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이야기] ③ ‘안록산의 난’에 맞선 총사령관 고선지

[안정준의 고대사 이야기]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한 이방인, 고선지 ③

  • 기사입력 2020.06.11 12:10
  • 최종수정 2020.06.11 17:26
  • 기자명 안정준

● 파국의 순간,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들 

752년 12월, 탈라스에서 당으로 돌아온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만의 군대를 모두 잃은 패장인 만큼 처형하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 현종은 그의 예전 공적을 감안해서 형벌을 가하지는 않았으며, 우우임군대장군․어사대부라는 명예직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다만 이것은 실제 부임지와 군대가 없는 형식적인 자리에 불과했다. 고선지는 그 후 장안에 거주하면서 황제의 군사참모 역할을 했을 뿐이다.

오히려 752년 12월에 고선지의 밑에서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며 안서의 행군사마직위에 올라있던 봉상청이 새롭게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아마도 고선지가 그를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안서도호부가 중앙유라시아 지역까지 관장하던 시절은 지났지만, 안서의 절도사라는 막중한 자리에 봉상청이 임명된 것은 고선지와 함께한 동안 입증됐던 그의 출중한 능력과 충성심이 상부로부터 인정받은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국가적 재난과 혼란의 파도 앞에서 봉상청의 이러한 짧은 ‘영광’도 큰 비극의 단초로 이어지고 말았다.

755년에 당의 ‘태평성대’의 종말을 알리는 큰 변란이 일어났다. 바로 당나라를 기둥뿌리부터 흔들었던 그 유명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안록산은 페르시아 계통의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계 무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어를 비롯한 6개 국어를 할 줄 알았으며, 특히 장사에 뛰어난 수완을 보여서 변방 이민족들과의 중계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고 한다.

그림3. 안록산(安祿山: ?~757)
그림3. 안록산(安祿山: ?~757)

 

안록산은 이렇게 이룬 큰 재산으로 당나라 중앙의 고위 관리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리면서 황실 사람들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몸집이 비대해서 아랫배가 허리 아래까지 처질 정도였던 그는 교활하고 재치가 넘쳐서 남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는데 능숙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현종이 “그 거대한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가?”하고 묻자, 안록산은 “오직 폐하에 대한 충심(忠心)만이 가득합니다”라고 대답해서 현종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안록산은 고선지처럼 딱히 큰 공을 세운 것이 없음에도, 뇌물과 세치 혀만으로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심지어 양귀비에게도 아첨하여 그녀의 양아들이 되었을 정도였다. 안록산은 당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출세했던 ‘이방인’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차별과 멸시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오히려 비열하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통해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보다보면, 모순으로 가득한 당 제국 내에서 ‘이방인’들의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이었을까에 대해 여러 가지 상념이 들게 한다.

안록산은 황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꾸준히 권력을 장악해가더니 755년에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평로와 범양․하동 등 무려 3개 지역의 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통솔했던 군대만 해도 당 전체의 절도사들이 지휘했던 총병력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엄청난 숫자였다고 하니, 이러한 비상식적인 권력 집중은 현종 말기까지 이어진 오랜 치세 속에 많은 모순과 폐해가 쌓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안록산의 반란 소식에 당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그의 대군을 막을만한 장수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이름은 고선지가 아닌, 안서절도사로 있던 봉상청이었다. 아무래도 이민족 출신 장수에게 호되게 데인 현종이 곧바로 고선지에게 손을 내밀기는 좀 꺼려졌던 모양이다. 호출을 받은 봉상청은 지체 없이 달려와 낙양 지역에서 대대적인 모병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몰려오고 있는 촉박한 상황에서 겁먹은 백성들을 상대로 지원군을 모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흘 동안 6만의 병사를 모으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부분은 급조한 병력으로서 대개 날품 파는 일용직 노동자나 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과 부랑민들이었다. 직업군인으로서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안록산 휘하의 정예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봉상청은 낙양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을 하며 안록산이 보낸 선발부대들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으나, 곧이어 쳐들어온 10만 규모의 대규모 본대를 맞아서는 크게 패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안록산은 낙양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대연(大燕)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같은 해 11월, 봉상청의 패전과 낙양 함락 소식을 들은 당조정은 수도 장안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뽑아들었다. 고선지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해서 방어군을 편성하게 한 것이다. 사령관은 현종의 6번째 아들인 이완이라는 인물이었으나 형식적인 상관이었을 뿐, 전군을 실제로 지휘하는 건 고선지였다. 이때도 불행히 장안에는 군대가 별로 없었다. 한 달이나 걸려서 겨우 각지에서 10만의 군대를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고선지는 근정루에서 현종의 배웅을 받으며 반란군 진압을 위한 출정에 나섰다.

