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 5분 대작 <이누가미의 결혼>, 판타지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03.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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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이누가미의 결혼> 카타시마 익키 감독

A man tells his stories so many times that he becomes the stories.

그 자신이 이야기가 된 한 남자가 있다.

They live on after him.

그는 사후에도.

And in that way, he becomes immortal.

이야기로 남아 불멸이 되었다.

‘이누가미의 결혼’의 주인공 아즈사(아리모리 나리미 분)는 동화의 힘을 믿는 초등학교 교사. 악전고투를 거듭하다 돌연 남방의 섬으로 모험을 떠난다.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기이한 인물들을 만나며 스스로‘이야기의 일원’이 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이누가미의 결혼’의 주인공 아즈사(아리모리 나리미 분)는 동화의 힘을 믿는 초등학교 교사. 악전고투를 거듭하다 돌연 남방의 섬으로 모험을 떠난다.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기이한 인물들을 만나며 스스로‘이야기의 일원’이 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빅 피쉬>(팀 버튼 감독). 대한극장, 마지막 회.

엔딩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제인 '부자간의 화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감독의 연출력도 좋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뒤 ‘영원히 사는 물고기’로 환생한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이완 맥그리거알버트 피니)이 달 밝은 호수 위로 뛰어오르는 장면에 깔리던 윌(빌리 크루덥)의 내레이션이 가슴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평생 허풍쟁이로 오해받았던 아버지는, 실은, 이야기꾼이었다. 서사를 만들어내고, 이해하며, 향유하는 존재. 그의 모든 언사가 반드시 진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신화, 전설, 설화, 민담, 그리고 동화(fairy tale)의 일부, 혹은 전체의 모티브를 재구성할 수도 있다. 그는 ‘진술(testimony)’이 아니라 ‘이야기(story)’를 전하는 사람이니까.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으로 논문을 쓰던 시절 이 한편의 영화를 통해 새삼 명쾌하게 정리했던 ‘판타지의 정의’를, 나이 마흔이 넘어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어머니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지방중소도시의 작은 영화제(오카야마영화제)에서다. ‘2시간 45분? 좀 길기는 하지만 보기 망설여질 정도는 아니네’ 하는 착각으로 객석에 앉은 필자를 ‘4시간 5분(245분)’동안 꼼짝없이 붙잡아두었지만, 인터미션 중에도 뒤에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게 만든 영화 <이누가미의 결혼>을 거기서 만났다.

‘이누가미의 결혼’은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민담의 특성과 영화의 본질이 갖는 공통점에 주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이누가미의 결혼’은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민담의 특성과 영화의 본질이 갖는 공통점에 주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견신(犬神, 이누가미) 민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누가미의 결혼>의 주인공 아즈사는 동화의 힘을 믿는 초등학교 교사. 원인 모를 병으로 직장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이고, 설상가상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에게까지 이별통보를 받는다. 순간 하늘에게 계시가 내려온다. ‘아모레이섬에 가서 보물을 찾아라.’ 그는 곧장 남방의 섬으로 모험을 떠난다.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사기꾼 혁명가, 히키코모리 가수 등 기이한 인물들을 만나며 스스로 ‘이야기의 일원’이 된다.

물론 스토리 말고도 <이누가미의 결혼>는 여러 면에서 관심이 가는 작품이었다.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한영혜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했고, 월요미스테리극장, 화요서스펜스극장 등을 즐겨본 시청자라면 얼굴을 보는 순간 ‘아아!’하며 탄성을 지를만한 배우 아리모리 나리미가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포인트는 역시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다.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69』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카타시마 감독은 ‘독립영화의 대부’ 와카마츠 코지(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 감독과 커리어를 쌓아 데뷔했고, <번지점프를 하다>의 작가 고은님이 “내 인생의 영화”로 꼽아 화제가 된 <포스트맨 블루스>로 프로듀서에 데뷔했다. 특히 ‘프로듀서 카타시마 익키’의 경력은 눈부시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수상한 거장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피스톨 오페라>, 칸영화제 초청작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이노우에 준이치 감독의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전쟁과 한 여자>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파격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은 <아시아의 순진> 이후, 7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이누가미의 결혼>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그를 만났다.

