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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구와 여성으로 '문명'을 재조명하다[이경혁의 게임 팩트체크] '문명6' 확장팩 흥망성쇠의 비주류 캐릭터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인류 문명을 통 크게 그려낸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문명’ 시리즈는 이제 한국에서도 더 이상 일부 게이머만 알고 있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시리즈의 제 5편이 출시될 즈음에 4편의 OST였던 ‘Baba Yetu’와 함께 ‘패왕 간디’가 인터넷 밈으로 활용되면서, 이른바 ‘문명하셨습니다’ 붐을 타고 이 위대한 역사 게임 시리즈는 좀더 보편적인 입지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인터넷 밈으로 크게 유행했던 ‘패왕 간디’. 평화주의자 간디가 ‘문명 5’에서 거친 언행을 보여 큰 인기를 얻었다.

실제 역사에 등장했던 기술과 인물, 제도를 차용하여 가상의 대륙에서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게임이기 때문에 ‘문명’ 시리즈는 역사 속에 등장한 주요 문명들과 그 지도자들을 플레이 가능한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대략 4개에서 많게는 10여 개에 이르는 각각의 문명들이 한 판의 게임 안에서 서로 더 좋은 자원을 차지하고 타 문명보다 앞서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 ‘문명’ 시리즈의 핵심일 것이다.

초반 시리즈에서는 주로 널리 알려진 세계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과 국가들의 묘사에 치중하던 ‘문명’ 시리즈는 최근작에 가까울수록 등장하는 문명과 지도자 부문에서 좀더 다양한 구성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 결과, 2018년 2월에 발매된 6편의 확장팩 ‘흥망성쇠’ 에 이르면 여러 모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문명들, 여성 혹은 유색인종, 서구 중심의 세계사 바깥에 머물렀던 문명의 지도자들도 대거 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게임 ‘문명’ 시리즈가 서구 중심 역사의 바깥을 주목하면서 보여 주는 새로운 역사와 인물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비서구, 비백인, 비남성을 비추다

역사를 다루는 게임 시리즈로서 ‘문명’ 은 초기에는 주로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한 문명들을 등장시켜 왔다. 세계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딱히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 없는 구성이 주를 이뤘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그리스, 프랑스, 독일 등의 문명이 등장했고, 지도자들도 링컨, 알렉산더, 칭기즈 칸, 나폴레옹 등 어지간하면 모르기 힘든 인물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시리즈는 이어지면서 갈수록 기존의 세계사 바깥 테두리를 조망하고자 노력해 왔다. 2편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인 수우 족의 타탕카 이요타케가 지도자로 등장하며, 3편부터는 본격적으로 고난이도 세계사를 돌파하지 않으면 익숙하지 않은 이름과 문명들이 등장한다.

3편에 처음 등장한 인물 중 가장 생소한 이름이라면 역시 히타히트 문명의 무르실리 1세일 것이다. 한국 세계사에서는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 대한 요약 즈음에 살짝 등장하는 히타히트의 무르실리 1세가 ‘문명 3’의 확장팩에서 플레이 가능한 군주로 등hr장하는데, 국내에서는 세부적인 자료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정도의 인물이다.

시리즈 3ㆍ4편에서는 주로 첫 발매시에는 이름난 문명을 중심으로 출시하고, 확장팩 발매를 통해 기존 교양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문명들을 출시하던 전략은 5편과 6편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기존 역사에서 보기 힘든 문명들이 전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문명 5’의 첫 발매 문명에는 태국의 시암 왕조가 처음으로 등장해 동남아시아 역사의 등장을 열었으며, 서아프리카의 송가이 왕국도 이름을 알렸다. 5편의 확장팩에서는 최초로 폴리네시아 문명인 하와이의 가메하메하 1세가 출현해 군도에서의 문명 특성을 보여주었으며, 2차대전 초기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인해 망명했다가 전후 복귀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를 통해 근대 아프리카의 의미를 보여준 바 있었다.

'문명5'에 등장하는 비주류 문명의 지도자들. 왼쪽부터 하와이의 가메하메하 1세, 태국 시암의 람캄행, 아프리카 송가이의 아스키아.

가장 최근에 출시된 ‘문명 6’ 과 그 확장팩 ‘흥망성쇠’ 에 이르면 새로운 인물과 역사를 거의 공부하게 되는 수준에 도달한다. 본편 문명으로 서아시아 북부의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의 토미리스 여왕이 첫 등장을 알렸고, 콩고 문명의 은징가 음벰바가 등장한다.