어찌보면 탈라스에서 패한 뒤 한직을 떠돌던 고선지에게 다시 한 번 큰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어렵게 출정하게 된 고선지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한명 따라붙었다. 현종이 토벌군의 실질적인 총수인 고선지에게 환관 변령성을 보좌로 붙인 것이다. 사실상 고선지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하필 고선지에게 잔뜩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과 동반하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안서도호부 시절의 고선지는 언제나 외딴 지역인 서역에서 자신의 뜻대로 군대를 움직여왔으며, 누구의 지시나 감시를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선지의 동향을 주목하고 있었고, 군대의 움직임은 시시각각 조정에 빠르게 보고되었다. 게다가 황제 현종은 한때 총애했던 이민족 출신 장수인 안록산으로부터 당한 배신에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러한 수도와 조정의 정치적 동향과 분위기를 면밀히 계산에 넣기엔 고선지가 성장해온 서역이라는 환경이 너무나 낯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선지는 안록산의 15만 대군이 점차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 장안을 방비할 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도망쳐온 봉상청으로부터 반란군의 전력과 사기가 높다는 보고를 들었다.

 

“여러 날 혈전을 치렀지만 적의 예봉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동관(潼關)을 지키는 병력이 없는데 만약 미친 도적들이 돌파하면 수도 장안이 위태롭습니다. 이곳 섬주의 방어를 포기하고 급히 동관을 보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선지는 이러한 보고를 듣고는 당시 머물고 있는 섬주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난공불락인 동관이라는 곳으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이동하기 전에 장안 북쪽의 중요한 군수물자 보급창고인 태원창에 들러서 쌓여있는 갑옷․무기․군량을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창고를 불태워버렸다. 그 물건들이 반란군의 전리품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관으로 이동하자마자 무기를 손질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곧이어 안록산이 보낸 기병대가 동관에 들이닥쳤으나 성안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고선지의 방어군에게 격퇴당하여 물러나고 말았다.

그림4. 낙양에서 장안으로 들어가는 요지인 동관(潼關). 지금의 섬서성 동관현의 동남쪽에 있다.
그림4. 낙양에서 장안으로 들어가는 요지인 동관(潼關). 지금의 섬서성 동관현의 동남쪽에 있다.

 

고선지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반란군의 장안 공격을 차단하는데 일단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환관 변령성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했다.

 

“검군 변령성은 매번 고선지의 작전을 간섭했으나, 고선지가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

 

위 기록은 당시 고선지와 변령성 두 사람의 사이가 크게 벌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고선지 앞에 놓인 전황이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박하기도 했지만, 과거에 여러 번 무리한 요구와 간섭을 해왔던 변령성과 군사 일을 논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변령성은 자기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을 진행한 고선지에게 더욱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장안에 있던 현종에게 이렇게 보고를 올렸다.

 

“봉상청은 낙양에 적병을 들임으로써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고선지는 섬주의 땅 수백 리를 포기하여 반란군에게 내줬습니다. 또한 고선지는 (태원창에서) 군사들에게 내려야할 물품들을 착복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위급한 이런 시기에 한가로이 뱃놀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이들을 가만두어선 안 됩니다.”

 

누가 봐도 악의적인 보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러한 얘기를 전해들은 현종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화를 냈다. 반란 진압의 명령을 받은 사령관이 국고를 약탈하고 뱃놀이나 하다니, 이미 현종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충직한 장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종은 이전에 봉상청이 세 차례나 사자를 보내어 올린 표문들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변령성의 일방적인 보고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항변을 들어볼 생각도 않은 채 아래와 같이 명령했다.

 

“당장 진중으로 가서 고선지와 봉상청 두 사람의 목을 베어오라!”

 

얼마 후 동관 주변으로 순시를 나가있던 고선지는 진중에서 황제의 사자가 자신을 찾는다는 긴급한 전갈을 듣고는 그곳으로 곧장 말을 타고 달려갔다. 성안에 도착해보니 군사들이 웅성웅성하고 있었고,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선지는 동관의 넓은 광장에 떼거지로 몰려있던 군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어느 볼품없는 사내의 시신 한구였다. 변령성이 목이 잘려나간 봉상청의 사체를 일부러 낡은 거적 위에 벌려 놓았던 것이다. 충격에 휩싸인 고선지에게 변령성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말했다.

 

“대부(大夫: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도 또한 은령(恩令: 임금의 명령)이 내려지는 법입니다.”