‘이누가미의 결혼’은‘아시아의 순진’이후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 그렇다고 공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거장들의 프로듀서로 베니스영화제와 칸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을 섭렵한 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사진촬영: Ryo Hasegawa
‘이누가미의 결혼’은 ‘아시아의 순진’이후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 그렇다고 공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거장들의 프로듀서로 베니스영화제와 칸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등을 섭렵한 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사진촬영: Ryo Hasegawa

홍상현

영화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오셨다.

카타시마 익키

아시아 최대 규모 장르영화제라는 점에서 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막상 와 보니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오고 있는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개최지가 전형적인 지방의 중소도시인데 반해, 엄청난 규모의 수도권도시에서 20년 이상 색깔이 또렷한 영화제를 개최해오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홍상현

대학(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 재학 중이던 70년대부터 8밀리 영화를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작품에서 엿보이는 펑크적인 분위기는 당시의 시대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가.

카타시마 익키

꼭 ‘유행해서’라기보다 ‘개인적인 선호와 맞물렸다’는 표현이 적확하겠다. 런던 펑크가 트렌드이던 게 1975년 무렵인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록음악 매거진을 즐겨 읽고, 음악은 물론 영화와 연극 등의 장르를 관통하는 펑크스피릿을 좋아했다. 그러다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반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펑크스피릿으로 넘치는 스즈키 세이준이라는 영화작가를 접한 거다.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록음악 매거진을 즐겨 읽고, 음악은 물론 영화와 연극 등의 장르를 관통하는 펑크스피릿에 열광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이러한 취향은 ‘이누가미의 결혼’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록음악 매거진을 즐겨 읽고, 음악은 물론 영화와 연극 등의 장르를 관통하는 펑크스피릿에 열광하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이러한 취향은 ‘이누가미의 결혼’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한영혜 주연의 <아시아의 순진>도 같은 맥락의 작품 아닌가.

카타시마 익키

날카로우시다. (웃음) 감독으로서의 필모그래피가 쌓여갈수록 제 스스로도 말씀하신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홍상현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와카마쓰 사단’출신이다. <이누가미의 결혼>에서도 특유의 컬러를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카타시마 익키

먼저 ‘독립영화’라는 제작여건상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다. 또한 과거 몇 가지 조건만 지키면 내용이나 스타일 면에서 자율성을 인정한 까닭에, 오늘날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대거 몸담았던 이른바 ‘핑크무비’의 특징 또한 발견하셨겠고. 다만, ‘핑크무비’는 흔히들 생각하는 성인물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다. 일단 노출 장면이 나온다 해도 선정적인 느낌을 부각시키지 않거든. 도리어 정치ㆍ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들이 많고 제 작품 역시 그렇다.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경험삼아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술회하는 ‘포스트맨 블루스’는 당시 신인이던 사부를 일약 스타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카타시마 감독은 요즘도 종종 이 작품과 관련한 질문을 받는다. 사진출처: 왓챠 갤러리
카타시마 익키 감독이 ‘경험삼아 프로듀서를 맡았다’고 술회하는 ‘포스트맨 블루스’는 당시 신인이던 사부를 일약 스타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카타시마 감독은 요즘도 종종 이 작품과 관련한 질문을 받는다. 사진출처: 왓챠 갤러리

홍상현

21세기 초 한국에서 공개되어 말 그대로 ‘돌풍’을 일으킨 <포스트맨 블루스>의 프로듀서였다.

카타시마 익키

아시다시피 <포스트맨 블루스>는 제 프로듀서 데뷔작이다. 절실하고도 치열한 시간이었다. 원래 감독을 지망했기 때문에 이 또한 하나의 경험이라는 임했는데, 평생 관련 질문을 받는 작품이 될 줄이야. (웃음) 사부(SABU)도 유명감독이 되었고.

‘피스톨 오페라’(스즈키 세이준 감독)는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화제작이지만 카타시마 익키 감독에게는 당시 열 살이던 한영혜를 만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사진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피스톨 오페라’(스즈키 세이준 감독)는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화제작이지만 카타시마 익키 감독에게는 당시 열 살이던 한영혜를 만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사진출처: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홍상현

또한 ‘프로듀서 카타시마 익키’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스즈키 세이준 감독이다.

