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재계의 '급진적 저출산 대책'은 왜 나왔나

  • 기자명 선정수 기자
  • 기사승인 2023.03.29 14: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구 감소에 부양 부담 늘어나는 '인구 오너스 시대'
혼인과 관계없는 아동중심 출산 장려 해법 제안
학교 잔류기간 단축으로 '성인인식 연령대' 낮출 필요도

경제계에서도 인구 절벽에 관한 조언들이 쏟아집니다. ‘재계=보수’라는 공식에서 벗어난 눈에 띄는 해법도 제시되고 있네요.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방증이겠죠. 한국산업연합포럼(KIAF)가 제시한 인구절벽 해법을 살펴봅니다.

출처: 한국산업연합포럼
출처: 한국산업연합포럼

◈혼인 여부 관계없이 아동 중심으로

KIAF는 29일 '인구 오너스 시대 도래에 따른 산업계 영향과 대응 방안'을 주제로 제34회 포럼을 열었습니다. 이 포럼은 기계, 디스플레이, 바이오, 반도체, 백화점, 석유, 석유화학, 섬유, 시멘트, 엔지니어링, 자동차, 전자정보통신, 전지, 조선해양플랜트, 철강, 체인스토어 등 16개 업종별 단체가 연합해 만들었습니다.

무역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정만기 KIAF 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나라보다 먼저 출산율 저하를 겪었던 유럽연합(EU)의 사례를 들며 “정부 정책이 출산보조금 지급 등 물질 여건 개선을 위한 정책에만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 회장은 "결혼에 대한 젊은 층의 인식이 변화하는 점을 고려해 출산장려책도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출산 아동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며 "조기입학과 학교 잔류기간 단축으로 성인 인식 연령대를 20대로 낮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황남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고령화정책기획센터장은 '저출산고령화 대책 현황과 정책과제' 발표에서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우선순위를 설정해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부처별 사업을 취합한 백화점식 대책이라는 비판에 대응해 인구정책과 사업 간의 연관성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이어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는 기업문화도 전제돼야 하므로 정부 정책에 기업 참여를 제고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허진욱 인천대 교수(경제학과)는 '인구구조 변화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발표에서 "생산성 향상 속도가 낮다는 전제의 시나리오에서 우리나라 경제는 2050년 이후 0% 미만의 성장률이 전망된다"며 "생산성 개선을 통해 인구구조 변화의 부정적 영향을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집약도가 낮아지는 방향으로의 기술 진보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불필요한 규제를 합리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어진 지정토론에서 최유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출산·고령사회의 적응에 법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체계적 운용, 권한과 예산 부여를 위해서는 법적 근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출처: 다음 백과
출처: 다음 백과

◈인구 오너스?

이 포럼에선 몇가지 낯선 단어와 개념이 등장합니다. 저한테만 낯선 것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알아봤습니다. 이 포럼의 주제는 ‘인구 오너스 시대 도래에 따른 산업계 영향과 대응 방안’입니다. 인구를 주제로 한 포럼이니 인구 감소, 거칠게 말하면 인구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구 오너스라뇨? 마이너스보다 더 심한 것일까 생각도 해봤죠. 인구가 0으로 향하기 때문에 마이너스 대신 0을 집어넣어서 onus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오너스(onus)는 ‘무거운 짐, 책임, 부담’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따라서 ‘인구 오너스’란 인구 감소하면서 생산인구가 줄어들고 부양인구는 늘어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경제가 활력을 잃고 사회적 부담이 커지는 것이죠. 반대로 전체 인구에서 생산연령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해 노동력과 소비가 함께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는 상태를 ‘인구 보너스’라고 부른다고도 합니다.

 

◈혼인 여부와 관계없는 아동 중심의 출산장려

이 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진영과 보조를 맞추는 경제단체 임원이 이런 급진적인 이야기를 꺼내다니요. 정 회장은 “결혼에 대한 젊은 층의 인식이 변화하는 점을 고려해 출산장려책도 혼인 여부와 관계없이 출산 아동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서구사회에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 외에도 비혼, 동성혼, 동거 등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존재합니다. 이런 가정들이 아이를 낳고 키우려고 할 때 우리나라에선 굉장히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일단 동성혼은 결혼 관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없으니 입양 등에도 제약이 따릅니다. 법적으로 혼인을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이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2021년 프랑스의 비혼 출산율은 62.2%였습니다. 법적 혼인관계 이외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전체 출생아 가운데 10 중 6명 이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보수진영 특히, 보수 기독교 교단에선 다양한 혼인관계를 인정하면 전통적인 가족관계가 붕괴될 것처럼 주장하지만 프랑스의 출산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습니다.

정 회장의 이야기는 서구사회처럼 다양한 혼인 관계 속에서도 아이를 낳고 잘 키울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성인 인식 연령대를 20대로 낮추자

정 회장은 “조기입학과 학교 잔류기간 단축으로 성인 인식 연령대를 20대로 낮추는 것도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성인 인식 연령대를 20대로 낮춘다뇨? 성인 인식 연령대란 스스로를 ‘어른’으로 인식하는 나이입니다. 우리나라 민법은 19세를 성년에 이르는 나이로 정합니다. 법에서 쓰는 나이는 만 나이이므로 만 19세가 되면 미성년자를 면한다는 이야기죠. 만19세가 되면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보호자의 동의없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닙니다. 결혼해서 독립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통제를 받으면서 사는 청년들이 많은 것이죠.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펴낸 <청년 사회 첫 출발 실태 및 정책방안 연구Ⅱ: 성인 이행기 청년의 자립> 연구보고서(윗그림 참조)에 이런 실태가 잘 드러납니다.

18세 이상 34세 이하 일반가구에 거주하는 청년 2,059명에 대한 조사 결과, 청년들은 성인기 이후에도 스스로 성인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시기가 폭넓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있는 청년들은 대부분 자립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회라 응답하는 비율도 높았습니다. 청년은 단일한 집단이 아닌 다양한 특성과 이해관계로 구성된 집단이지만, 이들은 대체로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어려움에 대해 누구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정책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성인 인식 연령대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그러니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나이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첫 아이를 낳는 시기가 늦어지고 출산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연구진은 “성인 연령에 성인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은 청년들의 내적 문제가 아닌 매우 정상적인 혼란 상태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며 “개인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청년정책으로서는 무의미할 수 있다”고 제언합니다.

장 회장은 학교 입학과 졸업 연령을 낮추고, 학교 잔류기간을 줄여 성인 인식 연령대를 낮추는 게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근래 유행하고 있는 졸업유예와 휴학 등을 줄여 청년들이 사회생활 시점을 앞당기자는 해법입니다. 지난 28일 저출산고령화위원회에서 제시된 윤석열 정부의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추진방향 및 과제>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성인 이행기라는 생소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토론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