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천민' 부락민 차별 둘러싼 일본 진보 분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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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천민' 부락민 차별 둘러싼 일본 진보 분열상
  • 윤재언
  • 승인 2022.01.0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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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락민 문제를 기억하고 배워야 한다” vs “더 이상 부락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락민 문제 근본적 입장 차 있는 일본 교원 조직과 좌파 야당

한국에서는 당연하게도 한일관계와 관련한 역사 문제가 주로 주목을 받지만, 일본 내에는 여전히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부락민(部落民, 부라쿠민)’ 문제다. 보통 ‘동화(同和, 동포융화의 줄임말, 도우와)’ 혹은 ‘피차별부락’ 문제로 불리는 부락민 문제는 일본 내 재일교포(자이니치 코리안)나 홋카이도 지역 선주민 아이누 문제와 함께 고질적 차별 이슈 가운데 하나다. 오사카를 포함한 간사이 정치를 생각하기에 앞서 이번 글에서는 지역 내 주요 이슈인 부락민 문제와 진보 진영 내 인식차에 대해 다뤄본다.

해당 문제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전근대시대 차별적 계급, 즉 천민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편견, 차별이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일본 일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들 부락민은 한국으로 치면 조선시대 백정(에타, 穢多)이나 광대 등 공연 예능(히닌, 非人) 계층에 해당한다. 이들 다수(특히 에타 계열 부락민)가 근현대에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과거와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외부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니 사회적 구별짓기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주소나 호적(현재는 호적 등록이 비교적 쉽게 바뀌긴 했다)상 부락 지역 출신자에 대해선 결혼이 기피되거나 취직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1970년대엔 일본 기업 인사담당자들 사이에 부락지역을 표시한 금서 ‘부락지명총람’이 돌아 큰 문제가 된 적이 있다(부락지명총람사건). 실제 몇 년 전 필자도 서일본 출신 일본인에게, 결혼예정자 중 한 명이 부락출신임이 드러나 파혼에 이른 사례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부락민 ‘인권 교육’ 강조하는 서일본 교사들

현재 부락민과 관련해 중요한 논점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느냐”는 또 하나의 역사인식 문제다. 부락민 문제를 현재진행형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과거의 문제로 보느냐다.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건 당사자 단체인 ‘부락해방동맹’(아래 사진)으로 이들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전후 일본 정부도 문제를 인식해 1969년 ‘동화대책법’을 통해 ‘동화지구’를 지정하고 각종 지원을 해왔으나 2000년대에 들어 이들 사업의 특혜와 부정이 드러나며 문제가 된 바 있다.

부락해방동맹 중앙본부 심볼
부락해방동맹 중앙본부 심볼

 

흥미로운 지점은 부락민 인식에 관해선 ‘자민당 대 야당’이라는 구도보다 ‘좌파 야당 내 입장차’가 더 부각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야당 지지 교원조직 중심으로 교육 현장에서 부락민을 어떻게 가르칠지에 대해 첨예한 대립이 존재한다. 간사이, 추코구(中国, 히로시마부터 야먀구치를 포괄한 지역), 시코쿠(四国)는 전후 일본에서도 ‘인권교육’이 활발한 지역이다. 여기서 인권이라 함은 보편적인 인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심은 부락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이니치 코리안이나 다른 인권 문제도 다뤄지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부락민 차별에 대한 계몽적 교육이었다. 

냉전시기 이후(쇼와시대) 인권 교육을 주도한 게 교원노조, ‘일교조(日教組)’ 소속 교사들이다. 일교조는 과거 일본사회당 최대지지기반 가운데 하나였던 노조 조직 ‘총평(総評)’ 내에서도 상당히 좌경화된 입장(공산권에 우호적)을 취하고 있었고, 부락민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입장이었다. 냉전 시기 교원 가입률은 대체로 50%를 웃돌았다(현재는 20% 안팎까지 하락, 아래 그래프). 특히 이들 일교조 세력이 강했던 게 전통이 깊은 서일본지역이었다. 1953년 발족한 ‘전국동화교육연구협의회(全国同和教育研究協議会)’에 간사이, 추고쿠, 시코쿠 지방 교원조직이 주도적으로 참가한다.

일교조 가입률 (출처: 문부과학성 홈페이지, 밑에 연도는 일본 연호)
일교조 가입률 (출처: 문부과학성 홈페이지, 밑에 연도는 일본 연호)

인권 교육은 단순히 부락민 문제를 설명하고 토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부락민 출신자를 불러서 차별경험에 대해 말하게 하거나 부락민 교사가 설명하는 식의 좀더 본격적인 형태를 취했다. 그 외에 부락민 출신 학생이 당당하게 ‘부락민 선언’을 하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교육은 자이니치 코리안에 대해서도 반복됐기에 관심이 있는 분은 적잖은 한국 다큐멘터리에서도 접했으리라 생각된다. 서일본지역에서는 지금도 인권 교육이 비교적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2021년 12월 23일 아사히신문 기사).

이에 반해 일본 중심부 아이치현을 포함한 동일본(규슈도 비슷하다)에서는 이 같은 인권교육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들 모든 지역에 동화 지구가 없는 건 아니나(다만, 도쿄에는 없다), 실제 동일본 출신 일본인과 얘기해보면 부락 문제에 대해 현재의 문제로 인식을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서일본에서는 부락이라는 말이 터부에 가까우나, 동일본에서는 부락이라는 단어가 한국과 같은 의미로 쓰일 뿐이다. 사실 이 때문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도 가능하다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선 뒤에 다시 적는다.