카타시마 익키

스즈키 세이준은 대학 시절부터의 동경하던 크리에이터다. <지고이네르바이젠>, <아지랑이좌> 같은 작품들로 유명했다. 저와는 당시 열 살이던 한영혜의 데뷔작인 <피스톨 오페라>, 그리고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등의 작품을 같이했는데 기본적으로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뭔가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프로듀스한 건 아니다. 저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협업을 했지. 당신께서도 뭔가를 일방적으로 제안하기보다 소통을 중시하는 분이셨고.

칸영화제 초청작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으로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에 정점을 찍는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당시 아시아영화계에서 주가를 올리던 장쯔이와 한국에도 팬이 많은 오다기리 조의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출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칸영화제 초청작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으로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프로듀서로서의 명성에 정점을 찍는다.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당시 아시아영화계에서 주가를 올리던 장쯔이와 한국에도 팬이 많은 오다기리 조의 공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사진출처: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홍상현

역시. (웃음) <피스톨 오페라>에서 한영혜와 만난 이후, 현재까지 당신이 대표로 있는 프로덕션에서 함께해오고 있다. 20년 인연인데, 당신의 입장에서 보는 그녀의 발전상이 궁금하다.

카타시마 익키

제게는 친자식 같은 사람이다. <피스톨 오페라> 오디션에서 만났는데 스즈키 감독이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응시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영혜의 부모님들로부터 매니지먼트를 맡아주시면 안되겠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본인에게 “정말 배우가 될 생각이 있느냐. 아무리 어머니,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도 본인의 의지가 없다면 힘든 일”이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당시 영 살 남짓이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부모님께 다시 “우리 회사는 제작사이지 매니지먼트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여쭤봤더니 “신뢰관계가 필요한 일이니 아무 기획사에나 맡길 수 없다”고 하셨다. 그게 ‘팀 한영혜’의 시작이다.

물론 경영자가 아니라 창작자인 나와 함께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을 거다. 한편으로, 바로 그랬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 한영혜’의 모습에 좀 더 다가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지금도 드라마에 출연중인 영혜의 모습을 보고 말을 보태지 않는다. 사람의 일이니 부침이야 있겠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에 오롯이 힘을 쏟을 수 있는 연기자로 부단히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20대의 마지막에 <국화와 단두대>(제제 타카히사 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라는 작품을 만나, 재일한국인으로서 상징적인 캐릭터를 소화해 낸 것은 무척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누가미의 결혼’은 애초부터 주연배우인 아리모리 나리미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 다만, “캐릭터의 농도가 짙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주인공은 시종일관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가야 하니 배역의 난이도가 높았다”고. 사진은‘이누가미의 결혼’ 오리지널 포스터.
‘이누가미의 결혼’은 애초부터 주연배우인 아리모리 나리미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 다만, “캐릭터의 농도가 짙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주인공은 시종일관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가야 하니 배역의 난이도가 높았다”고. 사진은 ‘이누가미의 결혼’ 오리지널 포스터.

홍상현

<이누가미의 결혼>의 모티브는 민담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내용을 보면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현대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풍자한다.

카타시마 익키

민담이란 세대를 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이는 영화의 본질과도 통한다. 그래서 한 세대의 영화가 다음 세대로부터도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거겠지. 이러한 점을 감안한 구상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 작품이 <이누가미의 결혼>이다.

 

홍상현

<이누가미의 결혼>에서는 사운드트랙이 큰 역할을 한다. 이를 지금까지 당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특징이기도 하다.

카타시마 익키

이전에 저는 영화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의도적으로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운드트랙이라는 표현요소에 주의를 기울인다.

<아시아의 순진>의 경우, 영혜가 노래방에 가는 장면까지 어떤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이후 방랑을 시작할 무렵부터 BGM이 쓰인다. 이런 형태를 유지하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두 사람이 영화 타이틀과 같은 제목의 노래를 함께 부르도록 했다. <예를 들어, 레몬>에서도 중반부터 BGM이 삽입된다. 그리고 <이누가미의 결혼>에 대해 언급해보면, 이전까지의 형식을 유지하지는 않았지만 “볼레로”에 맞춘 발레 장면이 계속 나온다. 주인공이 가운데 서 있는데 이는 작품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성이 있다. 주인공이 다른 등장인물에게 ‘색을 입히는’역할을 해서다.

