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간만 예전 관계로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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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간만 예전 관계로 돌아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 홍상현
  • 승인 2020.08.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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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현의 인터뷰]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분화구의 두 사람>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 인터뷰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황지우,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촬영된 신을 담은 스틸 사진이 아니라 유명 사진작가 노무라 시키코가 아예 따로 연출을 맡아 진행한 누드사진은 「분화구의 두 사람」의 볼거리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불필요한 선입견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촬영된 신을 담은 스틸 사진이 아니라 유명 사진작가 노무라 시키코가 아예 따로 연출을 맡아 진행한 누드사진은 「분화구의 두 사람」의 볼거리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주지만, 불필요한 선입견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돌이켜보면, 신간코너에서 시집을 읽다 이 대목에 밑줄을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1998년 12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도 세상은 편치 않았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해군이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을 격침시켰다.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긴, 특별할 게 뭐겠는가. 연일 이어지던 기업들의 줄도산 소식, 친구들은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실업자가 되었고, 몸이 불편해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며 서른네 살 청년이 한강에 투신했다. 말쑥한 슈트차림의 사무직 노동자가 가족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홈리스가 되어 역전 지하도에 있더라는 소문도 돌았다. 서점을 나와 한참을 걷다가 아무 분식점에나 들어가 김밥 한 줄을 시켰다. 스펀지를 씹는 느낌, 하지만 이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돌이켜보니 새벽에 눈 뜬 이후 물 한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국가부도사태로 엉망이 되어버린 세상에서도 천연덕스레 고개를 쳐드는 허기는 여전했다. 그렇게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욕망을 새삼 실감한 순간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랄 수도 있겠지만― ‘꽤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인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분화구의 두 사람>은 22년전 의 이 ‘꽤 유쾌한 기분’을 상기시킨다. 다만, 설명을 위해 뛰어넘어야할 선입견이 하나 있다. 괄호 안에 친절한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야 140자 제한의 트윗 하나를 겨우 채울 수 있는 영화의 시놉시스다.

“결혼식을 앞둔 주인공(나오코, 타키우치 쿠미 분)은 하객으로 귀성한 옛 연인(켄지, 에모토 타스쿠 분)을 만나 20대 초반 함께 촬영한 누드사진첩을 같이 보다 닷새 동안만(원래는 하루였다가) 예전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이 뒤에, 이를테면 “위험한 관계” 나 “불타는 욕망”선전 문구가 곁들여지면 사람들은 한 백만 번은 족히 본 듯한 그 구태의연함에 혀를 찰 지도 모른다. “아니, 이런 작품이 무려 업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화잡지 《키네마준보》의 2019년 국내영화 베스트 10에서 1위를 차지했다니”하며.

올해 73세 생일을 맞은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은 인생의 1977년 이후 현재까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각본상을 받은 ‘문호.’ 영화계간지 《영화예술》의 발행ㆍ편집인이며 일본영화대학 특임교수로 후진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올해 73세 생일을 맞은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은 인생의 1977년 이후 현재까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각본상을 받은 ‘문호.’ 영화계간지 《영화예술》의 발행ㆍ편집인이며 일본영화대학 특임교수로 후진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여기서 잠깐, 그렇게 쉽게 몰아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두 배우는 각각 부산국제영화제(<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등에서 각광을 받아 국내에서도 개봉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력이 있지만, <감각의 제국>의 후지 타츠야 쯤 되는 거물도, <베티블루 37.2>의 베아트리스 달만큼 치명적 매력을 뽐낼 정도도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술 더 뜬다. 가족들이 다 일하러 나가있는 빈집에서 늦잠을 자던 켄지에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나오코는 천연덕스레 안부를 묻더니 대뜸 신혼집에 들여놓을 TV를 사러 가니 동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두 사람의 삶도 그렇다. ‘관능의 뮤즈’나 ‘광기의 예술가’가 아니다. 돌봄 교사를 그만두고 하청의 하청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여성과 이혼 후 들어간 대학동창의 인쇄회사가 동일본대지진으로 도산한 후 내내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남성이다. “활화산이 터지듯 서로의 육체를 갈망?”이것도 곧이곧대로 옮겨놓기엔 거리가 있다. 한창때 같이 후지산 분화구에 투신하려고도 했다던 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게에 들러 라멘 한 그릇씩을 비우고 돌아온 두 사람은 일단 각자의 방에 누워 낮잠부터 청한다.