6편의 첫 문명들이 갖는 여러 의미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지 식민지로만 치부되던 지역이 나름의 발전을 이룩한 과정들을 문명이라는 이름 안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브라질의 페드루 2세, 호주의 존 키틴 등은 기존에는 유럽 제국주의의 발흥에 의한 식민지의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었으나, 6편은 이들을 본격적인 시작 문명으로 등장시킨다. 이는 이들이 단지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타자화된 무언가가 아닌,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회와 문화를 만들어냈음에 주목하는 시선으로부터 비롯된다.

한국 문명의 변화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한국의 경우 3ㆍ4편에서 왕건을 메인 캐릭터로 내세워 등장한 바 있었고, 정식 한글화가 이루어진 5편에서는 세종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호응을 얻은 바 있었다. 6편에서는 최초 문명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확장팩 ‘흥망성쇠’에서 한국은 이번에는 선덕여왕을 전면에 내세운 과학 중심의 국가로 재등장한다.

재미있는 지점은 새로운 지도자로 선덕여왕이 선택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문명’ 시리즈는 여러 역사 속 인물 중에서도 여성 지도자들을 계속 발굴하고 등장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리즈의 2편에서는 아예 문명을 선택한 뒤 지도자를 남성/여성 중 선택하는 방식도 도입한 바 있었으며, 이후 시리즈에서도 특정 문명의 지도자를 기존의 역사에서 전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지도자를 골라 세우는 모습들이 자주 나타났다. 따로 챙기지 않으면 누군지도 몰랐을 적지 않은 여성 지도자들이 ‘문명’ 시리즈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문명6 확장팩 '흥망성쇠'에 등장한 신라 선덕여왕

6편 확장팩에서 등장하는 조지아의 중세 번영을 이끈 타마르 여왕, 프랑스 발루아 왕조 대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 고대 브리튼에서 로마에 맞서 싸웠던 켈트의 부디카 등을 조명하는 ‘문명’ 의 시각은 앞서 언급한 비서구, 비백인 역사에 대한 접근에 더해 비남성이라는 입장을 하나 더 세운다. 역사 속에 실존했고 나름의 의미를 남겼던 인물들이었지만 실제 행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들을 ‘문명’은 비서구ㆍ비백인ㆍ비남성의 관점에서 다시 접근하며 대중 역사에 새로운 자극을 가한다.

확장의 문명, 경쟁의 역사, 이면의 이야기가 만든 조합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바일 등을 제외한 정식 넘버링 시리즈의 확장팩 포함 등장 지도자는 대략 120명에 달하고, 이 중 여성 지도자는 32명으로 전체의 약 25% 수준이다. 1편부터 6편까지 개근에 가깝게 등장하는 문명들도 아무래도 기존 역사관의 중심에 서 있는 문명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문명’ 이 끊임없이 기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지점들을 살피고 재현해내고 있다는 점은 단지 신선하고 새로운 소재의 발굴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존 역사라는 어느 정도 제도화된 틀 밖에도 역사가 존재하고, 미처 닿지 않았던 지점에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시각들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문명’의 시도는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마냥 칭송으로만 끝나는 것 또한 애매하다. 애초에 게임 ‘문명’이 기대고 있는 방식은 지속적인 자기 세력의 확장으로부터 펼쳐지는 경쟁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일부 원시티 플레이나 평화주의 플레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확장이라는 방법을 기반으로 한다는 면에서 ‘문명’은 각 개별 문명이 끝없는 확장으로부터 발전의 동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게임이기도 하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문명과 역사부터가 이미 확장과 침탈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은 게임이 시도하는 역사의 이면에 대한 파고들기에 대한 칭송과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여러 해석들이 가능하고, 짧은 글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문명’ 시리즈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실제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문명들의 확장 과정을 재현하되, 그 이면에 가려져 있던 사실들을 대중들에게 좀더 이야기하는 정도라고는 읽어낼 수 있을 듯 하다.

이경혁 팩트체커  grolmarsh@gmail.com    최근글보기
게임칼럼니스트 겸 문화 비평가. 여러 매체에 게임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게임과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게임이 사회를 매개하는 매체로서 지니는 의미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이경혁 팩트체커  grolmar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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