한 세대를 대표하는 개성파 배우인 에모토 아키라는 ‘이누가미의 결혼’의 시나리오를 읽고“대사가 많아 연기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며 출연을 결정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한 세대를 대표하는 개성파 배우인 에모토 아키라는 ‘이누가미의 결혼’의 시나리오를 읽고“대사가 많아 연기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며 출연을 결정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히로인(아리모리 나리미)의 캐스팅에 대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획에 그녀를 합류시킨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녀를 염두에 두고 기획이 진행되었다고 들었다.

카타시마 익키

아리모리 씨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정리해놓은 플롯을 읽다가 “와, 이거 하는 거예요? 만만찮겠는데?”라고 하더라. (웃음) 캐릭터의 농도가 짙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주인공은 시종일관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어가야 하니 배역의 난이도가 높았다. 특히 함께 출연한 유명 뮤지션 등은 연기력만으로 평가 받는 게 아니다 보니 더더욱 쉽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겠지. (웃음)

 

홍상현

상영시간 4시간 5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중 가장 긴 작품이기도 했다. 극장 공개를 감안한다면 갈등도 되었을 텐데. (웃음)

카타시마 익키

3시간 정도라면 편하게 볼 수 있는 오락영화로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래도 일부러 긴 상영시간을 고집했다. 투자자가 따로 있는 메인스트림 영화가 아니다 보니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 딱히 제한을 받지도 않았고.

어슬렁어슬렁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다 슛이 들어가면 대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외워버리는 후배, 에모토 아키라와 달리 이시바시 렌지는 촬영 직전 리허설을 하며 실제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체크할 만큼 용의주도한 연기자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어슬렁어슬렁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다 슛이 들어가면 대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외워버리는 후배, 에모토 아키라와 달리 이시바시 렌지는 촬영 직전 리허설을 하며 실제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체크할 만큼 용의주도한 연기자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시바시 렌지에모토 아키라라는 두 명배우의 열연이다.

카타시마 익키

에모토 씨와는 다른 작품은 물론 영화제를 통해서도 안면이 있다. 시나리오를 보시더니 “대사가 많아 연기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면서 출연을 결정했다.

여기엔 또 다른 배경이 있는데, 일단 프로듀서로 저와 네다섯 편 정도의 작품을 함께한 이시바시 씨는 외견상으로 에모토 씨와 연령차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실은 나이도 위인데다 연극계 선배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무척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배우들임에도 여지껏 한 작품에서 공연한 사례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이시바시 씨가 캐스팅되었다고 하니 에모토 씨도 관심을 보였다.

 

홍상현

캐미스트리를 끌어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을 텐데?

카타시마 익키

일단 두 분 다 저보다 10년 정도 선배들인데다 스타일도 워낙 다르니까.

이시바시 씨는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연기자라 리허설을 하면서 실제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체크한다. 본인이 구상하는 캐릭터에 이견을 제시하면 완강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고. (웃음) 반면, 에모토 씨는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는다. 어슬렁어슬렁 현장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슛이 들어가면 대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외워버리는 타입. 완전히 대조적인 두 사람과의 작업이 무척 힘든 한편으로 즐거웠다.

‘이누가미의 결혼’의 촬영감독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수자쿠’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쥔 다무라 마사키.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미술감독이 그를 소개해 주겠다는데 너무 놀라 술이 다 깼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이누가미의 결혼’의 촬영감독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수자쿠’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쥔 다무라 마사키.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미술감독이 그를 소개해 주겠다는데 너무 놀라 술이 다 깼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뭔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을 것 같다.

카타시마 익키

차 안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언제나처럼 이시바시 씨가 미리 짜 온 연기에 제가 제동을 걸었다. 그랬더니 같이 있던 에모토 씨가 ‘이 친구, 어쩌는지 한번 볼까’하는 느낌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다. 엄청나게 긴장이 되더라. (웃음)

한 번, 두 번, 촬영을 반복하다 세 번째 촬영을 할 때 ‘40년 만에 재회한 상황이니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해주셨으면 좋겠다’면서 설명을 곁들였다. 그러자 두 사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가 생각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바로 오케이가 나왔지. 대배우의 관록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다음부터는 두 분 모두 먼저 제 의견부터 물어보시더라.