「분화구의 두 사람」촬영에 주어진 시간이 딱 열흘 정도였다.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선택지가 그리 많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어깨에 힘을 뺀 느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고.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분화구의 두 사람」촬영에 주어진 시간이 딱 열흘 정도였다.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말에 따르면 “선택지가 그리 많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어깨에 힘을 뺀 느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고.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그럼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닮은 점투성이인 두 사람에게 조금씩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느끼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흥미진진한 소극장 2인극 같은 <분화구의 두 사람>의 내러티브에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까.

부지불식간에 접시바닥을 드러내게 만드는 한 줄의 김밥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두 사람. 일단은 철없던 시절 자신을 떠나 악전고투를 거듭 중인 옛 연인에게 쉴 새 없이 핀잔을 주지만 끝내는 오래된 친구, 혹은 손윗누이처럼 켄지를 감싸 안아주는 어른스러운 나오코가 그렇고, 민망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사투리를 쓰며 상황을 모면해보려 하지만 매일 밤 온 노력을 기울여 그녀가 요구하는 저녁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켄지의 호감도가 러닝 타임에 비례해 상승한다. 그렇게 영화가 중반을 넘기기 시작하면 관객의 머릿속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바람 하나가 남는다. 죽어도 폼은 안 나지만 어쩐지 정이 가는 이 커플의,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보이는 관계가 어떻게든 지속되었으면 하는.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조화? 그래 맞다. 70평생의 3분의 2를 작가로 살아오는 동안 네 번의 일본 아카데미를 포함, 회수를 세기조차 번거로울 만큼의 각본상을 받은 문호(literary giant), 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스토리텔링을 그 밖에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분화구의 두 사람」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두 배우는 각각 부산국제영화제(「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등에서 각광을 받아 국내에서도 개봉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이력이 있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분화구의 두 사람」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두 배우는 각각 부산국제영화제(「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등에서 각광을 받아 국내에서도 개봉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이력이 있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이번에 <분화구의 두 사람>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오셨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으신 작품으로는 처음이라 감회가 특별하실 텐데.

아라이 하루히코

그렇다. <바이브레이터>와 <전쟁과 한 여자>로 전주국제영화제 초청되었지만 시나리오작가였다. 코로나 19 사태로 직접 찾아뵐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홍상현

한국에서는 초기작인 <빨간 머리 여자>가 공개되어 있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한 한일합작영화(<케이티>)의 시나리오를 쓰시는 등 작가로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계신다. 계간지《영화예술》발행인이시라 워낙 많은 영화를 보시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영화를 워낙 좋아하시는 걸로 유명한데.

아라이 하루히코

<케이티>의 각본을 쓰던 시절 캐스팅 물망에 오르던 안성기 배우와 김갑수 배우 때문에 본 <태백산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홍상수 감독의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최근의 블록버스터들보다 예전의 작은 영화들이 더 좋은 느낌이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은 왜 새 연출작을 못 찍고 있는지. <전쟁과 한 여자>가 아트나인에서 상영될 당시 웬 학생처럼 보이는 분이 <바이브레이터> DVD를 가져와 사인을 받으면서 자기가 일본영화에도 출연했다는 거다. 작품명을 물었더니 <가족의 나라>. ‘어?! 그럼 양익준이네?’하며 같이 술을 마시러 갔었다. ‘감독 양익준’이 되었든 ‘배우 양익준’이 되었든, 그와 일해보고 싶다.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도 좋았다. 형사와 갱스터의 애인 사이의 위험한 관계를 다층적 시각에서 그렸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의 작품이라 좀 더 감정이입이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배우로는 <박열>에서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 배우를 보며 감탄한 기억이 있다. 일본어도 어쩌면 그렇게 잘 하는지. 당장 일본에서 활동해도 되겠더라.

가족들이 다 일하러 나가있는 빈집에서 늦잠을 자던 켄지에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나오코는 천연덕스레 안부를 묻더니 대뜸 신혼집에 들여놓을 TV를 사러 가니 동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가족들이 다 일하러 나가있는 빈집에서 늦잠을 자던 켄지에게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나오코는 천연덕스레 안부를 묻더니 대뜸 신혼집에 들여놓을 TV를 사러 가니 동행해 달라고 요구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분화구의 두 사람> 원작자인 시라이시 가즈후미 씨는 여러 차례 문학상을 받았고, 『얼마만큼의 애정』,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등의 저작이 한국에서도 번역ㆍ출판되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등, 실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 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런 시라이시 작가가 감독이 <분화구의 두 사람>의 메가폰을 잡는다는 소식에 무척 기뻐했다고 들었다. 그의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무엇에 가장 역점을 두셨는지.