참고로 코로나 이전 한국인들도 여행으로 많이 찾았던 오사카 번화가 난바(難波) 인근(아래 사진, ‘모든 차별의 조기철폐와 인권존중 마을 만들기’라고 적혀 있다)이나 교토역 근처에도 부락이 존재한다. 부락 지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특히 도축업에 종사한 부락민이 많았던 지역)가 정육점(혹은 식육가공공장)이나 가죽 가공업이 특이하게 많다는 점이다. 이 역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이른바 ‘부락 산업’이 그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또한 주거지 개선을 목적으로 한 개량주택(보통 무미건조한 아파트)이 세워져 있고 번화가와 가까움에도 이상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것도 특징이다. 유튜브에는 이 같은 부락 지역과 자이니치 코리안 집단 거주지를 찾아다니며 영상을 올리는 유튜버들도 있다(아래 영상 참고). 

오사카 번화가 인근 부락민 지구에 있는 게시판
오사카 번화가 인근 부락민 지구에 있는 게시판

부락민 인식 관련한 분열과 정치적 대립

일본 좌파 진영 내부, 특히 교육계에서 부락민 인권교육에 대한 입장 차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는 1989년에 생긴다. 같은 해 노조 내 우파(대기업 노조)가 중심이 돼 좌파 일교조와 공무원노조를 통합한 ‘연합(렌고, 連合)’이 탄생했고, 이를 “일교조의 우경화”라 비판한 더 왼쪽의 친공산당 중심 교원 세력이 1991년 ‘전교(全教)’를 만들어 떨어져 나간다. 보통 일교조 소속 교사는 중학교 이하에 많고, 전교는 고등학교가 지배적이다. 물론 최근 조합원수는 여전히 일교조 소속이 20만-30만명으로 전교(5만명 안팎)보다는 많은 상황이다(2016년 9월 SAPIO 기사). 

이들 조직의 중요한 차이가 부락민에 대한 인식이었다. 일교조(현재 지지정당은 대체로 입헌민주당)는 여전히 부락민에 대한 인권교육을 강조하는 반면, 공산당과 전교는 “더 이상 일본 내 부락민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후자는 부락민 문제를 과도하게 다룸으로써 굳이 제기하지 않아도 될 문제가 드러나 오히려 차별이 재생산된다는 입장이다. 차라리 다른 마이너리티 문제에 더 집중하자는 얘기다. 근본적인 정체성 차이가 있는 것으로, 하부조직에서 이 같은 차이점을 좁히지 못하는 상황 속에 공산당까지 함께 하는 야당 간 연대가 수월할 리 없는 셈이다.

부락민 문제를 둘러싸고 좌파 내 대립이 가장 선명한 형태로 드러난 게 교토시장선거다. 일본의 고도(古都)로 보수적일 것 같은 이미지가 있는 교토지만, 실제로는 공산당 기반 조직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아래 공산당 교토부위원회 본부 사진, 자체 새 건물에 입주할 만큼 재정적 여력이 있다). 오사카의 유신회 확장세도 교토에서는 그다지 힘을 못 쓰고 있다. 이 역시 공산당 세력의 저지가 거론된다. 

일본공산당 교토 건물
일본공산당 교토부 위원회 건물

이런 교토에서 ‘공산당 추천 후보’ 대 ‘다른 모든 정당 추천 후보’가 시장자리를 놓고 격돌한다. 2008년 공산당 추천(추천은 정당 소속으로는 출마하지 않지만 지지한다는 의미)으로 미나마타병 문제를 다뤄온 인권 변호사 나카무라 카즈오가, 이에 대항해 자민당, 공명당, 민주당, 사민당(사실상 반공산당) 추천으로 공무원 출신 카도카와 다이사쿠가 출마한다. 일부 다른 무소속 후보도 출마했는데 당시 선거 결과는 카도카와 15만 8472표(37.25%), 나카무라 15만 7521표(37.02%)로 그야말로 접전이 펼쳐져, 모처럼 교토에 좌파 지자체장이 탄생할 뻔했다. 

선거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동화 사업, 즉 부락민에 대한 우대 정책의 폐지였고, 이는 공산당 추천 나카무라의 공약이었다. 해당 사업이 부정을 낳고 차별을 오히려 고착화한다는 데서 나온 발상이었다. 4년 뒤 2012년에는 두 후보가 1대 1로 붙어, 카도카와(공산당 외 모든 정당 추천)가 54.85%, 나카무라(공산당 추천)가 46.14%를 얻는다. 교토시장직을 얻지는 못했으나 교토시내 공산당세의 굳건함과 부락문제로 인한 대립(특히 좌파 내부)이 여전함을 보여준 선거였다.

지난해 일본 총선에서 야당 단일화가 세부 조직을 포괄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데는 이 같은 근본적 정체성 차이가 봉합되지 못한 영향도 지적된다. 특히 기존 좌파 야당 조직(구 사회당계열)과 공산당 조직이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단순히 선거만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얘기다. 일본 내 최대노동단체이자 민주당 계열 후원세력인 ‘연합’의 회장이 계속해서 “공산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외치는 것도 단순히 과거 갈등의 영향만은 아니다.

결국 일본에서 공산당을 포함한 선거 연대가 원활히 이뤄지고 향후 정권 교체를 바라보려면 이 같은 세부적인 문제에서도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NL과 PD가 화학적 결합에 실패했듯 그 과정은 솔직히 비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분열이 지속되는 다른 이슈 가운데 하나인 원폭 피폭자 문제 관련해 추후 다뤄볼까 한다. 

 

윤재언   sharply2u@gmail.com    최근글보기
일본 히토츠바시대 강사, 전 신문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2010년 매일경제신문 입사.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자일을 뒤로 한 채 2015년 훌쩍 바다를 건넘. 2021년 히토츠바시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뒤 연구자의 길에 접어듦. 전공은 국제관계(국제정치경제)지만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정치 / 경제 / 사회(특히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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