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배' 아베 잃은 강경보수 다카이치 사나에의 위기

  • 기자명 윤재언
  • 기사승인 2023.04.14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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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보수의 호프'로 부상해오다 아베 사후 계속된 헛발질
스스로 위기 자초하며 정치적 미래 불투명해져

아베 신조 전 총리 사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정치인을 꼽을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다카이치 사나에 현 경제안보담당대신(장관)이다. 아베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촉망받는 차기 여성정치인으로 적극 밀어주고, 지난 2021년 총재 선거때는 직접 지원에 나선 바 있기 때문이다. 당시 선거에 대표추천인으로 이름을 올린 건 세이와카이(清和会, 아베파) 소속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대신과 극우에 가까운 에토 세이시 등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카이치는 총재선거에서 국회위원 표로 2위(전체로는 3위)를 기록하며 세를 과시하기도 했다. 

평소 보수 지지자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왔고, 트위터에서 거침없는 보수 발언 등으로 아베의 눈에 들었던 정치가였다. 유튜브도 일본 정치가로서는 이례적으로 구독자수가 16만에 달한다(아래 사진). 물론 시청자 대부분은 넷우익으로 불리는 보수, 극우 지지층들이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유튜브 채널.

다만 다카이치 본인은 현재 파벌에 속해 있지 않다. 애초 세이와카이 소속이었으나 2012년 자민당의 정권 복귀가 점쳐지던 시점 파벌을 탈퇴한다. 이유는 당시 파벌 차기 회장으로 총재선 출마가 점쳐지던 마치무라 노부타카를 지지할 수 없고, 파벌 소속 평회원인 아베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4월 11일자로 이에 대해 본인이 직접 설명하는 동영상이 있어 아래 첨부한다. 제목은 '아베 전 총리에 대한 헌신, 다카이치 사나에가 무파벌인 이유'다.

 

 

하지만 업무 능력으로는 늘 의문부호가 따라왔고, 일본 정치에서 특히 중시되는 당내 조정 능력도 평가받지 못했었다. 주로 지지층에 대한 어필과 아베라는 거물 정치인의 비호가 다카이치의 배경에 있었다.

그 와중에 아베가 숨지고, 평소 관계가 그다지 가깝지 않던 기시다가 총리가 되면서 정치적 미래가 불안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최근 일어난 두 가지 문제가 다카이치의 정치적 위기를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하나는 언론과 방송을 관할하는 총무대신 시절에 일어난 방송 개입시도 대응 문제로, 다른 하나는 나라현 지사선거에서 자민당 후보가 유신회에 패한 일이다.

 

아베 측근 되며 승승장구 시작한 다카이치

우선 다카이치의 정치적 배경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명문 고베대를 졸업하고 정치인재 산실로 유명한 마쓰시타정경숙에 들어간 다카이치는 방송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시사 방송 캐스터를 잠시 한 뒤, 정치개혁 열풍이 분 1992년 자민당에서 참의원 선거 출마를 시도하나 좌절되고, 이듬해 1993년 중의원 선거에 32살 나이로 무소속 출마해 당선된다(아래 사진). 당시는 중선거구제로, 당선자 5명 중에 최다 득표(13만표)를 거뒀다.

첫 당선을 거둔 다카이치 사나에(출처: 다카이치 사나에 홈페이지)

이후 자민당 이탈집단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에 참가한 뒤, 오자와 이치로가 이끈 신진당으로 합류해 소선거구제가 된 1996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오자와와 정책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해 탈당해 자민당으로 당적을 바꾼다. 이때부터 파벌 소속은 세이와카이였다. 

오부치 내각 때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정무차관, 고이즈미 내각 때 경제산업부대신을 지내나, 2003년 중의원 선거 때 낙선하고 만다. 낙선 중에 당시 자민당 의원이었던 야마모토 타쿠와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차례 이혼을 거쳐 현재 재결합한 상황이다.