아라이 하루히코

“어떻게 하면 에로틱한 연출이 가능할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신경을 써 찍어 봤지만, 막상 완성시켜 놓고 보니 너무 에로틱하지 않아서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홍상현

하지만 말씀하신 바로 그 지점에 <분화구의 두 사람>이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한다. 그게 성공하셨으니 《키네마준보》가 뽑은 2019년 국내영화 베스트 10에서 무려 1위를 차지하신 거 아닌가. (웃음)

아라이 하루히코

글쎄 그게. 작품의 어떤 점이 요인으로 작용해 1위에까지 오른 건지 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시사 때부터 사람들의 반응이 좋기는 했다, (웃음) 관객의 연령대도 제 또래인 70세 이상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무척 넓고, 특히 여성들이 많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젊은 분들은 청소년관람불가라고 하니 저항감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SNS에서도 “성관계가 많이 나온다,” “대사를 읽는다” 등등 험담만 가득했거든.

전작인 <보디 앤 소울>이나 <이 나라의 하늘>도 7위 정도였기에 이번엔 4위쯤 되려나 했는데 1위라서 놀랐다. 심사위원 중에 1위까지는 아니어도 대략 3위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많다 보니 득점이 더해져 1위가 된 거 아닐까. (웃음)

「분화구의 두 사람」의 주인공들은‘관능의 뮤즈’나‘광기의 예술가’가 아니다. 돌봄 교사를 그만두고  하청의 하청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여성과 이혼 후 들어간 대학동창의 인쇄회사가 동일본대지진으로 도산한 후 내내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남성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설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보다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분화구의 두 사람」의 주인공들은‘관능의 뮤즈’나‘광기의 예술가’가 아니다. 돌봄 교사를 그만두고 하청의 하청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여성과 이혼 후 들어간 대학동창의 인쇄회사가 동일본대지진으로 도산한 후 내내 백수로 지내고 있는 남성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설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보다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원작의 배경은 후쿠오카지만 영화가 제작되면서 아키타로 바뀌었다고 들었다. 감독의 아이디어셨나. 배경이 바뀐데 따른 극적 효과도 컸는데.

아라이 하루히코

소설의 무대인 후쿠오카는 작가의 고향이다. 일단 판권과 관련한 부탁을 위해 시라이시 씨 댁을 찾았을 때 그 자리에서 배경을 바꾸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아키타는 현지에서 개최되는 주몬지영화제에 1회부터 관여하면서 30년 정도 인연을 맺어온 곳이다. 영화제는 늘 2월경, 그러니까 눈이 많이 내릴 때 진행되는데, 여름에 따로 워크숍을 진행한다고 해서 가볼 기회가 있었지. 눈이 사라진 아키타는 왠지 스산한 느낌이었지만 대신 니시모나이의 여름축제 군무가 볼만했다. 삿갓과 눈만 내놓은 두건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이 무척 에로틱하다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이 풍경과 얽힌 연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 지역의 역사적 배경도 하나의 매력요인으로 작용했다. 예컨대 아키타는 동일본대지진 당시 동북의 다른 지역(후쿠시마, 야마가타, 이와테 등)에 비해 현격하게 피해가 적었던 지역이나, 150년 전 일어난 보신전쟁 당시에는 유일하게 신정부군에 가담해서 다른 지역들로부터‘왕따’를 당한 과거도 있다.

영화를 완성한 뒤 두 주인공이 여름축제를 가로지르는 부분이 무척 아름다운한편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평이 많은 걸 보니 성공적인 로케였다는 생각이 든다.

 

홍상현

<분화구의 두 사람>의 등장인물은 나오코와 겐지 두 사람 뿐이다. 물론 결혼을 앞둔 여성이 옛 애인과의 재회를 계기로 충동의 구렁텅이에 빠져든다는 설정 자체가 무척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그밖에도 관객이 이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라이 하루히코

