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윤 대통령 ‘쌀 정부 매입’ 말 뒤집었다?

  • 기자명 송영훈 기자
  • 기사승인 2023.04.0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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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 시절 쌀 시장 격리 요구는 사실
‘쌀 격리 요구’ 반대가 아니라, ‘양곡법 개정안’에 반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 매입하도록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양곡법)’에 대해 법률안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관련해 온라인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일부 언론에서 윤 대통령이 과거 야당 대선 후보시절에는 “정부가 과잉생산된 쌀을 매수해야 한다”고 했다며, ‘말뒤집기’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뉴스톱이 확인했습니다.

 

20대 대선을 3개월여 앞둔 2021년 12월 28일 농림축산식품부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쌀 생산량은 388만 2천 톤으로 전년 대비 10.7% 증가하여 수급 상 26만 8천 톤이 과잉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그로 인해 수확기 초인 10월부터 산지쌀값의 하락세가 지속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현행 양곡관리법에 따르면, 시장격리(생산량이 수요량을 초과할 경우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사들여 쌀값 폭락을 막는 제도)는 쌀 수확량이 수요량보다 3% 이상 증가하거나 가격이 전년 대비 5% 이상 하락하면 발동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시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발동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당시 여야 대선 후보는 정부가 쌀 시장 격리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쌀 27만 톤 시장 격리를 주장했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더 나아가 30만 톤을 격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윤 후보는 12월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농민들은 하루빨리 쌀 시장격리 시행에 정부가 나서달라고 아우성”이라며 “정부는 30만t의 쌀 시장격리에 나서주기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미 양곡관리법상 기준으로 시장격리 요건은 충족된 상태”라며, “늦추고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대선 막바지인 2022년 2월 25일에도 이어졌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25일 보도자료를 통해 “문재인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충분히 제때 격리하지 않아 농민들이 쌀값 폭락 위기에 처했다”면서, 초과 생산량 30만t 중 아직 격리되지 않은 15만t을 즉각 시장격리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만을 따져보면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온 윤 대통령이 말을 뒤집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따져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윤 대통령은 ‘과잉 생산된 쌀 매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양곡법 개정’, 정확하게는 현재 민주당이 추진하는 ‘양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양곡법 개정안은 국내 쌀 수요 대비 초과 생산량이 3~5%이거나 쌀값이 전년보다 5~8% 하락할 때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모두 사들인다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양곡법 개정에 대해 여러 차례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왔습니다. 의무 매입이 국가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고 쌀 과잉 생산을 부추길 수 있어 결과적으로 농업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양곡법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직후인 지난해 10월 20일 용산 대통령실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에서 “농민들에게 별로 도움이 안 된다”며 반대 입장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지난 1월 농림축산식품부 업무보고 모두발언에서도 “무제한 수매는 결코 우리 농업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인 지난 해 9월 26일 “농민이 피땀 흘려 생산한 쌀을 신속하게 매입하라”고 당부한 바 있습니다. 직접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당정의 ‘쌀 45만 톤 격리’ 방침을 언급하며 지시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실 이재명 부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폭락’ 수준으로 평가되는 산지 쌀값이 조기 회복될 수 있도록 빠르고 과감한 조치를 당부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전날인 9월 25일 고위당정협의를 열어 수확기 쌀값 안정을 위한 시장격리 방침 등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농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농업·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쌀 수급안정을 책임질 의무는 있으나 자동시장격리를 아예 법제화하는 방안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벼농사 수확 항공촬영 (이미지 출처: KBS 바다)
벼농사 수확 항공촬영 (이미지 출처: KBS 바다)

지난 23일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수정안은 쌀이 수요량의 3~5%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쌀값이 평년가격 대비 5~8%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가 ‘수확기(10~12월)에 쌀을 의무적으로 모두 매입’하도록 한 것이 핵심입니다. 기존 양곡법에 따르면 정부는 최저가로 입찰된 쌀을 자율적으로 구매할 수 있었지만, 양곡법 개정 후에는 시장 가격에 의무적으로 매입해야 합니다.

민주당은 농민 생존권과 식량 안보를 위해 법 개정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2021년 기준 한국의 식량자급률은 44.4%, 곡물자급률은 20.9%로 해외 의존도가 높은 편입니다. 그나마 자급 곡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쌀인데, 쌀 생산량마저 줄어든다면 식량안보 위기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핵심은 이명박 정부 이후 사라진 '사전 생산 조정제'를 통해 쌀 생산량을 통제하고 그래도 초과 생산되면 매입하는 것이 골자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정부와 여당은 “남는 쌀 강제매수법”이라는 입장입니다. 국가 재정 부담이 커지고 쌀 생산 과잉을 초래해 결국 농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일 국회에서는 이를 놓고 민주당 신정훈 의원과 한덕수 국무총리간의 날선 공방이 있었습니다. 

정작 농민들은 “현재 제출된 법안이 확정되면 쌀값이 평년대비 8%나 떨어져야 의무매입을 한다는 건데, 2021년산 쌀값이 45년 만에 가장 큰 낙폭을 보였을 때 7.8%가 떨어진 것이었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양곡관리법은 이전보다 더 후퇴한 법안”이라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고유권한인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2016년 5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이후 약 7년 만입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다시 국회로 이송됐고 민주당은 재의결을 추진하겠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헌법 제53조에 따르면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있을 때 국회는 이를 본회의에 상정해야 합니다.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2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이 재의를 요구한 법률안은 법률로 최종 확정됩니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원이 115명임을 감안하면 민주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결을 추진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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