 결과, 대통령이 집권당 총재직을 겸하던 '3김 시대' 등을 분석에서 제외하면 '대통령 사람' 위주의 총선 공천이 이뤄진 경우는 7건 중 2건(18대ㆍ20대총선)뿐입니다. 그 중 MB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18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승리했고, 박근혜 정부가 개입한 20대 총선에서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했습니다. 분석 대상에 해당하는 18대와 20대 총선 중, 20대 총선만이 경향신문의 주장에 들어맞는 사례인 겁니다. 대통령의 당무개입 논란 외에도 대통령 지지도, 야당 지지도, 야권 분열, 경제상황  등 선거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많기 때문에 소위 당청갈등이 가장 강력한 팩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한편 경향신문이 칼럼에서 지적했듯, 대통령실이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나경원 등 일부 국회의원을 압박해 주저앉힌 것은 사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당선 직후 "대통령이 된 저는 모든 공무원을 지휘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당 사무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약속했던 '당정분리'를 잘 지키고 있는지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뉴스톱은 "대통령 사람 위주의 친위세력 공천이 총선에서 지는 경우가 많다"는 경향신문의 주장을 '절반의 사실'로 판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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