제가 부각시키려 했던 주제의식에 대해 물으시는 질문 같은데, 나라보다는 개인, 사회적인 룰(rule)이나 모럴보다는 ‘몸의 언어’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분화구의 두 사람>은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두 사람. 일단은 악전고투를 거듭 중인 옛 연인에게 쉴 새 없이 핀잔을 주지만 끝내는 오래된 친구, 혹은 손윗누이처럼 켄지를 감싸 안아주는 어른스러운 나오코가 그렇다. 매일 밤 온 노력을 기울여 그녀가 요구하는 저녁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켄지의 호감도도 러닝 타임에 비례해 상승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자연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두 사람. 일단은 악전고투를 거듭 중인 옛 연인에게 쉴 새 없이 핀잔을 주지만 끝내는 오래된 친구, 혹은 손윗누이처럼 켄지를 감싸 안아주는 어른스러운 나오코가 그렇다. 매일 밤 온 노력을 기울여 그녀가 요구하는 저녁메뉴를 준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켄지의 호감도도 러닝 타임에 비례해 상승한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나온 것 같다. 보수화되고 전체주의화되는 사회상에 저항하는 작가정신이랄까. 실제로 감독께서는 작가와의 대담에서도 “‘몸의 언어’에 몰입하는 두 사람이 아나키스트처럼 비춰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바 있다. 지극한 우연이기는 하나 ‘안전’을 내세우는 이면에 파시즘이 발흥하는 코로나 19 사태 이후의 세계상황과도 맞물리는 바가 있지 않나.

아라이 하루히코

모든 형태의 ‘밀집접촉’이 금지된 상황을 보면서 사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이를테면 ‘몸의 언어’에 몰입할 수 없는 두 사람은 어떻게 하지? <바디 앤 소울>의 프로듀서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언어’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홍상현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이후 개봉한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로 한국 관객에게 얼굴을 알린 타키우치 쿠미 배우는 20대의 마지막에 절정의 연기를 펼친다.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연민을 자아내는 켄지 역의 에모토 타스쿠 배우도 좋았고.

아라이 하루히코

원래 겐지 역은 <이 나라의 하늘>에서 함께했던 하세가와 히로키 배우가 맡기로 되어있었고, 나오코의 캐스팅은 초기에 요청했던 모든 배우들에게 거절을 당했다. 노출연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안도 사쿠라에게 부탁했더니 고맙게도 수락해 주더라. 헌데 이번에는 하세가와 배우의 소속사에서 스케줄이 맞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저예산에다 노출연기까지 해야 한다는데 부담을 느낀 건지.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던 와중에 안도 배우에게 아이가 생기고, 설상가상으로 하세가와 배우도 NHK의 아침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거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그래서 안도 배우의 남편인 에모토 배우가 출연하던 연극의 분장실에 쳐들어가“책임을 지라”는 말과 함께 대신 출연을 제의했다. 그렇게 겐지가 원작 보다 젊어지게 되면서 나오코 역을 맡을 배우의 연령대도 자연스레 30대 중반에서 20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타키우치 배우와는 이후에 다섯 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면접에서 만났다. <그녀의 인생은 잘못이 없어>에서는 조금 어두운 이미지였는데 막상 접해보니 강한 승부욕이 느껴져 캐스팅을 결정했다.

“눈이 사라진 아키타는 왠지 스산한 느낌이었지만 대신 니시나이의 여름축제 군무가 볼만했다. 삿갓과 눈만 내놓은 두건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이 무척 에로틱하다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이 풍경과 얽힌 연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술회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눈이 사라진 아키타는 왠지 스산한 느낌이었지만 대신 니시나이의 여름축제 군무가 볼만했다. 삿갓과 눈만 내놓은 두건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이 무척 에로틱하다는 생각과 함께, 언젠가 이 풍경과 얽힌 연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라이 하루히코 감독의 술회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캐스팅이지만 결과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어떤 연출을 통해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를 끌어내셨는지.

아라이 하루히코

시나리오를 통해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무엇을 더 요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단 두 사람이 시나리오를 읽은 뒤 보여주는 연기를 체크하면서 ‘이건 내 의도랑 좀 다른데?’하는 느낌이 들 때마다 제 의견을 제시했다. 여름축제와 극중에 등장하는 앨범을 위해 사진을 찍었던 걸 제외하면 촬영에 주어진 시간이 딱 열흘 정도였다. 선택지가 그리 많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어깨에 힘을 뺀 느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홍상현

작품의 높은 완성도도 그렇지만 <분화구의 두 사람>은 특히 사진과 그림이라는 조형예술이 영상과 조화를 이루며 영화적 볼거리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두 가지 다른 예술의 장르를 작품에 접목시킨 것은 감독의 아이디어였나.

