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씨'가 말라 몽골에서 들여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우역(牛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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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씨'가 말라 몽골에서 들여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우역(牛疫)
  • 박광일
  • 승인 2020.06.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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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일의 역사여행] 가축역병의 역사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아프리카돼지열병의 관심이 조금 뜸해지긴 했지만 매년 가축 역병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공장식 축사의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겠지만 지금은 일단 그 피해를 줄이는 것이 최고의 관심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매년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농축산 관계자 분, 또 방역을 위해 여러 영역에서 참여하는 분들의 노고와 스트레스가 무척이나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대 구제역 발생 시 검사모습 01_ ⓒwikipedia
현대 구제역 발생 시 검사모습 01_ ⓒwikipedia

 

이와 관련해 조선시대 가축의 역병, 그 중에서도 소의 역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 가축 중에서 왜 소를 다루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로 <조선왕조실록> 속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기사를 살펴보시면 참고가 되실 것 같은데요

먼저 조선 태종 때 기록입니다, 조선에서 명으로 사신을 보냈는데요. 당시 중국 황제였던 영락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조선인(朝鮮人)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광록시(光祿寺)로 하여금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토록 하라.’

 

고기굽기, 성협, 풍속화첩, 19세기_ ⓒ국립중앙박물관
고기굽기, 성협, 풍속화첩, 19세기_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니까 조선은 돼지를 많이 기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돼지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겹치고, 또 젖을 쓸 수 없는 가축이라는 이유가 문제였을 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돼지는 고기의 성질이 차다고 해서 기피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다음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유로 소가 돼지보다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대개 사람이 소의 힘으로 먹고 살면서도 이를 도살(屠殺)함으로써 원한(怨恨)의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기 때문입니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에는 지금도 쇠고기를 가지고 이이(李珥)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숙종 때 송시열이 소를 잡는 것을 금지하자는 주장을 하며 든 근거입니다. 이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 소는 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는 것이라기보다 농사일을 돕는 존재였던 것이죠. 그러므로 이이는 살아서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그 소를 잡아 고기를 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얘기를 했던 겁니다.

논갈이,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보물 527호), 18세기_ ⓒ국립중앙박물관
논갈이,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보물 527호), 18세기_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이런 소가 집단으로 죽는 일, 곧 우역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조선시대 여러 곳에 등장을 합니다. 실록에만 200여 건의 기사가 나오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조선전기에는 드문드문 등장하다가 인조, 현종, 숙종 때 각각 수 십 건의 기사가 등장합니다.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임진, 병자 두 전쟁인데요. 임진, 병자의 전란은 동아시아 전체가 움직인 국제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전염병도 이 시기에 많이 유행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소에게 병이 들었다는 기사 중 눈에 띄는 내용은 병자호란 직전인 16368월의 기사입니다.

 

평안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

 

아직 병자호란(163612월에 일어남)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10여 년 전 정묘호란이 있었고 또 이 시기에 후금, 곧 여진족과 몽골족의 왕래가 빈번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이 소 전염병의 근거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후 같은 해 9, 우역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도 이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병이 유행하자 여러 곳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가 없어지니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다음 기록을 보시죠.

 

우역이 한 번 크게 번진 뒤로 대신 멍에를 매야 하는 백성의 탄식이 있게 되었으니 밭갈이 할 쟁기도 쓸모가 없게 되어 비옥한 경작지가 장차 황무지가 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소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소가 바로 산업기계와 같은 역할을 했던 거죠. 소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멍에를 이고 쟁기를 끌지만, 소가 끌던 때와 효율이 달랐습니다. 결국 토지가 황무지가 될 가능성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은 우역의 문제를 국가적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또 우역은 외교와 통상의 문제도 일으켰습니다. 병자호란 직후라 청과 관계가 껄끄러운 상황에서 청이 조선 국경에서 소를 130여 마리를 사고자 했던 겁니다. 우역 직후라 소가 별로 없어 결국 정부에 요청해 그 수를 줄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8~90마리만 팔도록 명을 내렸던 거죠.

또 우역이 일어나자 비극적인 일도 생겼습니다. 경상도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좌도의 각 고을은 우역이 크게 일어나 병으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많습니다.’

 

이처럼 우역 문제는 조선에게 국가적 문제였습니다. 전력을 다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외국에서 소를 들여오는 것이었습니다. 인조 때 명신인 이경석은 몽골지방에서 소를 사 오려고 했습니다. 일단 국내에 소가 부족한 것도 있고 또 명확한 표현은 없지만 역병을 견딜만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종과 영의정 정태화와 대화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지금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성익을 시켜 몽고 땅에서 사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

 

이를 통해 조선에서 소의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자 몽고에서 소를 들여온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 이전에 그 소가 매우 많아졌다는 기록이 있어서 당시 큰 도움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움직임이 탁월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전에도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제주도의 소를 사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제주도는 바다가 있어 초반에는 전염병이 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제주도에도 전염병이 퍼지며 제사지낼 소가 없을 정도로 그 피해가 격심해졌다고 합니다. 또 마지막 수단으로 제사를 지내는 방법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강화 유수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강도(江都)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천여 마리나 됩니다. ()를 베풀어 비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를 위하여 제를 지낸 것이 문헌에 있는가?"

하매, 제조(提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소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헌을 상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사례(事例)가 없어 이제 중지하였다.‘

 

이처럼 우역, 곧 소의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한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 나름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정치가들의 모습은 지금 보아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무엇보다 소의 병을 해결하는 것은 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것이란 점에서 오늘의 위정자가 무엇을 우선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 볼 역사가 아닌가 합니다.

박광일    easta7531@naver.com   최근글보기
역사문화콘텐츠 전문기업 '여행이야기' 대표이자 '공간역사연구소' 소장이다. 대학시절 학술답사에 흥미를 느낀 계기로 역사문화콘텐츠 전문기업을 설립하였으며, 《우리아이 첫 경주여행 1,2권》, 《우리아이 첫 국립중앙박물관 여행》,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등의 역사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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