2005년 중의원 선거 때는 고이즈미에게 ‘자객’으로 발탁돼 당시 고이즈미의 우정 민영화에 반대한 자민당 현역 의원 대항마로 출마해 당선된다. 이후 2006년 아베가 총리가 될 때부터 중용돼, 오키나와나 저출산, 남녀 평등 등을 담당하는 대신에 임명된다. 특기할 점은 당시 대신 중에 유일하게 야스쿠니를 참배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행보가 아베의 눈에 들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파벌을 탈퇴하면서까지 아베를 적극 지원한 다카이치는, 자민당이 정권에 복귀하면서 승승장구한다.

총무대신 임명된 다카이치 사나에(출처: 다카이치 사나에 홈페이지)

여성으로는 처음 당의 정책을 총괄하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당 내부뿐만 아니라 부처와도 직접 정책을 조율)에 발탁된다. 그 뒤 2014년부터 3년간 미디어 정책과 지방자치 등을 관장하는 총무대신에 임명된다. 역대 가장 긴 임기였는데, 한 차례 물러난 뒤 아베는 2019년 다시 동일한 자리에 다카이치를 등용한다. 그만큼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2020년 아베 퇴진 후에는 특별한 역할을 맡지 않다가 다시금 수면 하에서 아베 재등판을 모색한다. 아베 재등판이 실현되지 않자 직접 총재선거에 나선 것은 앞서 적은 바와 같다.

2021년 기시다가 새 총리로 뽑혔음에도 경쟁자 다카이치는 별다른 정치적 타격을 받지 않았다.

기시다가 막후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아베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였고, 그 후계자로 평가되는 다카이치를 배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덕에 다카이치는 기시다 정권 초기 자민당 정조회장에 다시 발탁된다. 그러나 이 때부터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어필하는 다카이치를 우회해 관저와 당, 관료가 따로 소통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건전재정을 강조해온 기시다 측(고치카이)과 적극재정 중시의 다카이치(와 아베쪽)가 충돌한다는 지적이 많았고, 다카이치가 당내 조정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계속 불만이 있어왔다.

 

아베 사망 이후 정치적 위기 자초하는 행보 

아베가 2022년 7월 총격으로 사망하자 평소 다카이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기시다는 다음달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정조회장을 아베파 중진인 하기우다 고이치로 내정하고, 다카이치를 내각(경제안보담당대신)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하기우다는 직전까지 경제산업대신이었다.

두 사람 다 인사에 불만을 표했는데, 특히 다카이치는 트위터에서 대놓고 “조각 전날 밤 기시다 총리에게 입각 요청 전화를 받았을 때 우수한 현직 대신의 유임을 부탁하고 21년 전 잡지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다음날 입각에 변화가 없다는 것에 당황했고, 지금도 굉장히 괴로운 기분”이라는 글을 올린다. 잡지는 통일교 연관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는 것으로, 당시 자민당 정치가와 통일교의 관계가 이슈가 돼 있었다. 이런 일까지 거론하며 입각하기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다는 얘기였다.

당내 융화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자민당에서 총리 인사에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사실 경제안보담당대신은 거대 부처를 이끄는 장관 자리와는 거리가 멀고,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직속 위원회 위원장 같은 느낌이다. 허울뿐인 일종의 좌천성 인사였기 때문에 반발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방패막이를 잃은 다카이치의 내부 평판을 더 떨어뜨리는 계기가 된다.

이 와중에 지난 3월 2일, 총무성 관료 출신이자 입헌민주당 의원 고니시 히로유키가 내부 행정문서를 폭로한다. 2015년 아베 측근이자 총무성 출신 전 참의원 의원 이소자키 요스케 수상보좌관의 방송 개입 발언이 담긴 문서다. 이소자키가 당시 총무성에 대해 특정 시사프로그램(일요일 아침의 ‘선데이 모닝’, 비교적 시청률이 높으며 정부 비판적인 내용이 주)을 거론하며 “방송국을 견제해야 한다”며 압력을 가하는 발언 등이 담겨 있다.

당시에는 아베 정권이 방송법과 관련해 ‘프로그램 전체를 봐야 한다’는 기존의 공정성 해석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바꾸려는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었다. 다카이치는 해당 해석 변경의 선봉장 역할이었다. 해당 문서는 당시 관저가 어떻게 방송국에 압력을 가하려 했는지 그 의도와 발언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공개된 전문은 여기서 확인 가능).