아라이 하루히코

원작에도 겐지가 찍은 누드사진이 나오는 까닭에 애초부터 누드사진 작업을 많이 하는 노무라 사키코 작가에게 부탁을 드릴 작정이었다. 그래서 영화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노무라 작가의 연출로 사진부터 찍었고. 이제와 생각하면 이게 참 잘한 결정이었다. 한번 사진촬영을 통해 어색함을 줄인 두 사람이 좀 더 원활하게 영화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거든. 사키코 작가에게 감사한다. 또, 예전에 <이 나라의 하늘>의 포스터를 만들던 당시, 스틸로 합성을 해서 불만이었는데, <분화구의 두 사람>에서는 노무라 작가와 함께 사진집을 만들고 있는 디자이너께 간곡히 부탁드렸다. 사키코 작가가 찍어주었던 스틸사진도 멋졌지. 모두들 웃는 얼굴이니 이걸 영정사진으로 써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라스트의 후지산 분화는 CG를 쓰면 비용도 많이 들고 ‘어차피 허구라면 그림이 좋지 않을까’싶었는데 마침 니나가와 미호 작가가 후지산의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게 떠오르더라, 부탁을 드리니 카메라의 프레임에 딱 맞춰 그림을 그려주었다.

우리가 닮은 점투성이인 두 사람에게 조금씩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느끼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흥미진진한 소극장 2인극 같은 「분화구의 두 사람」의 내러티브에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필자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우리가 닮은 점투성이인 두 사람에게 조금씩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느끼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흥미진진한 소극장 2인극 같은 「분화구의 두 사람」의 내러티브에 몰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필자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홍상현

영화적 허구에 대한 표현으로 회화를 삽입하신 건 훌륭한 아이디어이기도 하거니와 작품의 조형미를 배가시키는 데도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분화구의 두 사람>의 연출의도와 감독께서 생각하시는 작품의 매력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드린다.

아라이 하루히코

작품의 매력에 대해 언급하는 건 관객 여러분의 몫이 아니겠나. (웃음)

연출 의도와 관련해서 “<분화구의 두 사람>이 국가의 종언을 상기시킨다”는 트윗을 본 일이 있는데, 이 영화의 숨은 테마는 “국가의 종언”이 아니라 “국가의 멸망”이다.

선거로 아베 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천재지변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코로나 진단 검사라든가 한국의 대처를 배워야하는데 고개 숙이고 가르침을 구하지 않는 아베 정권은 최악이다.

영화가 중반을 넘기기 시작하면 관객의 머릿속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바람 하나가 남는다. 죽어도 폼은 안 나지만 어쩐지 정이 가는 이 커플의,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보이는 관계가 어떻게든 지속되었으면 하는.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영화가 중반을 넘기기 시작하면 관객의 머릿속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바람 하나가 남는다. 죽어도 폼은 안 나지만 어쩐지 정이 가는 이 커플의,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보이는 관계가 어떻게든 지속되었으면 하는. 사진제공: (C)2019 It Feels So Good Film Partners

“한국영화에 봉준호 감독 같은 분들 작품만 있는 게 아니듯, 일본영화에도 이와이 슌지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만 있는 건 아니랍니다.”

‘제 작품 소개를 어찌 제 입으로 하겠느냐’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동안 인연을 맺어온 한국 관객들이 부디 당신의 작품을 봐 주십사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순수함. 어딘가 또래의 ‘어르신들’과는 다른 느낌. 그리고 보면 당신과의 대화에서 ‘왕년의 무용담’이나 현장에서 지금껏 수도 없이 맞닥뜨렸을 대가들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또 하나,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예전의 한국영화’에 대한 언급에서조차 현역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에게 더 많은 비중을 두기 위해 노력하던 인상.

닮아있었다. 무척이나.

낡은 것 같지만 전혀 새롭고, 날카로운 것 같지만 둥글고, 우울한 것 같지만 유쾌한, 그의 작품 <분화구의 두 사람>과.

인터뷰를 끝마친 뒤 당신께 미처 물어보지 못한 질문이 떠올랐다. 2102년 후지산 3부 능선의 산허리에서 약간의 분기가 확인되었는데, 역시 언젠가 분화할 거라 생각하시느냐는.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불과 6개월 전만해도 양족에 범죄현장의 출입통제 테이프처럼 띠가 둘러진 객석에 앉아 그의 작품을 보게 되리라는 것조차 예상 못했던 상황에서 그깟 화산이 대수이겠냐고.

“현재를 원하는 대로 살래.”

어느 순간 뇌리에 스며들어버린 영화 속 한 마디를 읊조리다 무심코 <분화구의 두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작품의 영문제목을 메모지에 꾹꾹 눌러 적었다.

... It Feels So Good.

홍상현 팩트체커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을 갖추고 한ㆍ일 두 나라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교수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같은 대학 이미지인류학연구실(IAL)의 네트워크 멤버였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의 논쟁적인 저작을 소개한 번역가이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거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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