 

홍상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수상작 <수자쿠>(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다무라 마사키가 촬영감독이다.

카타시마 익키

“영화계의 보물”이라 불리는 분이다. 저로서도 ‘설마 저 다무라 씨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싶었는데, 어느 날 <이누가미의 결혼>의 미술감독이 같이 술을 한 잔 하다 ‘내게는 멘토 같은 어른’이라며 소개해주겠다는 거다. 너무 놀라 술이 다 깼었다. 그렇게 처음 뵙게 되었는데 시나리오는 재미있지만 시각화하기는 쉽지 않겠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이누가미의 결혼’에서 한영혜(사진 왼쪽)는 강한 캐릭터 속에 감춰진 코믹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까지 기억하는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구상단계부터 캐스팅의 결과를 예상했다고 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이누가미의 결혼’에서 한영혜(사진 왼쪽)는 강한 캐릭터 속에 감춰진 코믹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까지 기억하는 카타시마 익키 감독은 구상단계부터 캐스팅의 결과를 예상했다고 한다. 사진제공: DOGSUGAR INC.

홍상현

예산도 빠듯한 상황에서 설득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카타시마 익키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 (웃음) 전혀 예상치 못한 계기로 문제가 풀렸다.

 

홍상현

어떤?

카타시마 익키

나중에 셋이 다시 모여 술을 한잔 하는데 성격이 괴팍하기로 유명한 선배 감독의 이야기가 나왔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 사람에게 불만이 많더라. 순간 그 자리가 무슨 성토대회장 분위기가 되면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홍상현

한영혜는 출연분량이 많지 않지만, 대단히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를 구현한다.

카타시마 익키

왕자를 만나 주인공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이어지는 시퀀스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왕자와 정혼한 공주로 설정했다, 거기에 비행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등장하는 미군조종사까지 끼워 넣음으로써 ‘안정되고 행복한 파라다이스’를 무너뜨렸다. 상당히 강한 성격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코믹한 면을 가지고 있는 공주의 인물상은 애초부터 영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는지라 연기를 하면 어떨지조차 예상이 되었다.

‘거장’이라는 호칭은 카타시마 익키 감독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으로, 프로듀서로 후배들과 함께하는 ‘현역’의 이미지 때문이리라. 카타시마 감독의 지극히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화법을 접하다보면 이런 느낌이 더욱 짙어진다. 사진촬영: Ryo Hasegawa
‘거장’이라는 호칭은 카타시마 익키 감독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감독으로, 프로듀서로 후배들과 함께하는 ‘현역’의 이미지 때문이리라. 카타시마 감독의 지극히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화법을 접하다보면 이런 느낌이 더욱 짙어진다. 사진촬영: Ryo Hasegawa

인터뷰를 진행한지 일주일 뒤 치러진 폐막식의 수상작 리스트에서 카타시마 감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체스영화제, 브뤼셀판타스틱영화제 등이 소속된 유럽판타스틱영화제연맹(EFFFF) 아시아영화상 심사위원들에 의해 <이누가미의 결혼>이 특별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본상은 보통 세 편 이하의 작품을 연출한 신인 감독에게 따로 주어지니 그에 준하는 무게다.

진작부터 세계무대를 누비며 영광을 누려온 그였지만 감독으로서의 커리어가 더해진 것은 영화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이누가미의 결혼>을 만든 이후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이제 프로듀서에 전념하시라’는 권유를 수없이 들었단다. 마침 지난해 프로듀스한 다큐멘터리 <누구를 위해서 헌법은 있나>가 “《키네마준보》베스트 10”(정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잡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영화. ※ 주)에 선정되기도 했다. 호시탐탐 평화헌법 개악을 노리는 아베 신조 정권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수작이었다.

물론 “지금껏 만들어온 작품의 동어반복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고. 하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면 되죠. 그래서 매사 노력하고 있고요.”

하긴,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도록 영화 아닌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삶이었다. 그럼에도 “평생 ‘원로’라는 호칭에 미련을 갖지 않을 것 같다”는 이 ‘영원한 시네마청년’에게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언제나처럼 지극히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화법의 한마디가 돌아왔다.

“‘힘내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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