이 문서에는 다카이치가 압력 관련한 내용을 보고 받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사실 당초 고니시 의원의 폭로는 관저 주도의 방송 개입이 주된 프레임이었으나, 다카이치가 돌연 국회에서 “자신에 관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 다 날조”, “괴문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면 의원직 사직” 등 강경발언을 이어가며 초점이 옮겨간다. 평소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날조”라 하던 보수세력의 습관이 그대로 나온 것이라 봐도 될 듯한데, 이 발언이 결국 다카이치의 발목을 잡는다. 

기시다는 다카이치의 경질 등은 부정했으나 그렇다고 감싸주지도 않았다. 국회에 출석한 총무성 고위관료들은 애매한 발언을 하면서도 결론은 “날조 가능성은 높지 않다”였다.

그러다 총무성은 돌연 ‘행정문서’임을 인정하고 폭로가 있은 지 5일만에 전문을 홈페이지에 올려버린다. 전임 대신인 다카이치가 부인하는 문서의 존재와 내용까지 공개한 데는, 기시다의 의향이 작용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서에는 “이 정도까지 자세하게 기록하다니 관료들도 힘들겠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발언이 날 것 그대로 기록돼 있다. 여론 악화에 더해 자신을 도와주는 세력이 넷우익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카이치는 발언을 수정해간다. 다만 끝까지 사과는 하지 않는 상황이다(아래 영상). 언론에는 다카이치를 성토하는 익명의 자민당 의원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4월 9일 있은 나라현지사 선거의 지원후보 패배는 다카이치의 정치적 자산에 더욱 타격을 입혔다. 현직 지사(과거 자민당이 추천)가 출마의사를 굽히지 않은 가운데, 다카이치는 자신의 총무대신 시절 측근이었던 전 관료를 자민당 추천후보로 밀었다. 그러나 자민당 선거대책위워장이 출마 준비하는 현직을 격려하는 등 내부 분열이 조율되지 않은 채 보수 후보가 두 명 출마하게 된다. 최근 간사이 전역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는 오사카유신회는 자민당 내부 분열을 호기로 보고 변호사이자 나라현 이코마시 전 시장을 대항마로 세워 승리했다.

자민당 나라현 지부회장이기도 한 다카이치는 지역에서 선거가 벌어짐에도 지원 활동을 할 수 없었다. 4월 7일에야 겨우 나라를 찾아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거기에 말려든 스스로가 어리석었다”라며 자조적인 발언을 했다고 한다. 주위에는 그간 “표가 떨어지기 때문에 나라에는 갈 수 없다. 지금 악인 취급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부재자 투표를 하겠다”고도 했다.

실제 표가 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자민당 표가 분산되면서 현직 지사가 16.2%, 다카이치 지원후보가 32.8%를 얻었다. 단순합계로 과반수를 넘었음을 볼 때, 유신회 후보가 44.4%를 얻은 상황에 후보 단일화가 가능했다면 이변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다카이치가 불출마 설득에 실패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자민당 내에서는 다카이치에게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선거 결과에 대해 다카이치는 “책임을 통감”한다면서도 “자민당 나라현지부가 추천한 후보 외에 다른 후보를 응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의 목소리도 있다”고 당본부에 책임을 일부 돌렸다분열 선거가 온전히 자기 책임만은 아니라는 항변으로 들리면서 자민당 내부에서도 “후보자 조정을 게을리한 자신의 책임을 뒤로 하고 당본부에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건 문제”라는 발언이 언론을 통해 나온다.

아베라는 뒷배를 갑작스레 잃은 다카이치에게 온전히 자신의 정치력이 평가받는 시점이 온 셈인데,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당 내외부를 모두 적으로 돌리는 상황이다. 게다가 무파벌이라는 점과 이전부터 아베 외 세이와카이의 다른 의원들과 관계도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던 점은, 향후 정치적 미래 역시 불투명하게 하는 요인이다.

과거 아베의 총애를 받으며 극우발언을 반복해온 이나다 도모미가 최근 일부 방향 전환을 하며, 넷우익 등과 거리를 벌리고 있는 데 비해, 다카이치는 너무 깊숙이 지지를 받고 있어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다카이치의 위기는 명확한 극우 우익 노선이 아베 사후 후퇴하는 하나의 정치적 현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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