 

변령성은 자신이 데려온 칼잡이 백여 명을 대동한 채로 고선지에게 섬주를 포기한 죄와 태원창의 관물을 도적질한 죄로 황제가 사형을 내렸음을 알렸다. 예전에 고선지는 1차 원정 직후 상관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리는 월권행위를 했다가 변령성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었다. 이제 또다시 그의 무고(誣告)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할까. 입을 꾹 다문 채 변령성의 얘기를 듣고 있던 고선지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섬주에서) 후퇴한 것이 죄라면 죄다. 그 때문에 죽는다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물건을 도적질했다고 하는 것은 모함이다. 위로 하늘이 있고, 아래로 땅이 있으며, 당시 함께했던 군대도 모두 여기 함께 있지 않은가.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

 

고선지는 섬주에서 퇴각한 죄는 인정할 수 있으나, 국고를 사사로이 취했다는 모함은 억울하다고 항변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주변에 서있던 휘하의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내가 처음 수도에서 그대들을 모았을 때, 내줄 수 있는 물자와 군복이 모두 충분하지 않았다. 장차 그대들과 함께 적들을 물리치고 난 뒤에 높은 관직과 무거운 상을 받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적의 기세가 높았기에 군대를 이끌고 동관에 이르렀는데 그 또한 이곳을 굳건히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너희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마땅히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자, 고선지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나서서 “억울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리는 다른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점점 더 확산되더니 마침내 그곳에 몰려든 수만 명의 병사들이 함께 “억울하다! 억울하다!”를 큰 소리로 반복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 소리가 지축을 흔들고 사방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이민족 출신인 고선지가 과거에 수만금을 주어 매수하고 환심을 사고자했던 관료와 장수들은 정작 그의 구명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급군인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일관되게 믿고 따랐던 사람들, 눈바람이 몰아치는 행군로에서도 말없이 힘든 고난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일반 사졸들, 그리고 봉상청과 같이 본래 밑바닥부터 함께해왔던 사람들이었다. 왜 그동안 헛된 영화만을 좇으며 살았던가. 고선지는 수만의 분노한 병졸들에게 둘러싸여 얼음처럼 굳어있는 변령성의 옆을 지나, 거적대기 위에 누워있는 봉상청을 향해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예전에 나에게 홀로 찾아왔을 때, 내가 직접 그대를 선발하여 판관으로 삼았다. 또한 이후에는 나와 절도사직을 맞교대하기도 했다. 이제 그대와 여기서 함께 죽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고선지는 이렇게 말한 뒤 황제가 내린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군사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반군인 안록산의 휘하로 들어가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군인으로서 자기 평생의 경력에 그런 오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수만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결국 훗날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누명이 벗겨질 것을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고선지는 말없이 젊은 시절 자신을 찾아와준 유일한 동지였던 봉상청의 뒤를 따랐다.

안사의 난(안록산의 난) 때 피신을 하는 당 현종의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안사의 난(안록산의 난) 때 피신을 하는 당 현종의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현종은 처형당한 고선지의 뒤를 이어 장군 이승광에게 부대를 임시로 거느리게 하였으나, 동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안록산의 군대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군은 수도 장안마저 함락시켰다. 현종과 양귀비를 비롯한 조정 관료들은 허둥지둥 장안을 빠져나가 멀리 촉주(지금의 사천성 지역)까지 달아나야만했다. 양귀비는 그 피난길을 호종하던 성난 군사들의 강요에 의해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한편 고선지와 봉상청을 모함해 죽게 만들었던 변령성은 어이없게도 동관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안록산의 군대에게 항복해버렸다. 그 후 안록산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배신자’이자 ‘모함꾼’ 경력이 탄로 난 변령성도 당 조정에 붙들려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고선지는 8세기 중앙유라시아의 패권을 두고 제국들이 쟁패하던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당 제국과 명운을 함께 했다. 당에게 멸망당했던 고구려 유민의 후예가 당제국의 서역 지배와 관련된 총사령관의 자리에까지 승진하였고, 당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반란 사건 때 또다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기까지,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수많은 사건 장면들은 굴곡진 그의 생애와 더불어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고선지가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렸던 지나친 물욕과 출세욕은 그의 큰 오점이었으며, 이것이 결과적으로 당제국의 서역에 대한 지배, 그리고 ‘개원의 치’라고 하는 제국의 성세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작은 실마리가 되었다. 당 제국과 운명을 함께했던 한 이방인의 당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애가 이 시기의 복잡다단한 역사상과 인간 군상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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